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샘솟는‘우물의 전설’
이야기가 샘솟는‘우물의 전설’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11.04.2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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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생활유산들의 가치 재발견

전남 나주시 완사천이란 우물가에는 말 탄 장수와 장수에게 바가지 물을 바치는 수줍은 처녀의 모습이 동상으로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오씨 처녀에 얽힌 이야기를 배경으로 세운 동상이다. 지역주민들에겐 그 땅의 역사를 전하고, 오가는 행인들에겐 흥미를 유발키에 충분한 이 조형물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갖고 있다. 

서기 914년 태조 왕건(王建, 877~943)이 궁예(弓裔, 857~918)의 부장으로서 견훤과 싸우기 위해 나주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목이 말라 우물가로 갔는데, 한 처녀가 물을 긷고 있었다.
“낭자, 물 한 모금 부탁하오.”
“...................”
말없이 조용하던 낭자는 가만히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우물가 버드나무 잎을 한 웅큼 띄워서 건네는 것이었다.
왕건이 연유를 물었다.
“몹시 갈증이 심하신 것 같아 너무 급히 마시느라 체하실까 봐서 불어가며 천천히 드시라는 뜻입니다.”
 처녀의 지혜에 감탄한 왕건은 그 후 다시 처녀를 찾았고, 부인으로 맞이했다. 바로 왕건의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이며, 후일 고려 2대 왕이 된 혜종의 어머니가 되는 분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에게도 이와 똑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임금이 되기 전 이성계가 군사작전 중 목이 말라 우물가를 찾았다. 아리따운 처녀가 물을 긷고 있었는데, 한 모금 청한 즉 버들잎이 띄워진 바가지 물을 대접받았다. 역시 너무 급히 마시지 말라는 뜻이 담긴 버들잎 이었다. 그녀의 지혜에 감복한 이성계가 청혼을 해 아내로 맞으니 바로 둘 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였다.
우물가엔 이렇게 이야기가 많다. 왕과 왕후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도 그곳엔 원래 처녀들이 물을 긷고, 아낙들이 빨래하는 곳이었으니 말도 많고 탈도 많았을 법 하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라는 노래가사도 있듯, 우리네 마을마다 중심엔 공동 우물 하나가 있었고, 정보와 소통의 장인 그곳에서 처녀의 로맨스 하나 쯤 피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기자의 친 할아버지 토골 할배께서도 사실은 우물가에서 할머니를 처음 봤다고 한다.
그 옛날 중매쟁이가 신부감 처녀를 몹시 궁금해 하는 총각을 데리고, 그 동네 우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올라가 기다렸다. 저녁때가 되자 처녀들이 물을 길러 나오는데 멀찍이서나마 신부감 처녀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긴 머리를 허리까지 드리운 처녀의 뒷모습에 반해 총각은 3년씩이나 매파를 놓아 기다린 끝에 혼인에 이르렀다는 것.

서울 종로구 북촌 가회동엔 석정골 보름우물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다. 보름동안은 물이 맑고, 보름동안은 물이 흐렸기 때문에‘보름우물’이라 했다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신부 중국인 주문모가 조선에 잠입, 이 동네 신도 집에 숨어 선교할 때 이 우물물을 떠다 세례를 내렸다고 한다. 물맛이 좋아 인근 궁궐 궁녀들도 이 물을 몰래 먹으며 아이 낳길 기원했다는 우물이다.

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성 서장대(西將臺) 아래 쪽 국청사내에 있는 작은 우물물은 광주이씨 중흥조인 이원령이 아버지 몸에 난 종기를 고치는데 효험을 봤다하여 유명해 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성균관 문묘제례에 사용한 우물을 따로 정해 ‘성정’(성스러운 우물)이라 했는데, 성정을 옮겨 파는 일에 왕과 유생들이 논쟁했다(연산 9년, 1503. 11.9~11)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네 우물엔 이렇게 각양각색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샘솟듯 산재한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우물들의 스토리텔링만 잘 모아도 우리 민속과 전통생활의 상당부분을 음미하며 잊혀진 문화를 전승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 웅진코웨이가 함께 모여 서울 옛 궁궐 내에 묵혀진 궁중 우물을 찾아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 한다. 일제 강점기와 전란, 산업화 속에 잊혀져 간 또 하나의 중요한‘궁중 문화’를 찾아 가치를 재해석하고,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우물쯤이야 묻고 덮어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이제 우리들의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이 작은 우물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수준까지 섬세하고 깊어졌나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뉴스에 보니 20년 동안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섬을 찾아다니며, 그곳의 풍광과 민속, 전통문화, 주민생활을 조사하며 기록해 온 이가 소개 되었다. 그곳 사람들이 손으로 직접 한 장 한 장 쌓은 섬 지방 특유의 아름다운 돌담과 골목길, 밭둑들의 모습이 그의 손에 의해 조사되고, 기록되고 있었다. 기자도 고향에 갈 때마다 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것이, 오래 전 그곳 사람들이 직접 손으로 쌓아 만든 돌담들과 골목길, 밭두렁 논두렁길, 꼬부랑 오솔길과 시냇가를 따라 만들어진 돌 축 길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궁궐이나 궁궐담장, 유명 위인들의 유적지나 사찰들만이 문화유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옛날 민중들이 먹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개간하며 일구어 온 흔적들이 소중한 우리 유산이라는 것이다. 사연이 있는 작은 우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되살리겠다는 움직임을 보며, 새삼 우리 생활속에 밀착해 온 우리들의 소중한‘생활유산’에 대한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