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한국무용사에서 강선영(姜善泳 1924~2016)은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는 무용가라할 수 있다. 경기도 안성 태생인 강선영은 명고수·명무 한성준에게 입문하여 전통무용가로 일가를 이뤘다. 스승 한성준은 근대 전통무악의 거장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0대 중반에 한성준이 설립한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 입소한 강선영은 약 4여년간 중고제 전통춤을 익히고 공연활동에 참여한다. 1941년 스승 한성준이 별세한 후 결혼과 함께 잠시 공백기를 갖는다.
6.25 전쟁 이후 1953년 을지로에 무용연구소를 열면서 활동을 재개한다. 스승 한성준에게 익힌 전통춤을 전수하는 한편 1963년 국립무용단이 창단되자 비상임 안무자로 활동하며 주옥같은 명작을 남겼다. ‘열두무녀도(1965)’, ‘수로부인(1969)’, ‘원효대사(1977)’, ‘황진이’(1981) 등 한국적 전통을 소재로 한 강선영의 무용극은 국립무용단장을 지낸 송범과는 또 다른 공연미학으로 무용극시대를 화려하게 꽃피웠다.
국위선양을 위한 폭넓은 여정도 주목된다. 1960~70년대 세계 각국에서 개최되는 문화엑스포, 올림픽문화축전, 각종 민속무용축제 등 친선교류 국제행사에 정부 파견 공식단체로 선정되어 한국 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지구촌 곳곳에 널리 알렸다. 150여 개국에서 약 1,000회를 상회하는 공연을 치렀음은 실로 기록적이다.
결정적으로, 2006년 한국 전통무용가로는 최초로 뉴욕 링컨센터 무대에 섰다. 81세의 나이에 직접 태평무와 살풀이춤을 춤춰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속 깊은 멋과 섬뜩한 기운으로 우리 춤의 미적 진수를 선보여 격찬받았다.
강선영의 선 굵은 행보는 기념비적 업적을 낳는 주요 원천이 되었다. 살아 생전 그가 맡았던 다양한 이력이 웅변한다. 강선영의 이력은 두 갈래로 나누어 볼 때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 우선 예술적 측면으로, 내포 출신 중고제 전통예인 한성준에게 배운 태평무로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반열에 올랐다. 또 국립무용단 비상임 안무자 시절 무용극 형식의 작품 창작을 통해 명성을 쌓았다. 이렇듯 강선영의 예술적 업적은 크게 전통의 보존과 계승 그리고 무용극의 극장미학 정립 이상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한편, 무용가 강선영의 사회적 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무용인의 권익도모를 위한 친목단체인 한국무용협회 이사장(1985~1987)을 거쳐 전국 예술인조직으로 영향력 있는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1990~1992)을 지냈다. 나아가 제14대 국회의원(1992~1996)으로 여의도 입성에 성공하면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태평무 인간문화재로서 권위와 명예를 거머쥐었고, 예총 회장 및 국회의원으로 이른바 예술과 정치의 경계를 넘나들며 막강한 권력을 누린 보기 드문 행운아라 할 수 있다.
강선영의 거침없는 행보의 기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타고난 총명함과 자기존재에 대한 당당함, 포용과 배려의 리더십, 그리고 소위 ‘시대 운’도 한 몫 했다고 여겨진다. 이와 관련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주지하듯, 1990년 강선영은 예총 회장에 도전한다. 당시 경쟁자는 해외유학파로 첼리스트이자 서울대 음대학장을 지낸 전봉초 교수였다. 두 사람의 맞대결은 장안의 화제였다.
당시 경쟁자인 전봉초 교수는 자신의 희소적 이력이 지닌 우월성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자연히 정식 제도교육을 받지 못한 강선영의 이력은 초라해지는 국면으로 흘렀다. 이에, 강선영은 입후보자 소견발표회에서 당당하게 대응했다. “내가 춤을 배울 일제강점기에 이화여대가 있었다면 나는 그 대학을 나왔을 것이다. 내 춤이 광대춤, 기생춤이라 해도 좋다. 우리 춤의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왔다고 자부한다”며, 정면 돌파 전략을 택했다. 결과는 예총 회장 압도적 당선이라는 이변을 낳았다.
