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일제 잔재 ‘지명’, 정겨운 옛 이름 되찾아야
부끄러운 일제 잔재 ‘지명’, 정겨운 옛 이름 되찾아야
  • 이소영 기자
  • 승인 2009.03.02 10: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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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원서 → 순라·양덕, 종로(鍾路) → 종로(鐘路)

서울 종로구의 ‘원남동·원서동’은 1946년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아직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지명이다.

일본이 식민지시대에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하나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어떤 방법으로라도 땅이름을 퇴색시켜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 창경궁(昌慶宮)이 창경원으로 불리던 당시, 홍화문 모습. 기둥에 창경원(昌慶苑)이라고 쓰인 현판이 보인다.

원남동·원서동의 지명 연유, 그 배경에는 ‘창경궁’이 있다.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자 일본은 1909년 창경궁을 헐어 동물원, 식물원 등 놀이동산을 만들고 ‘창경원’으로 바꿔 궁의 위상을 떨어뜨렸다.

창경원(昌慶苑)의 원(苑)은 울타리를 쳐놓고 짐승을 기르는 임야, 동산을 뜻하는 ‘나라동산 원’이라는 한자로, 궁의 격을 낮춰 우리나라의 자존심을 짓밟으려한 일제의 저의가 숨어있다.

1914년 동 이름까지 바꾸기 시작한 일본은 원래 각각 ‘광화방계’와 ‘양덕방계’ 또는 ‘연지동계’에 속해있던 지역을 창경원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있다고 해 원남동(園南洞), 원서동(園西洞)으로 지명을 격하시켰다.

1986년 8월 창경궁은 옛 이름을 되찾았지만 현재 종로 1·2·3·4가 동에 속해있는 원남동과 가회동에 속해있는 원서동은 그 지명을 계속 사용해오고 있다.

한국우리땅이름학회 배우리 명예회장은 “일본의 역사왜곡에 격분하기 전에 일본이 남긴 잔재를 우리 입에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고 있음을 부끄러워하고 말끔히 털어내기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차근차근 지명을 고쳐나가야 하는 일이 수반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조상들의 무형유산이나 다름없는 사라져간 ‘옛 지명을 되찾는 일’을 적극 추진·장려해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떳떳하게 후세에 물려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계속 방치 돼온 일제 때 지명을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당시인 2002년 6월 서울시 문화관광국 업무보고에서 ‘원남동·원서동’을 거론하며 ‘옛 지명 찾기 사업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다.

이에 서울시는 고증을 위해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등의 자료를 토대로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현재까지의 지명 변천사를 분석하는 등 바뀐 지명현황을 파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003년 3월, 동·자연·가로명 등 72건의 일제식 지명을 변경 검토대상으로 정한 서울시는 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지명의 유래와 변천과정 등에 관한 자료집을 자치구 등에 배포해 지명 변경을 유도했다.

특히 일제 때 지명을 제일 많이 사용하고 있는 종로구에서는 “원남동·원서동을 첫 대상으로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구 문화재 위원회, 서울 옛 지명 되찾기 사업 자료집 등 각계의 자문에 따라 원서동은 양덕동, 원남동은 순라동과 연화동으로 몇 개의 지명을 고려중에 있다”고 밝혔다.

곧 이어 지명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지만 주민공청회 이전에 열린 설문조사에서 과반수 주민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 익숙해진 지명, 주민들 강력반대

2005년 현 나재암 서울시의회 의원이 종로구의회 의장 재직당시 ‘원남동·원서동’의 옛 지명을 되찾기 위한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 1971년 창경궁을 '창경원'이라고 쓰던 당시 안내도
나의원은 “지명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 민족의 얼을 묶는 중요한 무형적 재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리되지 않고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 빨리 바꿔야 한다”고 의견을 개진했다.

원남동 주민 한모씨는 “익숙하지 않다고 지금 편하자고 일본 잔재를 입에 담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빨리 되찾기 위해 우리가 먼저 나서야 할 일”이라며 나의원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계속 사용해 익숙해진 지명에 대다수 주민들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원남동 주민 이모씨는 “일본식 지명은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익숙해진 지명이 바뀌면 생기는 불편함들 때문에 쉽게 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지명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지명을 바꿀 경우 주민들은 번거롭고 불편하며, 또한 행정 동 변경에 따라 주민등록과 호적상의 지명처리 문제 등 그에 따르는 혼란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원남동·원서동의 옛 지명 되찾기’는 주민들의 반대로 난관에 봉착해 실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종로구의회 안재홍 의원은 “사람들의 입에 익숙해져 있는 지명은 처음에는 쓰기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익숙해진다”며 “청운·효자동 등 동 통합할 때도 말 많고 탈 많았다. 반대하는 주민들을 설득해서 반드시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우리땅이름학회 배우리 명예회장은 “서울의 일본식 지명은 전체의 31%를 차지한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가 밀집된 종로는 80여개의 동 가운데 60%인 50동이 일제에 의해 바뀐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종루(鐘樓)가 있던 거리에서 연원된 이름의 종로(鍾路)는 일제가 지명의 한자를 교묘하게 왜곡한 경우로 종로(鐘路)로 표기해야 옳다.
일제가 1943년 6월 구제(區制)를 실시하면서 민족정기를 왜곡· 축소해 말살하고자 ‘쇠북 鐘’ 대신 ‘술잔 鍾’자로 표기한 것을 오늘날까지 관행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나재암 의원은 “현재 번갈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구청공문은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지만 많은 곳에서 ‘술잔 鍾’로 쓰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바로 잡아서 쓰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지명을 딴 글자로 바꿔 견지동(堅志洞)은 중부 8방의 하나인 견평방(堅平坊)의 ‘평(平)’자를 ‘지(志)’자로 바꾸어 견지동(堅志洞)으로 했고, 계생동(桂生洞)은 계동(桂洞)으로 줄여버렸다.

