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청소부
은총의 청소부
  • 오길순 / 수필가
  • 승인 2011.03.10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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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진단 결과를 들려주던 심장내과 의사가 놀란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예상 외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고혈압과 부정맥으로 합병증을 의심하던 차에 고지혈 처방약을 중지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은 낭보였다. 6개월 전부터 복용한 약 효능이라기보다 특별한 식이요법의 효과일 것이라 분석하니 의외였다. 혼탁해진 내 혈관을 무엇이 청소한 걸까.   

꽃 지는 5월 즈음부터 단감나무와의 조우가 많아졌다. 풍성한 감나무그늘 아래 앉으면 저 홀로 풀무질하던 번뇌가 삭혀지곤 했다. 부잣집 맏며느리처럼 덕성스런 나무가 고민을 다 받아준 것이리라. 때로는 땡감이 맥없이 툭 떨어지며 ‘생명의 추락은 정해진 때가 없다’는 무원칙의 원칙을 일러줄 때면 무심한 나무 그늘이 무한한 신비로 다가왔다. 

남편은 아침마다 여남은 개의 단감을 식탁에 놓았다. 감을 좋아하는 내게 잠자리채로 따다 주는 10월의 아침 선물은 풍요로웠다. 지닐 만큼만 지녔다가 결실한 수액은 참으로 상큼했다. 잘 익은 첫 수확 몇 십 개를 이웃과 나누고는 한 달 내내 상용한 것이 의외의 진단을 가져 온 게 아닐까. 밤새 대지의 정기를 흡입한 청과는 단식 후의 정화수처럼 시원했다.  비어있던 장기를 다스려 육류로 탁해진 피를 맑게 걸러내는 것 같았다. 그러고도 가락시장에서 사 나른 감 궤가 의외의 낭보를 가져 온 것은 아닐까.

궁금한 김에 감에 대해 알아보았다. 감은 숙취, 고혈압, 심장병, 야맹증, 안구건조증, 암의 예방은 물론 폐나 기관지염 감기에도 효능이 있다. 해로운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을 식이섬유가 흡착해 배설한 것이다. 100g당 400IU나 되는 비타민 A는 인체의 면역을 높이고 혈관을 강화해 혈관 장애를 개선한다. 그야말로 혈관의 청소부인 것이다. 사과나 딸기의 5배나 되는 비타민 C는 불, 물, 공기에도 녹지 않는다. 여린 감잎차는 피부미용과 아토피에도 좋다. 참으로 버릴 게 없는 감나무이다. 

감을 이용한 조상들의 민방요법은 슬기로웠다. 지사제, 해갈제로도 사용하며 장위와 비위를 다스려 소화를 도왔다.  갱년기에는 죽으로, 식도염은 삶은 물로, 치질에는 태워 바르는 곶감은 간식으로도 훌륭하다. 다만 빈혈과 변비에는 조심할 일이란다. 주성분인 탄닌이 철분 흡수를 방해하고 장의 조직 점막을 수축시키는 때문이다. 잘 익은 홍시 서 너 개와 북어 세 마리를 삶아 복용해 보라. 손 저림 증상이 완화될 것이다. 몇 개의 감꼭지를 다려 마시면 혈압이 내린다. 독소를 제거하는 감식초는 다이어트에도 좋다. 화상이나 벌에 쏘였을 때는 땡감을 짓찧어 바른다. <<건강 요람>>의 저자 양복규는 ‘감즙은 중풍의 명약’이라고 말한다. 떫은 풋감을 짓찧어 10분의1의 물을 붓고 5,6일 후 거른 다음 5,6개월 숙성시킨 감즙이다. 
그러고 보니 30여 년 전, 한의원에서 처방한 마른 감잎 한 주머니가 유산의 불안을 치유해 준 경험이 있다. 가마솥 한 가득 우러난 감잎차를 다 복용한 며칠 후 슬며시 하복통이 나은 것이다. 지혈작용을 하는 감잎의 신비한 효능이 생명을 살려낸 것이리라.   

함박눈을 이고 있는 단감나무 한그루가 은총의 나무만 같다. 스스로 잎을 떨궈 뿌리를 덮고 거름하는 철저한 자기관리는 한 겨울 운동에 태만했던 나를 돌아보게 한다.
혹한으로 병충해를 막는 절제와 과분한 결실을 낙과로 다스리는 지혜는 식이요법을 게을리 하지 말라 이르는 것 같다. 몸과 마음을 씻어준 단감나무가 어머니의 베풂처럼 무량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