강선영의 도전적 삶의 여정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1992년 무용계 최초로 국회의원직에 올랐다. 예총회장이라는 직능단체 대표 자격으로 당시 민자당 전국구(현재의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받아 제14대 국회의원이 됐다. 국회의원 시절 한국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공적 헌신 또한 눈여겨볼 대목이다.
예컨대, 문예진흥법 개정을 추진하여 연예부문에 속해있던 무용분야를 독립시켜 무용의 사회적 위상 강화에 힘썼다. 무용콩쿠르에서 입상한 남자무용수에 대한 병역혜택 제도 역시 이때 생겼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시, 발레·현대무용 등 서양무용에 편중된 커리큘럼에 한국춤(전통춤) 신설을 건의하여 성사시킨 것도 중요한 업적으로 회자된다.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도록 제도 보완을 꽤했고, 대한민국예술원상의 상금을 상향조정하는데 앞장섰다. 국회 의정활동 대부분을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제도 및 정책 추진에 할애하여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무엇보다 무용의 사회적 위상 강화를 위한 그의 헌신과 노력은 실로 교훈적이다. 월간 『춤』지 발의로 국립극장에 신무용가 조택원 춤비가 건립되기까지 강선영은 숨은 공로자로 손꼽힌다. 또 자신의 고향인 안성 태평무전수관 앞마당에 세워진 스승 한성준 춤조각상, 그리고 문화지성 조동화 흉상 건립 등 춤 선구자를 기리고 상징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문화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자처하며 정신적 결핍을 채워줬다. 강선영은 차고 넘치게 훌륭했고 ‘여의도 큰 누님’, ‘대해(大海)’, ‘여장부’ 등으로 칭송되었으며, 이로써 무용계 큰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작금에 이르러 돌이켜 보건대, 강선영의 업적들은 시대변화에 따른 풍조와 더불어 퇴색한다는 인상이 짙다. 우선, 무용콩쿠르에서 남자무용수 입상자에 대한 병역혜택은 효용성의 측면에서 수명을 다한 듯 싶다. 안타깝게도 국가무형문화재 태평무는 잘못된 후계로 인해 원형과 고유성이 변질된 채 왜곡 전승될 운명에 놓여있다.
또 50년 지기로 무용계 발전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무용평론가 조동화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태평무전수관 앞마당에 세운 그의 흉상은 사라진 채 행방이 묘연하다. 몇 해 전 조동화 선생 흉상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허탈한 심정을 부여잡고 안성 태평무전수관을 찾았던 기억이 새롭다. 불길한 예감 그대로 역시 흉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중국 후한시대 불에 타 폐허가 된 낙양성의 치욕과 처참함 그리고 검은 침묵이 ‘거기 그곳’을 휘감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2016년 강선영 사후(死後) 한국의 전통춤계는 격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형국에 놓여져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태평무 제1대 보유자 강선영의 별세로 후계 구도에 대한 치열한 쟁투가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세 명의 전수조교(이현자, 이명자, 양성옥) 중 막내격인 신무용 주자의 승리로 끝났다. 파장이 컸다. 태평무는 불공정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의 표상으로 인식되면서 무용계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줬다.
지금도 여전히 무용계 곳곳에 스며든 피멍의 흔적이 선연한 가운데, 올해 강선영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여러 기념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태평무 무형문화재 불공정 보유자 인정의 수혜자 주도로 치러진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당시 무형문화재위원을 지낸 민속학자의 적극적인 조력도 감지된다. 또 반대편에서 가열찬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가 찬성(?)으로 선회한 원로 무용학자의 행사 참여도 화젯거리다.
한편, 2019년 문재인 정부 시절 불공정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과정에서 사령탑 역할을 맡아 지탄의 대상이 됐던 연극계 원로교수는 최근 176쪽 짜리 강선영 평전을 펴냈다. 그는 말한다. “강선영 선생의 이야기는 이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옳은 얘기다. 오감을 열고 귀를 기울려 강선영 선생 그리고 그 후속세대를 둘러싼 진실된 이야기를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탐욕으로 점철된 꾸밈과 미화, 왜곡과 날조를 방어하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