[단독] “한국 떠나겠다” 김구림 작가·MMCA , 갈등 빚은 도록…결국 재인쇄하기로 합의
[단독] “한국 떠나겠다” 김구림 작가·MMCA , 갈등 빚은 도록…결국 재인쇄하기로 합의
  • 이은영 ·김연신 기자
  • 승인 2024.04.03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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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기획 단계부터 시작된 갈등…양측 입장 계속 엇갈려
“작품 500점 기증계획 백지화하고 한국 떠나려해”
가제본 검수 단계 생략한 사실도 문제
미술법 상 '동일성 유지권' 위반 제기
“미술관은 개방성을 가져야하는 곳, 매우 무책임한 태도”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김연신 기자] 원로작가 김구림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갈등을 빚은 도록이 결국 재인쇄될 예정이다. SNS와 언론을 통해 억울함을 호소하던 김 작가와 재인쇄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미술관의 첨예한 대립 끝에 내려진 결정이다.

어제(2일) 오전 김구림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미술관 측과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만남 직후 김구림 작가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도록은 판매하지 않고 수정 후 재인쇄하기로 합의했으며, 기존 인쇄본의 기관 배포 허용은 고민 중”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미술관 측은 “1쇄 인쇄본은 판매하지 않고 작가와 협의 후 기관 배포 범위를 결정할 예정이며, 1쇄가 소진되는 시점에 수정을 거친 2쇄를 인쇄 예정”이라고 밝히며 다소 상이한 입장을 보였다. 합의를 마쳤지만 여전히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며, 갈등은 불씨를 남겨둔 채 봉합되지 않은 상태로 보인다.

▲지난 2월 28일 김구림 작가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게시글.
▲지난 2월 28일 김구림 작가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게시글.

원로 작가가 고국을 떠나고자 결심하기까지

지난 달 28일 김구림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 작가는 “원래 종로구청에 1950년부터 2020년대까지의 작품 500점을 기증할 예정이었으나,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그 계획마저 백지화 하고자 한다”라면서 “대화가 안 되는 이 땅에서 왜 작품을 기증해야 하는가. 올해 중으로 뉴욕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폭탄 선언을 했다. 또한, 미술관의 대응 방식에 대해 “그 몇 푼 아끼겠다고, 큰 국가적 이익을 포기한 셈”이라고 덧붙였다. 올해 1월 발행된 도록 문제와 관련 국립현대미술관과 문화체육관광부와의 불통이 작가가 큰 결심을 하게 된 원인이다. 

▲타 도록에 실린 도판과의 색상 차이를 설명 중인 김구림 작가의 모습이다.
▲타 도록에 실린 도판과의 색상 차이를 설명 중인 김구림 작가의 모습이다.

이날 김구림 작가는 “도록 발행시, 작가의 최종 가제본 확인을 거치지 않고 인쇄되면서, 작품의 고유 색깔 변형 등 여러 문제점이 발견됐다”라며 미술법의 '동일성 유지권' 위반 문제를 제기했다. 동일성 유지권이란 저작자가 그의 저작물의 내용 · 형식 · 제호(제목)의 동일성을 유지할 권리를 말한다. 문제가 된 도록은 지난해 8월 25일부터 지난 2월 2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김구림展》 도록으로, 지난 1월 30일 발행됐다. 

지난 2월 인쇄된 도록을 받아보니, “원래 하얀 색상의 작품인데 회색빛으로 인쇄되는 등 100점 이상의 작품들이 기존 작품의 색채와 아예 다른 색감으로 왜곡돼 인쇄되는 문제점이 발견됐다”라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미출품작 구분을 위해 쓰인 배경지 역시 암탁색으로 디자인해 작품의 색상을 죽인다는 점 또한 지적했다. 

그는 “사전 검수 과정에서 가제본은 받아보지 못했으며, 색에 따라 위작을 구별할 정도로 작품에서 색은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미술관 측에 재제작을 요청했으나, 예산 문제로 재제작이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미술관은 물론 문체부까지 제대로 된 소통이 되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행한 《김구림》展 도록 표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행한 《김구림》展 도록 표지.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이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며 반박했다. 미술관 측은 “어둡게 인쇄된 작품은 전부 작가로부터 받은 사진을 그대로 쓴 것이고, 컬러 교정지에 인쇄된 작품 색상은 물론 배경지 색상 역시 두 차례의 확인을 거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예산 문제도 있지만 몇 차례의 교정 작업과 최종 확인을 거쳐 인쇄하게 된 만큼, 과정상 문제점이 없는데 예외적으로 재제작하는 것이 선례가 될까봐 우려되는 상황”이라며, “오해가 있는 상황인 만큼, 적절한 방식으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입장을 전했다.

