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노마드여, 노마드여, 그 끝 모를 방랑이여! I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노마드여, 노마드여, 그 끝 모를 방랑이여! I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4.04.1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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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

Ⅰ.
 유명균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자면 뭐랄까, 광막한 대지가 떠오른다. 예컨대 아득하게 넓고 긴 어떤 초원, 아니면 끝 모를 지점을 향해 치닫는 붉은 벼랑과도 같은 느낌이다. 그것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서부터 시작됐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가?  
 유명균의 입체와 평면, 설치작업은 이러한 질문에서 비롯됐다. 그 기원을 찾아가면 우리는 그가 미국의 대륙을 유랑하기 시작한 2010년 무렵의 긴 시간대와 만난다. 다음은 이에 대한 그 자신의 기록이다. 

 “최근 나는 개인적 사정으로 정처 없이 미국의 수많은 지역(남에서 북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그리고 중부지역......)을 떠돌아 다닌다. 이동수단은 언제나, 몇 년 전 단돈 3,500달러로 구입한 나의 애차(수없이 고치고, 또 고치고......그래도 굴러간다. 아마, 나는 이젠 거의 중급 정비사 수준......) 그리고, 언제나 이동 중엔 차에서의 캠핑. 그리고 실감한 것은 미국은 정말 큰 땅덩어리, 가는 곳마다 전혀 다른, 경험하지 못한 자연환경이다. 그리고, 그곳들의 각각의 환경에서 보여지는 지오그래픽, 생명체의 역사......수 없는 종의 출현과 사라짐의 반복, 그리고 진화.,,,,,참으로 감동적인 지구 형성의 역사, 시간이었다.” 

 -유명균, <작업노트> 중에서-       

그러니까 유명균의 작업의 토대는 자연, 그것도 광활한 미국의 대자연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약 7년여 동안 미국대륙을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현지에서 직접 채취한 자연의 산물로 자신의 감정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흙’이다. 그는 흙을 통해 우주의 기원을 상상했으며, 흙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그렇게 여행을 하던 중에 특별한 느낌을 발산하는 조지아주의 한 신비스러운 숲에서 한 줌의 흙을 채집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미국의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흙들을 채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반복적인 수집 과정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물으며 지구라는 행성의 길고 긴 세월을 함께 느끼고 상상합니다. 자연이라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인간과 사회, 문명의 의미를 되새기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유명균, <작업노트> 중에서-  

우리는 여기서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유명균의 입체와 설치작업의 근원적인 모태가 자연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흙’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지아주의 한 ‘신비스러운 숲’에서 흙을 만났는데, 그것에서 어떤 영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유명균에게 있어서 이것이 바로 창작의 계기가 되었다. 알다시피 예술적 창작은 어떤 계기가 찾아오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창작을 위한 모진 진통을 겪게 되는데, 이것이 예술적 창작이 흔히 임산부의 산통(産痛)에 비유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유명균에게 있어서 예술적 산통이란 과연 무엇인가? 태아의 착상에서 분만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에 비유되는 예술작품의 산출은 그에게 있어서 어떤 과정을 거쳐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작가 유명균의 예술적 삶의 도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Ⅱ.

1990년대 초반에 그린 유명균의 그림 중에 인간의 형상을 한 여러 점의 작품을 벽에 부착한 것이 있다. 일종의 설치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인데, 이는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유명균 특유의 물질성이 강조된 추상화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연작은 인체 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말과 같은 동물적 형상을 지니고 있기도 해서 얼핏 보기에 그로테스크한 형태를 띤 것들인데, 일본의 가나가와 현민홀(art center)에서 전시된 이 작품들은 주로 인체의 단편을 소재로 한 것이다.

짐승 같기도 하고 인체 같기도 한 이 일련의 작품들을 사진으로 보면서 얼핏 유명균 특유의 입체나 설치작품들의 원형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벽면에 부착된 거대한 크기의 섬유로 된 설치작품들이나 공룡과도 같은 대형 입체작품들의 초기 형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어떤 미적 단서를 그 안에서 포착하게 된것이다.  

유명균의 이 작품들은 해체된 인체의 이미지를 벽면에 산포(散布) 형식으로 설치됐다. 얼핏 보면 다리 같기도 하고 팔처럼 보이기도 하는 파편화된 이 인체의 단편들은 인체의 해체를 통해 ‘원초적 생명’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즉 하나의 소우주로도 비견되는 인체를 해부함으로써, ‘원초적 생명’의 모태로서의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본능이 그 후에 나타나게 된 일련의 추상적 입체, 설치작업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이다.

Ⅲ.

유명균의 삶은 그 자체가 ‘유랑(nomad)’이다. 이 단어가 갖는 의미를 해독하지 못하면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난망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추상적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안에는 오랜 유랑생활에서 온 자연의 관찰과 그로 인한 통찰로 가득 차 있다. 인생에 대한 통찰, 자연에 대한 통찰, 우주에 대한 통찰이 질긴 섬유질의 마닐라삼을 풀어 난마(亂麻)와도 같은 두꺼운 층을 형성한 유명균 특유의 작품들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을 낳은 직접적인 계기는 2010년대부터 시작한 미국 서부의 유랑생활이었다. 이 글의 서두에서 기술한 것처럼 고물차를 타고 드넓은 미국의 전역을 여행하면서 유명균은 자연과 맞닥뜨렸다. 

유명균은 미국의 서부를 유랑할 때 만난 지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은 매우 아름다웠다.”고 회상한다. 그는 수억 년의 시간을 내장한 그 지층을 바라보면서 온 카와라(On Kawara/河原溫)의 작품을 떠올렸다. 알다시피 온 카와라(1933-2014)는 시간에 대해 성찰하고 매일매일의 날짜를 기록한 개념미술가였다. 그는 1966년 1월 4일부터 사망한 해인 2014년까지 <오늘(Today)> 연작을 제작한 바 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