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컬럼]전통예술 주력하며 서양 예술도 아우르는 일본 국립극장
[컬쳐컬럼]전통예술 주력하며 서양 예술도 아우르는 일본 국립극장
  • 임연철 / 국립극장장
  • 승인 2011.05.04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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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전설 설화로 가부키·분라쿠 레퍼토리 넓혀

일본국제교류기금(JapanFoundation) 의 초청으로 9박 10일간의 일본 공연예술시설 방문을 마감하는 수순으로 2월 5일에는 일본 전통인형극 분라쿠(文樂), 6일에는 전통 연극 가부키(歌舞伎)를 각각 보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전에는 일본 전통공연에 대한 거부감과 정책적 금지로 국내 공연은 언감생심, 말도 못 꺼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올림픽을 계기로 가부키가 서울 국립극장에서 공연되면서 일본 전통공연도 필요하면 이뤄지는 분위기가 되었다.

▲국립극장 ‘르 테아트르’의 로비에서의 저자

분라쿠 공연은 일본 국립극장에서, 가부키 공연은 긴자(銀座)에 있는 르 테아트르라는 현대식 극장에서 보았다. 일본의 국립극장은 서울의 국립극장과 마찬가지로 국가예산이 지원되는 점은 같지만 일본 국립극장은 독특하게도 독립행정법인인 일본예술문화진흥회에 소속되어 있다. 독립행정법인이란 우리나라의 재단법인이나 사단법인처럼 법인(法人)이지만 행정기관의 기능을 갖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일본은 국립대학도 행정법인으로 운영된다.

일본예술문화진흥회는 예술문화진흥기금을 운영한다는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위원회(옛 문예진흥원)와 비슷하지만 6개의 국립극장이 소속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전혀 다르다.
일본예술문화진흥회에 소속되어 있는 국립극장은 필자가 분라쿠 공연을 관람한‘국립극장(國立劇場,도쿄)’을 포함하여‘신 국립극장(薪 國立劇場,도쿄)’과‘국립노악당(國立能樂堂,도쿄)’,‘국립연예장(國立演藝場,오사카)’,‘국립문악극장(國立文樂劇場,오사카)’이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오키나와에도 국립극장이 있다는 것인데 오키나와 민속예술이 워낙 독특한 탓에 별도로‘오키나와 국립극장(おきなわ 國立劇場)’을 두게 됐다는 설명이다.‘국립연예장’이 오사카에 있는 것은 분라쿠가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쿄의‘국립극장’이 가부키나 분라쿠 같은 일본 전통공연을 하는데 비해‘신 국립극장’은 오페라·발레·연극 공연을 위주로 하고 있어 마치 서울에 있는‘예술의 전당’을 연상시키는 구조다.


일본예술문화진흥회 사키다니 이사에 따르면 모든 국립극장은 진흥회에서 직접 운영하고 인사에도 관여하는 체제이지만 신 국립극장은 비(非)일본 전통예술을 주로 공연하기 때문에 별도의 이사회 체제로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모든 결산내용은 진흥회에 보고해야 하는 점은 다른 국립극장과 마찬가지라고 한다.사키다니 이사가 밝힌 5개의 국립극장의 2010년도 총 예산은 201억 5000만엔(2651억 7400만원)규모로 기금에 의한 수입이 60억 5000만엔, 신 국립극장 수입이 48억 2000만엔, 국립극장 수입이 92억 8000만엔 이라고 한다.

국립극장 수입은 4개 국립극장의 수입을 합친 것이어서 서울의 국립극장 1곳(약 300억원)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상당한 규모인 것을 알 수 있다.
 국립극장에서 본 분라쿠는 <아시야도우만오오우치가미(芦屋道満大内鑑)>이다. 이 분라쿠는 아베노 세이메이 (安部晴明 ·주술사)는 일반인들보다 우월한 능력의 소유자로 이즈미국(和泉国)의 시노다(信田) 숲의 백호의 자식이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전설을 바탕으로 쓰인 5막 구성의 시대극이다.

주요 줄거리는“노다숲의 아베노 야스나(安部保名)에게 목숨을 구제받은 백호는 쿠즈노하(葛の葉)공주로 변장을 하고 야수나(保名)하고 부부가 되어 아베노 도우지(安部童子)라는 자식을 낳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시노다 쇼우지(信田庄司)부부가 진짜 쿠즈노하 공주를 데리고 나타났기 때문에 쿠즈노하로 변장한 백호는 남편과 아들(후의 아베노 세이메이)과 이별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의 전설을 토대로 하는 단순한 줄거리인데도 등장하는 인형과 인형을 다루는 배우들의 연기가 섬세해서 관객을 사로잡는 능력이 대단해 보였다.

▲도쿄 긴자에 있는 국립극장 공연장‘르 테아트르’에서 관람한 가부키 <여살유지옥(女殺油地獄)>의 포스터. *공연 중 사진촬영 금지로 포스터만 촬영.

 일본 방문 마지막 날 저녁에 본 가부키는 <여살유지옥(女殺油地獄)>이라는 엽기적 살인행위를 다룬 공연으로 18세기에 쓰여진 스토리를 중심으로 가부키로 만든 것이었다. 모든 분장이나 무대가 전통 가부키 방식 그대로였는데 주인공 남자가 주인공 여자를 살해하는 장면이 너무 끔찍해 여성 관객 일부는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야기의 주요 줄거리는 부잣집 아들이 사고를 자주 치고 부모말도 잘 안 듣자 집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부모는 떠도는 아들이 불쌍해 옆집 기름장사 아주머니를 통해 계속 용돈을 대준다.
그럼에도 아들이 정신을 못 차리자 용돈 제공을 끊는데 이를 기름집 아주머니가 안주는 것으로 오해한 아들이 그녀를 살해한다는 줄거리다. 살해 과정에서 대형 기름통이 넘어지고 미끄러운 바닥 위에서 쫓고 쫓기는 활극이 잔인하게 펼쳐진다.

다양한 가부키 내용을 모르는 필자에게는 아직도 잔인한 장면만이 기억에 남아 있고 “가부키가 러브스토리만은 아니구나”라는 인상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의 일본 방문은 일본 북서부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지진과 쓰나미, 원전사고가 일어나기 한 달 전쯤 이었다. 평화로운 가운데 10일간의 일정이 순조롭게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초청기관인 일본국제교류기금의 배려와 통역인 우시오 여사의 도움이 컸다.

최근 일어난 강진의 여파로 일본의 예술계도 상당부분 지장을 받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 우리 국립극장에서는 이번 연재에 소개했던 와라비극단과 시즈오카의 SPAC 극단을 초청해 보려 했으나 여건이 맞지 않아 극단 가제노꼬규슈의 <놀이는 즐겁다>만 초청이 가능했다(5월 10일 오후 2시·4시 30분, 11일 오후 4시 30분/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일본 예술계가 하루 속히 지진의 여파에서 벗어나 과거보다 더 활발한 한일 문화교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