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해풍(海風)이 빚어낸 그리움의 감성, 강석우를 만나다
통영의 해풍(海風)이 빚어낸 그리움의 감성, 강석우를 만나다
  • 이은영 편집국장· 최재영 인턴기자
  • 승인 2011.01.2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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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공직생활에서 불구, 시적인 감수성으로 가득 차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ㆍ최재영 기자] 공직사회하면 가장 먼저 딱딱하고 메마른 바위가 떠오른다. 황량한 모래밭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서 주위에 아무도 오지 않는 외로움의 오지(奧地). 그러나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리고 짭짤한 내음 가득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위는 바다를 그리워하며 바람을 안는다.
24년에 걸친 공직생활 속에서도 여전히 그리움이란 감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소년. 그 순수한 감수성이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추억과 애틋함으로 남아 소년은 어른이 되고 다시 시가 되었다. 대한(大寒)이 가까워온 어느 겨울날 광화문에 있는 정부청사 총리실 정책홍보기획관실에서 그를 만났다.


우선 시집을 낸 것을 축하드린다. 창작시가 많다고 들었는데 언제부터 시를 쓰게 되었나?

고향이 통영에 있는 사량도다. 멸치잡이와 양식업을 해서 먹고 살았는데 멸치잡이는 늘 적자였다. 그런데 내가 행정고시에 합격하기 전에 아버지가 갑자기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참여했다. 이른바 정치 운동인데 자연스럽게 가정을 등한시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가 마음  고생을 많이 했고 결국에는 병까지 얻었다. 원래 아버지를 정말 좋아했었는데 그 때 실망을 많이 했다. 집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힘들어 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느꼈던 아픔들이 아직까지 내 속에 남아 있고 오늘의 시가 됐다.

원래부터 시집을 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몇 년 전부터 시집을 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이 오십이 되면서 인생 자체에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문득 내가 이대로 이 세상을 떠나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농축된 지식을 후손에게 전해줌으로써 시행착오를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과 그때의 감상을 가까이는 내 가족과 친지부터 멀게는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전달하기 위해 시집을 내기로 결심했다.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 혹은 친구가 아닌, 단지 나라고 하는 인간의 존재를 스스로 각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시는 주로 어떤 때 쓰나?

친구들과 산에 갔을 때 쓴 것도 있고 여행 도중에 쓴 시도 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시드니에 있을 때 남태평양에서 해가 뜨는 걸 보고 집으로 달려가서 시를 썼던 일이다. 당시 남태평양은 희망의 아이콘이나 다름없었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대부분은 특별한 장소나 시간을 정해놓고 쓴다기보다 시심이 솟아나면 억제하기가 힘들다. 심지어는 직원들과 회의 도중에 쓴 적도 있다(웃음). 문학이라는 거창한 단어에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고 고민하고, 그 고민 끝에 나오는 정제물이 나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문학 공부를 따로 했다거나 사사받은 적이 있는가?

개인적으로 문학 공부를 한 적은 없다. 물론 선생님을 두고 시 공부를 한 것도 아니다. 다만 김성우 시인이 소개해줘서 <시와 문학>이라는 문인동호회에 가보려고 한 적은 있다. 시간이 안돼서 결국 가지는 못했지만 많이 아쉬웠다.

▲ 시집 <해풍, 일어나다> 강석우 著
시인은 넘쳐나지만 시는 안 팔리는 시대다. 시집을 낸 사람으로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
 

처음부터 판매를 노리고 쓴 시도 아니고 시집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나의 가족부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삶을 공유하고, 내 존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시가 잘 팔리지 않는 건 안타깝지만 일단 내 시집의 판매부수에는 관심 없다.

시를 쓰는 만큼 시도 많이 읽었을 것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시가 있다면?

현대시보다 고전시를 좋아하는 편이다. 김종서의 호기로운 시가 특히 마음에 든다. 호기가(豪氣歌)라고 할까. 워즈워스 같은 낭만파 시인도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시는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라는 시다. 한국시 중에서는 이해인 수녀님의 ‘석류꽃’을 좋아한다. 내 생각이지만 수녀가 되시기 전에 아마 목숨보다 귀한 사랑을 해본 적이 있으실 것 같다. 어쩌면 그 사랑을 못 이겨서 수녀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체험 없이 이렇게 진한 농도의 언어가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로미오와 줄리엣이 20대였다면 비극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10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제쳐두고 자신의 순수한 감정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런 감정이 이해인 수녀님의 시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문인들과의 교류도 잦을 법한데. 친하게 지내는 문인이나 예술계 종사자가 있나?

