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조선 일류 가객, 박춘재 (4)
[연재소설]조선 일류 가객, 박춘재 (4)
  • 박춘재 일대기
  • 승인 2011.05.3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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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동 부부의 외아들

사신들은 홍제원에서 의관을 갖추고 나면 좁고 가파른 무악재를 넘어 비로소 한성에 들어가게 되는데 고개를 넘으면 모화관에서 임금이 직접 나와 사신을 영접하고 같이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신이 돌아갈 때는 조선의 관리가 홍제원까지 나와 전송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모화관은 세종 때 생겼고, 그 이전에는 모화루라 했다. 태종이 처음 건립하고 모화루라 한 것이다. 모화루가 있기 전에도 중국 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영접했다. 그때에는 특별한 건물이 없고 단지 이곳에 있던 큰 소나무 아래에서 맞이했다. 그 소나무가 바로 반송이었다. 가지가 우람하고, 넓게 퍼져 있어서 웬만한 비를 피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고려 때 어떤 임금이 당시 남경이었던 한성에 순회차 들렸다가 비를 만나 이 소나무 아래에서 피하고 난 후 그 우람한 형세에 감탄하고서 반송정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 지역 명칭이 반송방인 것은 그 전설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태종이 이 소나무 바로 옆에 모화루를 세우기 이전까지는 반송 아래에서 사신들을 영접했을 뿐만 아니라 개성에 있던 왕가의 신주를 모셔올 때에도 이곳에 문무백관이 모두 나와 맞이한 것이다.
 태종은 모화루를 건립하고 나서 그 이듬해에 바로 남쪽으로 인공 연못을 파도록 했다. 길이가 380척, 폭이 300척, 깊이가 2장 정도 되었다니 꽤 큰 연못이었다. 연못이 완성되자 개성에서 연뿌리를 캐와 심게 하고 물고기를 풀어 놓았다. 그런데 그 연과 물고기들이 잘 자라 연이 곧 무성하게 자랐고, 물고기들은 새로운 관상거리로 등장했다. 가을이면 연밥을 따기 위해 궁녀들이 나왔고, 연꽃 구경은 한성 주민들의 즐거움이 되기도 했다.

한성 주변의 교통로 주변이 그렇듯이 이곳에도 명문가의 별채가 상당히 있었다. 과거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면도 있지만 관직에 있는 문중 사람들의 연락처로 삼기 위해서 거처로 삼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서쪽에서 접근하기 좋은 위치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도 그런 곳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곳은 영조 때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도암 이재의 문중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판서를 배출했던 집안이었던 만큼 이판댁이라 했는데 이판동이라는 명칭은 그 이름에서 유래했다.

박춘재의 출생지를 살펴보면서 이런 면을 조명해보는 것은 그의 어린 시절 성장지의 환경적인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박춘재는 무악재 아래 동네에서 출생해 그곳 반송정, 모화관 그리고 서지(西池)라 했던 연못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광경을 생활 속에서 보고 겪으면서 자란 것이다. 왕조시대를 지나오면서 반송정 주변은 정치의 갈림길이 되었고, 시대상이 반영되고 시선을 끄는 지역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곳을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로 이용했고, 감수성 예민한 시인묵객들은 그 사연을 글로 남겨 이곳 환경의 특수성을 말해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장소에 흔히 그렇듯이 고개 이쪽 저쪽에는 주막거리와 대장간, 색주가가 있었고, 그곳에 가면 국밥집, 떡장수, 엿장수들을 언제고 만날 수 있었다. ‘홍제원 인절미’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홍제원 인근의 인절미가 맛좋기로 유명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곳에는 또한 으레 시도 때도 없이 판이 벌어지곤 했다. 남사당도 있고 여사당도 있었다. 선소리패도 있었고, 남도 소리꾼들도 있었다. 그러나 주로 서울 주변에서 떠돌아다니는 패들이었다.
 자리가 좀 널찍하고 통행인들이 쉽게 모일 것 같으면 걸궁패, 짠지패, 솟대쟁이패, 탈춤패 등등 광대, 날탕패들이 어디서 모이는지 판을 벌여 놓고는 온갖 재주를 다투어 보여주었다. 한쪽에서 줄타기가 한창인가 하면 한쪽에서는 앞곤두, 뒷곤두가 넋을 빼놓고, 또 한쪽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져 왁자하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