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불청객, 나인가? 이 세상인가?
[책소개]불청객, 나인가? 이 세상인가?
  • 이소리 / 시인, 본지 논설위원
  • 승인 2011.05.2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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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자흔 첫 시집 <고장 난 꿈> 펴내
태아가 처마 끝에 매달려 있었다 / 거꾸로 매달려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 아가야 왜 거기에 매달려 있는 거니 / 태아는 대답 없이 실눈만 깜빡거렸다 / 나는 양수가 부족한가 생각했다 / 태아를 따서 큰 유리병 속에 담아두었다 / 태아 눈물이 거품으로 넘쳐났다 / 태아는 거품에 싸여 어지럽게 돌고 있었다 / 아가야 양수가 더 필요한 거니 / 나는 불안해진 눈으로 태아를 들여다봤다 / 태아는 여전히 실눈만 깜빡거렸다 / 아가야 사는 건 다 고행이란다 / 나는 혀끝으로 눈물방울을 톡톡 찍어냈다 / 비릿한 살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 실눈만 깜빡이던 태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 이게 농담이란 건가요 / 태아가 눈알을 쑥 잡아 뺐다 / 찰나에 모든 것이 캄캄해져 버렸다 - ‘어제의 농담’ 모두

“김자흔의 시에 등장하는 여성은 아름답지 않고 그로테스크하다. 남성적 질서에 의해 부정당한 여성성과 생명이 돌아오는 모습은 그렇게 그로테스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영역이 아니라 숭고함의 영역이다”-시인 김진경

‘고장 난 꿈’을 ‘시’란 바늘과 ‘시인’이란 실로 꿰매는 여자가 있다. 유용주 시인이 “이 엽기적인 김자흔의 불온한 상상력은 최승자나 김언희를 뛰어넘는다”고 높이 추켜세운 시인 김자흔이 그다. 김 시인이 말하는 ‘고장 난 꿈’은 무엇이며, 왜 그랬을까. 태어날 때부터 어쩔 수 없이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꿈이 고장 난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이 고장이 나버려서 그가 꾸는 꿈까지 덩달아 고장이 나버린 것일까.

‘고장 난 꿈’에는 제1부 ‘첫 딸 신화기’, 제2부 ‘익명으로 오는 전화’, 제3부 ‘그건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제4부 ‘문’에 모두 60편에 이르는 시가 마치 고장이 난 것처럼 여기저기서 목청이 터져라 아우성치고 있다. 상처 입은 시들이 어쩔 수 없는 그 어떤 숙명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절름거리고 있다.

불면증, 인사동, 그 불온한 관계, 아이가 고양이를 먹고 있다, 흔들리는 거울, 젖 시 한 채, 홀로 쓰는 아비의 일기, 암탉은 날고 있다, 익명으로 오는 전화, 어제의 농담, 나비와 유리벽, 후두염을 앓다, 녹 낀 자화상, 밥솥도 뜨거우면 울음 운다, 구멍 난 아버지의 방, 사막물고기, 13월의 월경, 주름진 방, 퍼즐놀이, 꿈의 연옥, 자살 꽃 등이 그 시편들.

고장 난 꿈을 시로 짊어지고 가는 시인 
“늙은 고양이가 울고 있다. / 세상 밖은 아날린처럼 어지럽다 / 한 마리 벌새가 날아와 어둠 속에 집을 짓는다 / 세상 밖은 여전히 불청객이다.”
시인 김자흔이 ‘시인의 말’에서 거침없이 내뱉은 이야기다. 여기서 시인이 왜 ‘고장 난 꿈’을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물음표가 술술 풀린다. 시인이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지니고 가야 할 그 꿈이 고장 난 것은 아니다. 그 꿈은 핑크빛보다 더 곱고 아름답게 빛났다.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우는, 아직 이 세상이 무언지 잘 모르는 철없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시인이 자라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이 세상을 조금씩 더듬기 시작하면서 그 핑크빛으로 빛나는 꿈은 하나 둘 상처를 입기 시작한다. 시인이 철이 들고 이 세상을 더욱 깊숙이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때 이 세상은 ‘아날린’처럼 어지럽게 흥청망청 출렁인다. 그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마치 초청하지 않은 손님이 내 마음 속으로 불쑥 찾아와 자기 안방처럼 에헴! 하며 드러눕는 것처럼 깊은 상처를 입힌다. 까닭에 어둠 속에 집을 짓는 '한 마리 벌새'는 시인 자신이며, '어둠'은 이 세상에 다름 아니다.

