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조선 일류 가객, 박춘재 (1)
[연재소설]조선 일류 가객, 박춘재 (1)
  • 박춘재 일대기
  • 승인 2011.05.30 11: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맞으면서도 물어보는 어린 소리꾼
맞으면서도 물어보는 어린 소리꾼

“춘재야, 널 정말 어이할 거나!”
선생이 회초리를 들려다 말고 한숨처럼 말했다. 그래도 이 동네뿐이 아니라 고개 너머 홍제동으로, 연희동으로, 애오개까지 이름있는 소리 선생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터인데 꼭 한 군데 저놈 앞에서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오늘은 좀 얌전하게 지내겠지 했는데 또 심사를 확, 아니 아까부터 서너 차례 뒤집어 놓고 보니 이제는 지쳤다는 표정이다.
 “제발, 가르쳐주면 가르쳐주는 대로 해!”
 “무슨 뜻인지 알아야 넘어가죠. 선생님, 그러니까 제 말은요 유상앵비는 평평금이요, 화관전무는 분분설이라,에서.”
 “박춘재!”
 선생은 그만 장구채를 던져 버리고 회초리를 들고 말았다. 유산가를 배우는 첫날인데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바짓가랑이 걷어!”
 춘재는 아무 말 없이 바지를 걷고 휘리릭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숙향이가 입을 막고 키득거렸다. 다른 아이들은 멀건 눈으로 핏발 선 종아리를 건너다보았다.
 “다시 한다! 유상앵비는 평평금이요.”
 “유상앵비는 평평금이요.”
 학동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일제히 입을 맞추어 잘 따라 했다. 회초리 효과가 있었다. 춘재도 얌전해져서 하라는 대로 하고 있었다. 종아리가 아플 만도 한데 쓰윽, 쓱 몇 번 문대더니 잘도 따라 했다.
 반송방(盤松坊) 북쪽 너른 벌판 너머로 어린 소리꾼들의 유산가 소리가 흘러가듯 퍼져 나갔다. 무악재 너머로 가는 길에는 아침에 파발들이 몇 차례 달려간 이후로 한가하더니 오후도 다 지나가는 가을날 지금은 서지(西池)에서 연밥을 따 바구니에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오는 처녀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짧은 해를 재촉하듯 마을로 사라지고 있었다.
 “예, 너 이제 그만 해라.”
 개울을 건너는데 숙향이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집에 가서 일르지 마.”
 “뭘?”
 건넌 마을 시렁굴 박수무당 딸 임숙향이었다. 같이 소리를 배우러 다닌지 두 달이나 되었다. 박수는 아버지와 친구였고, 어느날 오더니 숙향이하고 소리를 배우라면서 개울 건너 마당 너른 초가로 데리고 갔다.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었지만 아버지가 자꾸 가라길래 간 것이었다. 숙향이는 잘 배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춘재는 첫날부터 선생하고 잘 사귀지를 못했다. 툭하면 곰방대로 맞아 머리에 멍이 들고, 종아리에 핏자국이 생겨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것을 보고 또 회초리를 들었다. 니가 잘못했으니까 맞은 거지 그냥 때리셨겠느냐는 것이었다. 왜 맞았느냐고 진지하게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또 맞을까봐?”
 “응.”
 춘재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나서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 왜 꼬치꼬치 따지니? 따지긴!”
 “그럼 넌 무슨 뜻인 줄이나 알고 소리를 하니?”
 멀쩡하게 되물었다. 자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묻는데 그게 왜 잘못이냐고 했다. 집에 가적어 가면서 봐도 모르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건, 소리 선생이 왜 그걸 모르냐는 것이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물어보지 않을 텐데 왜 무조건 하라는 대로만 하라면서 곰방대요, 회초리냐는 거였다. 꼭 한 번 말한 적이 있었다.
 “야, 이놈아! 내가 그걸 알면 여기서 이짓을 하고 있겠냐?”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청파동에서 홍 선생이라고 하면 알아주는 소리꾼이라고 했다. 사십대 중반인데 육십대 남도 소리꾼들도 배우러 온다 했다. 제자들 중엔 모갑이도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이 짓이라니? 그걸 알면, 이라니? 좀 쉽게 말해주면 잘 알아들을 텐데 꼭 한 번 그렇게 말하고는 도끼눈이고 입술을 이죽거렸다.
 “춘재 니 말이 맞긴 맞아. 다른 애들이 그러는데.”
 “다른 애들?”
 숙향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춘재 니가 참 유식하대.”
 “뭐? 유식? 버드나무식이라고?”
 풀을 한 움큼 쥐어 뜯어 던지면서 목청을 높였다.
 “버드나무?”
 “버들 유니까 유식은 버드나무식이지.”
 숙향이 키득거리고 웃었다. 춘재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데 얘, 너 아니? 요즘 배우는 거, 유산가, 그거 누가 젤로 잘하는지 알아?”
 “몰라. 누군데?”
 박춘경이라는 소리꾼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이 지은 것이라는 말도있다고 했다.
 “넌 어떻게 그런 거까지 아니?”
 “비밀 얘기 한 가지 해줄까?”
 춘재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맞으면서 아프지 않은 것은 바로 그 생각 때문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몇 대 맞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뭔데? 그게.”
 “알고 싶어?”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털어대고는 마구 집쪽으로 달려갔다. 숙향이도 그 뒤를 따라 달려갔다.
 “뭔데 그게?”
 “아냐. 아무것도.”
 열 살 동갑내기였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둑길 위에서 폴짝거릴 때마다 짧은 댕기머리가 보기좋게 흔들거렸다.
 “말할 거야.”
 다음 날, 숙향은 소리 배우러 가면서부터 궁금한 것을 물어댔다.
 “춘재 맨날 맞는데요. 맨날 선생님한테 혼난대요. 버르장머리 없고, 배우지 못했고, 하라는 짓은 안 하고 엉뚱한 질문이나 해대고, 그러다가 죽도록 얻어 맞아요. 모르셨죠? 그러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 비밀얘기가 뭔지 말하라고? 그럼 그 얘기까지 하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랬다. 결심이 섰으니까 이제 실천에 옮기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그때야말로 큰일이다. 공연히 숙향이한테 말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