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디 가시나, 새로 가는 막걸리 집은 잔이 더 크다 아이가!”
“문디 가시나, 새로 가는 막걸리 집은 잔이 더 크다 아이가!”
  • 이소리 / 시인
  • 승인 2011.02.1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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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막걸리를 사랑한 천상병 시인의 막걸리 사랑

 

대한민국 막걸리가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술맛을 사로잡고 있다. 몇 년전부터 급격히 불기 시작한 막걸리 바람은 급기야 청와대를 찾아오는 국빈들 건배주로 쓰이는가 하면 일본, 중국, 미국 등 외국관광객들에게 날로 인기는 상종가를 친다. 우리나라 백화점 매장은 물론 특급호텔까지 들락거리고 있다. 그렇다면 술을 그렇게 즐겨 마신다는 시인들은 막걸리를 어떻게 바라볼까.‘귀천’을 쓴 시인 천상병이 살아 생전 매일 한두 병씩 마신 막걸리 사랑을 살펴보자. -편집자주-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 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천상병, ‘막걸리’ 모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귀천’몇 토막)라는 뛰어난 시를 남긴 천상병(1930년~1993년) 시인! 그가 가장 좋아했던 술은 막걸리였다. 그는 경기도 의정부에 살 때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단골 막걸리 집을 찾아가 혼자 앉아 막걸리 한두 잔 마시는 것을 사는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때 천상병 시인이 매일 가는 막걸리 집을 꾸리는 주모는 할머니였다. 그런 어느 날 하루, 천상병 시인이 갑자기 단골 막걸리 집을 싹 바꿔 버렸다. 천상병 시인 부인인 목순옥 여사가 천상병 시인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새로 가는 술집주인이 예쁜 젊은 여자인가 보죠?”
천상병 시인은 어이가 없는지 입을 삐쭘이 내밀며 목순옥 여사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문디 가시나~ 새로 가는 막걸리 집은 주모가 젊고 예쁜 기 아이라 술잔이 훨씬 더 크다 아이가.”
천상병 시인에 얽힌 이야기는 이뿐이 아니다. 천상병 시인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귀천’을 찾는 문인들에게 늘 1천 원씩 막걸리 세금을 받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앞 마산에서 살며 환경시를 쓰고 있는 이선관(1942~2005) 시인이 서울에 올라왔을 때도 어김없이 막걸리 값 1천 원을 받았다.
“선관이 왔나?”
“예, 선생님! 건강하게 잘 계시지예?”
“니 내한테 줄 끼 없나?”
“막걸리 값예? 여기 있습니더.”

한살 때 백일해 약을 잘못 먹어 뇌성마비에 걸린 이선관 시인은 그때 마산에서 두 아들을 홀로 키우며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오죽했으면 마산에 살고 있는 문인들이 그를 만날 때마다 한 끼 식사도 대접하고, 용돈까지 손에 쥐어주었겠는가. 천상병 시인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막걸리를 워낙 좋아하는 천상병 시인에게 이선관 시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천상병 시인은 왜 그렇게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야 했을까. 천상병 시인에게 있어서 가난은‘하늘이 내린 축복’(?)이 아니라‘군사정권이 내린 엄청난 형벌’이었다.      
천상병 시인은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태어나 1949년 마산중학교 5학년 때 ‘죽순’(竹筍) 11집에 시 ‘공상’ 등 1편을 발표했다. 그는 그때부터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55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니다 중퇴한다. 1967년에는 이른 바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동백림사건’에 엮여 전기고문을 당한 뒤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다.


