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딱지 24회
[연재] 딱지 24회
  • 김준일 작가
  • 승인 2010.06.23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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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 마을 두 동네(3)

▲삽화 문길시인
결의문

우리 일산지구 학동주민 일동은 금번 신도시 개발계획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토지개발공사 측에 의하면 현 싯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보상한다고 하나 현재 이곳 공시지가는 10년 전에 책정된 그대로이고 부동산시세가 바닥권을 헤매고 있으므로 주민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싯가의 10배 내지 20배 수준에서 보상가가 결정돼야 한다.

2. 특히 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던 전업농가의 경우에는 보상금으로 타지역에 농토를 마련할 수 없는 현실을 감안 농사가능한 국유지를 활용하여 대토조치를 해 줘야 한다.

3. 또한 주민 대다수가 대대로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 온 점을 감안 새로운 선영을 조성하고 이장하는 비용을 정부측에서 부담해야 한다.

4. 아울러 적지 않은 세입자에게도 최소한도 타지역에 나가 정착할 수 있는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5. 이상과 같은 우리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우리 주민 전체는 생존권수호를 위해 목숨을 걸고 결사적으로 개발반대 투쟁에 나설 것이므로 만약 어떠한 불상사가 발생할 시에 그 책임은 전적으로 사업을 시행하는 쪽에 있음을 명백히 해 둔다.

1989년 3월 25일

일산신도시개발 결사반대 투쟁위원회 학동위원장 최 수정

정구가 물었다.
그럴듯한데? 누가 썼어?
이장이 썼는데 당신한테 보여 주라고 해서요.
나한테는 왜?
문장을 좀 다듬어 달라구요. 읽는 사람이 겁을 먹도록 아주 강경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대요.
이 정도면 충분한데 뭘.
그래도 손 좀 봐 줘요. 믿고 부탁한 건데 성의표시는 해야죠.
난 이런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데.
이런 일이라뇨?

미순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게 어디 남의 일이에요? 잘 하면 천이백만 원도 안 갚고 집 한 채가 떨어지게 생겼는데 뭐라구요? 당신이 우리집 하숙생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한번 해 본 소리야.

정구는 얼른 꽁무니를 뺐다.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참 동안이나 씨름을 한 끝에 좀더 자극적인 새 결의문을 다듬어 냈다.

결의문

우리 경기도 일산읍 학동 주민일동은 지난 대선 때 한번만 믿어 달라는 노태우대통령의 간절한 호소에 감동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똘똘 뭉침으로써 제6공화국 탄생에 기여한 바가 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우리 주민들과는 하등의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일산 신도시개발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저버리고 분노를 야기시켰다. 이에 우리 주민일동은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함으로써 우리의 생존권을 수호하고 노태우정권의 비민주적 폭거에 맞서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할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1. 우리는 현 정권의 대선공약인 주택 200만호 건설의 취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우리의 터전을 강제수용하고 우리를 외지로 내쫓겠다는 처사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만부득이하게 이 땅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 주민 모두가 외지에 나가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완벽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현재 토지개발공사에서 제시하고 있는 ?싯가보다 높은 보상? 정도로는 우리의 분노와 절박한 심정을 잠재울 수 없음을 명백히 하는 바이다.

2. 특히 우리 주민 대다수가 농민인 점을 감안 충분한 보상과 함께 외지에 나가서도 농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대토조치를 해 줘야 한다. 그러한 조치 없이 토지를 수용하는 것은 우리 농민들로 하여금 유랑걸식을 하다가 비명횡사하라는 처사와 다를 바 없으므로 결사반대할 수밖에 없다.

3. 또한 주민 대다수가 대대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점을 감안 외지에 나가 새로운 선영을 조성하고 이장하는 비용까지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4. 아울러 원주민이 아닌 세입자에게도 응분의 보상이 이루어져 안 그래도 서러운 그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그늘이 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5. 이상과 같은 우리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우리 주민 전체는 생존권 수호를 위해 결사적인 투쟁에 나설 것이므로 만약 어떠한 불상사라도 발생하게 되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당국에 있음을 명백히 해 두는 바이다.
1989년 3월 25일

 일산신도시개발 결사반대투쟁위원회 학동위원장 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