우여곡절 끝에 일정 부분 양 측이 합의를 한 상황이지만, 앞으로 완전한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한국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김 작가가 우리 미술계에 끼친 영향과 그가 남긴 막대한 유산을 고려해보면 경직된 ‘원칙’을 고집하기보다는, 미술관 측의 유연한 대응을 통한 적극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해 보이는 시점이다. 

현대미술관이 가져야 할 유연성

미술계에서는 “일반 단행본도 전부 가제본 검수 단계를 거치는데, 펼친 상태의 레이아웃이나 내지에 인쇄된 도판의 색감 등을 확인하기 어려운 교정지로만 검수를 거쳤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또한 일각에서는 “인쇄 후라도 작가가 판단하기에 작품을 왜곡시킬 만큼 큰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재인쇄를 고려할 법도 하다”라며 “원칙만을 고집하는 미술관의 강경한 태도는 작가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라며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미술관 측은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에 가제본으로 최종 검수를 받지 않은 이유에 대해 "페이지 수가 너무 많아서"라는 답변을 해왔다. 미술관 측은 모든 도록에 대해 가제본을 하지 않는 것인지, 이번 '김구림 도록'만 가제본을 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동안 많은 작가들의 도록들 중 '김구림 도록'보다 훨씬 페이지 수가 많고, 판형 또한 큰 도록도 있다. 도록 제작 시에 가제본을 하지 않는다는 미술관의 도록제작 규정이라면, 이는 반드시 시정할 필요가 있다.

김찬동 홍익대학교 초빙교수는 “작가의 요청 사항을 수용하는 일은 미술관으로서는 그리 복잡하거나 큰 문제는 아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을 수정하고 재제작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작가에게 귀책 사유가 있어 재제작이 곤란하다는 입장인 것 같은데, 이는 초대 작가에 대한 예우도 아니며, 매우 무책임한 태도로 보인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사안을 처리하는 과정도 너무 사무적이며 기계적으로 문제를 다루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시 내용이라는 본질적 차원에서 유연하게 처리했어야 했다”라며, “(미술관은) 작가들이 의욕적으로 창작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창의적이며 포용적인 플랫폼을 제공하는 곳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술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 개방성을 가져야 하는 곳이다”라고 미술관이 취해야할 태도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김찬동 교수가 지적했듯, 개방성을 가져야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폐쇄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은 몇 차례에 걸쳐 불거진 김구림 작가와의 갈등과 함께 이미 화두에 오른 적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김 작가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은 비단 이번 도록 관련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이번 전시 개막 당시에도 미술관 측에서 ‘절차’를 이유로 내세워 김구림 작가의 설치 작품은 결국 출품되지 못했던 사건이 있었다. 작가는 이에 대해 “이번 전시에는 아방가르드적(전위적)인 작품은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개막 전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성토한 바 있다. 

당시 미술관 측에서는 “서울관 건물이 근대 문화유산 건물이어서 외벽에 천을 두를 경우 종로구청과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야하며 건물 구조상 가능할지 확인해야하기 때문에 최소한 1~2년 걸리는 사안”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미술관에 전시될 작품이 1~2년 전에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행 시스템의 문제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격으로, ‘현대’미술관으로서 요구되는 행정시스템의 유연성 결여에 대한 지적을 피해갈 수 없었다.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김구림 작가 ⓒ김바울 사진 기자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김구림 작가 ⓒ김바울 사진 기자

김 작가는 당시 “몇 십 년 간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 이때까지 일반 화랑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작품을 발표할 때 아무런 제약을 받은 적이 없는데 국익을 위해 작가를 도와주고 세계적으로 알려야 할 미술관에서 이렇게 제약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며, “명칭을 국립근대미술관으로 바꿔야 한다”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이번 사건 역시 김 작가가 미술관 관계자와 주고받은 대화 중 “미술관은 뭘 해도 좀 느리잖아요”라는 메시지에서 경직된 행정시스템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전시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미술관과 작가의 갈등은 피치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대한 작가의 유산을 좋은 전시를 통해 국민들에게 선보이고 싶은 마음은 같을 터, ‘현대’를 말하는 미술관인 만큼 이제는 작가들과 동행할 수 있는 유연한 시스템과 환경 구축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시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공미술관이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 우리 미술이 받아들여지는 데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기에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일에 무신경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