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조선 일류 가객, 박춘재 (3)
[연재소설]조선 일류 가객, 박춘재 (3)
  • 박춘재 일대기
  • 승인 2011.05.3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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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동 부부의 외아들

그러면서 동구밖 선소리패들의 말에 매력을 느낀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말의 진정은 이미 전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뭔가 갈증같은 것이 그곳에 가면 풀려질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린 소리꾼들은 다음 날 기어이 박춘경의 집을 찾아냈다. 비가 오고 있었지만 도롱이를 걸치고 덜덜 떨면서 물어물어 찾아냈다. 모화관을 지나 돈의문쪽에 있는 집을 찾아냈을 때 아이들은 울타리 밖에서 걸음을 멈추고 사립문 기둥처럼 서 있었다. 안에서 노래를 가르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유상앵비는 편편금이요, 화간접무는 분분설이라, 먼저 그 뜻을 잘 알고 소리에 담아야 하는 게야. 여길 잘 봐라. 유상앵비는 편편금이요, 버들 위에 나는 꾀꼬리는 몇몇 금조각같고, 화간접무는 분분설이라 꽃 사이로 날아다니는 나비는 흩날리는 눈송이같고나.”

그러더니 유산가 그 그윽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그것이었다. 어제만 해도 편편금을 평평금이라 발음하고 화간접무를 하관전무라 해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다가 곰방대로 맞고 회초리로 맞았었다. 그게 무슨 뜻인 줄 몰라 졸다가 잠이 들고 말았었는데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글 안 배워도 알 수 있었다.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어린 소리꾼들은 비를 그대로 맞은 채 사립문 앞에 서서 빗속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이판동 부부의 외아들

 박춘재(朴春載)는 1883년 서울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이판동(李判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박창배(朴昌培), 어머니의 이름은 심성녀(沈姓女)이다. 부부의 외아들이었다. 오래 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평민이었다.

태어나 성장한 이판동은 서울 돈의문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지금의 독립문 앞 사거리 인근이다. 이곳은 북쪽으로 빤히 보이는 무악재로 통하는 길이다. 무악재는 조선왕조시대에 중국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중국으로 오가는 조선의 사신들이나 물산이 통과하는 유일한 육상 교통로였고, 특히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는 고개 이쪽 저쪽에 그들을 맞이하는 영접 장소가 있어서 임금과 대신들의 행차, 사신들의 행렬 등을 자주 볼 수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임금이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는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중국을 마음 속으로 받들겠다는 의미를 담은 모화관(慕華館)이 바로 그곳이다.

박춘재의 어린 시절 놀이터는 바로 그 모화관 인근이었다. 그곳을 중심으로 멀리 무악재 아래까지는 너른 벌판으로 되어 있었다. 마을은 무악재를 향하다 보면 오른쪽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그 뒤 인왕산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물들이 소리를 내며 마을 앞을 지나고 있었다.

중국 사신들은 한성에 들어오기 전에 일단 홍제원에 당도하여 여장을 풀었다. 지금 지하철 홍제역이 있는 곳으로 무악재를 넘기 전에 마련되어 있는 사신 접대용 숙소였다. 이를테면 국립 호텔인데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 후 예복으로 갈아 입은 다음 고개를 넘게 된다.

이곳에 올 때까지 통행로는 의주, 평양, 개성을 연결하는 서북쪽 국도로 당시 전국의 9개 간선도로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도로였다. 한성에서 무악재를 넘어 의주까지의 거리는 약 천 팔십 육 리로 중국으로 오가는 사신들의 통행로였으므로 연행로, 또는 사행로라고도 불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