청계천의 흐름을 살핀다고 너더리(板橋)는 관수동(觀水洞)으로, 숭교방의 동쪽이라고 해서 잣골(柏洞)을 동숭동(東崇洞)으로 하는 등 마음대로 의미를 갖다 붙여 바꾸기도 했다.

여러 동이 합쳐진 경우에는 그 가운데 두 개의 동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 원래의 지명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곳도 많다.
예를 들면 경운동(慶雲洞)은 경행방(慶幸坊)과 운현궁(雲峴宮), 관철동(貫鐵洞)은 관자동(貫子洞)과 철물교(鐵物橋 *쇠물전다리), 운니동(雲泥洞)은 운현궁(雲峴宮)과 니동(泥洞 *진골), 인사동(仁寺洞):관인로(寬仁路)와 사동(寺洞 *절골) 등 이외에도 10여개가 더 있다.

특히 합치기 전의 동 이름들은 그 바탕이 정겨운 우리말이었던 것이 적지 않다.
수송동의 송현(松峴)은 ‘솔고개’, 옥인동의 옥동(玉洞)은 ‘옥골’, 운니동의 이동(泥洞)은 ‘진골’, 인사동의 사동(寺洞)은 ‘절골’이 그 원래 이름으로 순 우리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지명이란 단순히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음을 의미한다.

◆ 지명복원, 민족 정체성 살려야

종로뿐만이 아니다. 일제가 제멋대로 바꿔버린 지명들은 광복이후 많이 고치고 되찾았지만 아직도 그 당시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

2002년 서울시와 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지명의 유래와 변천과정 등에 관한 자료집에 따르면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본식 지명은 70여개나 된다.

김현풍 강북구청장은 고려시대부터 사용해온 ‘삼각산(三角山)’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1996년 강북문화원장 재임 때부터 ‘삼각산 이름 회복운동’을 시작했다. 2002년 구청장이 된 후에도 계속적인 관심을 갖고 추진하고 있다.

삼각산(三角山)은 산 이름인데 현재 땅 이름인 북한산(北漢山)으로 더 알려져 있다. 하지만 땅이름 북한산(北漢山)은 일본의 학자가 사용하면서 바뀌게 된 것으로 ‘북(北)’자는 북쪽이라는 뜻 외에도 ‘달아나다, 도망치다, 패하다, 등지다, 분리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삼각산 명칭복원서명운동을 시작으로 김현풍 구청장은 국제포럼, 종합 세미나, 심포지엄, ‘삼각산 제 이름 찾기’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12년째 삼각산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김 구청장은 “산 이름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살리고 나아가 민족의 얼을 한층 높이는 것”이라며 “삼각산(三角山)이 제 이름을 찾는 그 날까지 계속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삼각산은 산림청과 문화재청에서 삼각산으로 지정한 상태로 강북구는 지난 해 11월 열린 ‘삼각산 제 이름 찾기’ 학술세미나에서 서울시 지명위원회에 북한산 개명을 요청할 방침이다.

지명을 바꾸는 행정 절차는 구에서 대상지를 선정해 실태조사를 거친 후 기본계획 수립, 지방의회 의견을 수렴하고 주민공청회 등을 통해 해당동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조정계획을 서울시에 승인 신청을 한다.

 신청을 받은 서울시는 현지조사와 타당성 분석을 통해 행정안전부에 승인을 요청하고 승인이 나면 서울시에서는 준비지침을 구에 시달한다. 구는 조례 제정 후 공포하고 실무 작업단을 구성해 행정적으로 지명을 바꾸는 작업을 시행한다.

지명이 바뀌면 해당 지역 주민들이 우려하던 부분 가운데 하나인 주민등록과 호적상의 지명처리는 시스템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하므로 쉽게 해결 될 수 있는 문제다.

한국우리땅이름학회 배우리 명예회장은 “하나씩 하나씩 시작해 차근차근 일본식 지명을 없애고 우리의 옛 이름을 되찾아 써야 한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땅이름 보존차원에서도 꼭 필요한 일이고 앞으로 더욱 강력히 추진·장려돼야 할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시의회 나재암 의원은 “일제로 인해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의 지명을 바꾸는 일은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며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줄 것을 당부했다.

서울문화투데이 이소영 기자 syl@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