살가운 벗 강빈구에게 막걸리 값으로 하루에 5백 원, 1천 원씩 받아썼던 돈이 갑자기 공작금으로 바뀌고 만 것이었다. 천 시인은 그때 겪은 참혹한 아픔을 시에 이렇게 담는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 (고문)당한 그날은... // 이젠 몇 년이었는가 /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 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 / 진실과 고통 /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1967년, 중앙정보부는‘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이라는 이른 바 ‘동백림사건’을 만들어 박정희 군사정권을 비꼬거나 맞서는 문학예술인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여 더 이상 창작활동을 하지 못하게 고문을 심하게 해 반신불수로 만들기 일쑤였다.
이 사건에 그렇게 순진했던 천상병 시인도 걸려든 것이었다. 천 시인은 이때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살가운 벗이었던 강빈구와 자주 어울렸다. 강진구는 천 시인에게 만날 때마다 독일유학을 할 때 동독에도 갔었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천 시인은 강진구에게도 다른 문인들에게 늘 그랬던 것처럼 막걸리 값으로 5백 원에서 1천 원씩 받았다. 이 돈을 중앙정보부가 공작금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다.
그때 중앙정보부 자료에는 ‘강빈구 씨는 간첩활동을 하고 있어 상 피의자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 한 뒤 수십여 차례에 걸쳐 1백 원 내지 6천5백 원씩 도합 5만여 원을 갈취착복하면서도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라고 적혀있다. 이는 우리 현대사에 있어 군사독재정권이 낳은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사건으로 고문을 심하게 당한 뒤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다 나온 천상병 시인은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막걸리와 밥을 얻어먹으며 잠을 자다가 1970년 겨울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1971년 봄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몇몇 문인들은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천상병 시인을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천 시인은 그때 주민등록증도 없었다. 까닭에 문인들은 천 시인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있는데, 마침내 ‘천상병이 죽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시집 한 권도 없이 세상을 뜨다니......’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때 민영 시인 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을 기리는 유고시집을 묶기 위해 여러 잡지에 흩어져 있는 천 시인 작품 60여 편을 모아 천상병 유고시집‘새’를 펴낸다. 이 시집은 나오자마자 언론뿐만 아니라 문학예술계에서도 큰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천상병 시인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천 시인을 누군가 노숙자 아니면 행려병자로 여겨 ‘서울시립정신병원’에 보내버렸던 것이다. 그 때문에 천 시인은 살아 있으면서 ‘유고시집’을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 내 영혼의 빈터에 /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 내가 죽는 날 / 그 다음날. // 산다는 것과 / 아름다운 것과 /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 한창인 때에 /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 한 마리 새. // 살아서 / 좋은 일도 있었다고 / 나쁜 일도 있었다고 /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모두)
천상병 시인은 1972년 친구 여동생 문순옥 여사와 결혼한 뒤 여러 가지 막걸리 일화를 남기며 사리처럼 반짝이는 시를 썼다. 그는 하지만 1993년 함께 늙어가던 장모와 뒤늦은 아침식사를 두어 술 떠다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이 세상을 훌쩍 떠났다.


‘인세를 모아 장모님 장례비까지 마련해 놓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던 천상병 시인. 그가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그날은 그가 좋아했던 막걸리처럼 뿌연 안개 속에 찬비가 내렸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마치 이승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우스개 이야기를 또 하나 남긴다.
작가 신봉승이 쓴 에세이집 《청사초롱 불을 밝혀》에 따르면 그가 이 세상을 갓 떠났을 때 그가 그토록 존경하고 따랐던 장모가 장례 때 받은 조의금 840여만 원을 어디에 둘지 몰라 고민을 하다가 ‘옳커니’ 하고 무릎을 탁 치며 부엌에 있는 연탄아궁이에 숨긴다. 그곳에 숨겨두면 아무도 훔쳐갈 수 없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 다음날, 천 시인 장모는 그 돈이 잘 있나 확인하기 위해 부엌으로 가서 연탄아궁이를 뒤적인다. 근데, 분명히 있어야 할 돈이 다 타버리고 곳곳에 불에 탄 돈 쪼가리 흔적만 남아 있는 게 아닌가. 기가 막힌 천 시인 장모는 한동안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마침내 딸 목순옥 여사에게 물었다.
“네가 어젯밤 연탄아궁이에 불을 뗐냐?”
“돌아가신 남편이 추울 것 같아서 뗐는데요. 근데, 왜 그러세요?”
“이런 낭패를 봤나. 대체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조의금이 너무 많아 혹시 누군가 훔쳐갈까 걱정되어 그 연탄아궁이에 숨겨두었는데...... 이를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어머나!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돌아가신 남편 생각에 그만......”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천 시인 장모와 목순옥 여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타다 남은 돈 쪼가리와 재를 긁어모아 한국은행으로 간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그 마음으로. 아니나 다를까. 한국은행에서는 실수로 조의금이 불에 탄 사실을 인정해 400여만 원을 되돌려준다. 마치 죽은 천상병 시인이 그 돈으로‘내 무덤에 매일 막걸리 한 병씩 부어라’는 듯이 말이다.   

             
막걸리를 부인 목순옥 여사보다 더 사랑했던 ‘막걸리 시인’천상병! 그와 막걸리에 얽힌 이야기는 숱하게 많다. 막걸리에 취해 친구 신혼 단칸방에서 자다 오줌을 싼 일, 여성 소설가 집에 빌붙어 살다가 한밤중에 부부가 자는 방에 몰래 들어가 향수병을 막걸리로 알고 향수를 단숨에 마신 일, 막걸리 값을 구하기 위해 김관식 시인 집에서 값 나갈만한 책들을 몽땅 훔쳐 헌책방에 팔아넘긴 일 등등......
‘막걸리 시인’천상병! 시인은 왜 그토록 막걸리를 좋아했을까. 이 시를 읽어보면 시인이 왜 살아생전 막걸리를 애인처럼 꼭 끼고 살았는지 잘 알 수 있다.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쌀로 만드는 막걸리는
영양분이 많다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마시니 취한다는 걸 모른다
그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은 것이다

-천상병 ‘막걸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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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리(본명 이종찬) 시인은 1959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1980년 <씨알의 소리>에 "개마고원" 13월의 바다"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노동의 불꽃으로> <홀로 빛나는 눈동자> <어머니, 누가 저 흔들리는 강물을 잠재울 수 있습니까> <바람과깃발>이 있으며, 장편소설 <미륵딸>, 간추린 막걸리 백과사전 <막걸리>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