사람은 많이 만나지만 특별히 친하다고 할 만한 문인은 없다. 다만 이어령 선생님과는 깊은 교분을 맺고 있다. 날 처음 봤을 때 많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셨다. 다른 선생님들께는 죄송스럽지만 만약 인생에 선생님 한 분을 꼽으라면 그 분이다. 아무 말씀도 안 하셔도 뭔가 내게 전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추천사 써주신 것에 대해서도 분에 넘치는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다. 그 밖에도 통영의 전영근 화백과는 친구 사이다. 이번에 시집에 삽화를 그려준 사람도 전영근 화백이다. 이한우 화백도 삽화를 도와줬다. 두 분께 많이 감사드린다.

공직생활을 오래했다. 시 창작에 어떤 도움이 될을지 궁금하다.

공직생활을 포함해서 그 이전부터 혼자 해외생활을 오래했다. 94년 미국 유학을 갔을 때도, 행정고시합격 후 99년 시드니 총영사관에 발령을 받았을 때도 혼자였다. 2006년 뉴욕 총영사관에 발령이 났을 때는 아내와 함께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졸업 후 통영중학교로 진학할 때부터 내 인생은 홀로 떠나는 여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소중한 경험과 보람찬 시간을 가졌지만 고향이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홀로 외로워하며 견뎌냈던 모든 시간이 결국 내 시를 만든 원천이 되지 않았나 싶다.

행정고시로 공직생활을 열었다. 지금도 행정고시는 치열한 관문이자 혼자만의 싸움이라고 보기 어려운데, 준비부터 합격까지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나.

대학교 3학년 때 행정고시를 쳤다. 합격했으면 최연소인데 2차에서 떨어졌다. 원래 책상에 잘 앉아 있지 못하는 성격인데 그때 2차 시험을 준비하는 8개월 동안은 정말 공부에 미쳐있었다. 오죽하면 친구들이 겁이 나서 못 올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만큼 몰입했던 탓인지 떨어지고 나서는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 후로 다시 나를 수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불안한 마음이 들어 책상에 ‘후방은 안정되어 있다’고 써 붙이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불안보다 집과 가정에 대한 불안이 더 컸다. 아마 타지에 홀로 나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아버지는 아직도 그 의미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생긴 갈등과 방황에 대해 어쩌면 일부러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와의 거리가 생긴 것도 그 때쯤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해도 엄연히 다른 사람인데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 않겠나. 다만 내 아이들에게는 내가 느꼈던 그 불안의 유산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정권이 여러 번 바뀌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주요 공직을 맡았다. 공직자로서 검증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텐데, 공직자로서 지니고 있는 가치관이 있다면?

나라고 하는 존재는 사회 속에 있고 사회는 국가 속에 있다. 셋 다 별개라고 하기 어렵다. 사물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몸이 존재하는 이상 누군가에게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 피해를 줄이고 반대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해야 한다. 특히나 공직자는 곧 작은 일 하나도 국민과 나라를 위한 업무인 만큼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입히는 피해에 대해 늘 생각하고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보상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개인적으로나 공직적으로나 참 많은 일을 겪었다. 파란만장하다면 파란만장하다고도 할 수 있는 개인의 역사인데 시 대신 자서전을 써볼 생각은 없었나.

자서전 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실 YS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많은 대통령들을 측근에서 모셨다. 원하지 않았어도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건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모든 이야기를 하기에는 때가 이르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엔 아직 현직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는 어깨에 진 짐을 내려놓지 말라고 했지만 짐을 졌다면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짊어진 것들을 마음 편히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써볼 생각이다. 이번에 낸 시집은 물론 내 인생을 여과한 정수나 다름없지만 단지 개인적인 감정과 배웠던 교훈을 전달하는데 치중했다.

스스로 이순신 교도라고 할 정도로 이순신에 심취해 있는데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다면?

고등학교를 다닐 때 국사 선생님이 사량진 왜변을 가르치면서 뜬금없이 날 지목하더니 ‘석우는 이순신의 후예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이미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나이라서 스스로를 많이 조절하는 편이지만 그때는 혈기에 넘쳤다. 특히 나는 또래 중에서도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잘 참지 못하는 편이었다. 국사 선생님이 그런 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이순신이라는 영웅에 심취하게 됐다. 오죽하면 대학교 때 교수님이 종교를 물었을 때 ‘이순신교’라고 할 정도였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순신은 가장 존경하는 영웅이자 나를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다. 그래서인지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

2008년에 알래스카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때 연어를 봤는데 연어는 자기 주변에 지형지물을 익히고 대해로 나간다. 그리고 4년간 여행을 하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걸 보면서 문득 내가 고향을 떠나서 유영한 시간이 이제 돌아갈 시간만큼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직생활을 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고, 지금도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고향을 위한 일에 노력하려고 한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그는 업무로 인해 잠시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1시간 정도의 인터뷰 시간조차 그에게는 사치인 것처럼 보였다. 퇴근 시간은 이미 훌쩍 넘긴 다음이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그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으로 기자를 배려했다. 그날 우리가 만난 사람은 국무총리실 정책홍보기획관이 아닌 시인 강석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