광화문 사거리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나는 당신에게 꽝 꽝 꽝, 내 마음을 찍어대고, 올 듯 말 듯 당신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나는 기다림이 무서워 펄떡거리는 내 심장을 꺼내 길바닥에 펼쳐놓고, 여긴 뜨거운 무덤 속이에요 수증기가 자욱이 깔려 있죠 낮은 목소리로 내가 웅얼거릴 때, 당신은 이제 막 졸린 눈곱을 떼내면 느릿느릿 내 심장을 곁눈질하고, 당신에게 나는 이렇게 자신이 없는가 생각할 때 지하도 공사판 기계가 파르릉 소릴 내지르고 내 젖은 눈썹 위로 푸른 낮달이 흐르고, 나는 숨을 곳을 더듬거리다 기어이 공중전화기 속으로 몸을 숨기고, 오만한 당신이 느리게 나타났을 때 나는 내 작은 몸을 돌돌 말아 구멍 속에 더 깊이 숨겨놓고, 늘 그랬듯이 당신은 눈 한 번 꿈쩍 없이 뜨거운 입김 하나로 아주 쉽게 숨은 날 찾아내고, 엉뚱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이것뿐이라서 날 좀 안아줘요!
당신의 심장 속에 무례하게 날 가두어 버리는 당신은 당신은-‘사랑에 관하여’ 모두

첫눈에 번져 있는 저 순결한 피비린내로 찍은 시
시인 유용주는 “여자의 다리는 우주의 자궁이다. 다리를 건널 때마다, 이쪽과 저쪽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건넌 이쪽 세계는 피안이고 건너기 직전 저쪽 세계는 아수라인가”라며 “아버지를 낳은 딸과 아들과 결혼한 어머니와 손자의 딸인 할머니가 뒤엉켜 피를 흘린다... 첫눈에 번져 있는 저 순결한 피비린내!”라고 김자흔 시세계를 아프게 파헤쳤다.

시인 조정은 “김자흔이 쓴 시는 칼질이 휙휙 살아 있는 판화로 삽화를 삼아야 할 것. 그 삽화 뱃가죽은 지그시 누르기만 해도 ‘삶은 박 속’같은 내장들이 무한대 비어져 나올 것. 첫 시집 사육제를 위해 독자들은 식탁에 둘러앉을 것"이라며 "(김자흔이 마련한 식탁에서 불에 익힌 음식을 찾기는 어려울 듯)"이라고 씨줄 날줄을 더듬는다.

시인 김자흔은 “이렇게 제 처녀 시집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설레였고 출간된 시집을 받아들고는 두근거렸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편으로 시집에 대한 책임으로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작품 순서 배열을 야무지게 하지 못한 점은 후회스럽습니다”라며 “(그게 아주 심한 독감 때문이었다면 무책임한 말이 되겠지요) 이제 평가 몫은 독자”이라고 속내를 수줍게 내보였다.

김자흔 첫 번째 시집 <고장 난 꿈>은 불청객인 이 세상이 시인과 시인을 둘러싼 가족들에게 입힌 깊은 상처가 남긴 멍에다. 시인은 그 멍에를 보듬고 다시 어둠만 가득한 이 세상에 작은 촛불 하나를 밝힌다. 아무리 이 세상이 얄밉고 저만치 내동댕이치고 싶어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까닭은 시인과 그 가족, 이 세상 사람들이 아등바등거리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할 그 자리가 바로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시인 김자흔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2004년『내일을 여는 작가』신인상에 ‘사랑에 관하여’ 외 3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풀밭’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은 ‘주름진 방’이라는 시에서 “상처 난 영혼들을 위해 / 나는 나만의 방을 준비해 두고 싶었다 / 주름진 벽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 나만의 비밀열쇠를 간직하고 싶었다”고 쓴다. 시인 스스로 고장 난 꿈을 고치기 위한 방이 곧 ‘상처 난 영혼들’을 어루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자흔 시인은 지난 2~3월 '문학in'에 신작시를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