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가던 날-가마 행렬엔 무슨 일이 있었나?
시집 가던 날-가마 행렬엔 무슨 일이 있었나?
  • 권대섭기자
  • 승인 2011.07.1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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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당 만나면 소금주머니 걸고, 개울 건널 땐 명태 대가리 띄워

신랑 집 대문에선 짚불 밟고 넘어...‘천 년 이팥 만 년 메밀’ 기원

<일생의례의 역사민속학> 심포지엄서 연구결과 발표

신부가 가마를 타고 시집가던 길을 초행(初行)이라고 했다. 옛날 우리 할머니는 가마타고 시집가던 길에 징검다리 놓인 강을 건너는데, 가마꾼들이 가마를 흔들어 개울에 빠트릴 듯 말 듯 장난을 치는 통에 잠시 놀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강을 건너 휴식을 취하려 가마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신랑이 다가와 “오시느라 수고하셨소!”라며 두 손을 잡아 주더란다.   참으로 목가적인 풍경이다. 예식장에서 식을 올린 뒤 바로 비행기타고 신혼여행 떠나는 요즘 결혼풍속도와는 판이하다

 우리 고향마을 뒷산엔 청도에서 시집오다 홍수 난 개천을 건너던 중 실족, 물에 빠져 죽은 신부의 무덤도 있다. 시집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횡사한 이 할머니의 제사를 후손들은 지금도 지내준다. 이처럼 옛 시집 길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요즘처럼 밝고 설레는 길이라기 보다 서글픔과 한이 서린 길이기도 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정연학 학예사(교수)는 8일 오후 고궁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 ‘일생의례의 역사민속학’ 심포지엄에서 <일생의례와 물질문화>라는 제목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출생의례와 혼례에 관련된 민속도구 중심으로 풀어간 이 발표에서 정씨는 혼례에 관련된 여러 가지 옛 풍습들을 소개했다. 본 지는 지면관계상 그 중 일부를 발췌, 내용을 재구성했다.

 한편 이날 심포지엄에선 제주대학교 주강현 교수, 성신여대 오종록 교수, 국립문화재 연구소 황경순 송민선 방인아 학예사 등이 일생의례 조사의 성과와 비판적 검토, 문헌을 통해 본 한국인의 일생의례, 출산의례의 변화양상과 의미, 친영(親迎)과 반친영(半親迎)의 문화적 함의, 시제(時祭) 전승의 지속과 변화 등의 연구결과를 각각 발표했다.

 설레임보다 서글픔 깃든 초행길

초행(初行)의 가마는 상례의 상여처럼 대표적인 결혼 의례도구이다. 1960~1970년대 까지만 해도 혼례를 위한 신랑 신부 예복이나 가마, 목안(나무로 만든 기러기) 등의 혼례용품을 마을 공동 혹은 문중 공동으로 썼다. 당시엔 비단으로 큰 옷을 짓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했다.

구한말 어느 대가집의 가마행렬이 당시 카메라에 잡힌 모습. 청나라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그래서 동네마다 남자는 사모관대와 단령, 여자는 저고리와 원삼 등 큰 옷을 준비 해놓고 혼례가 있는 집에 세를 놓아 빌려 줬다. 세를 놓아 모은 돈은 혼례복이 파손 됐을 때 수선하거나 새로 다시 장만하기 위해 따로 모은다. 신랑 신부는 예복을 한 곳에서 공동으로 빌리는 게 아니라 신부는 신부 마을에서, 신랑은 신랑 마을에서 혹은 각각의 출신 문중에서 보관되고 있는 예복을 빌려 썼다.

 대전지역에서는 초행길에 서낭당이나 강을 지나거나 행상을 만나면 잡귀, 잡신이 따라 붙어 부정하다고 여겼다. 이때는 나뭇가지에 소금주머니나 명태 대가리를 걸어놓고, 강을 건널 때는 명태 대가리를 물에 띄워 보낸다. 부산에서도 도랑이나 다리를 건널 때 마다 한지로 쌓은 소금을 하나씩 던져 나쁜 액들이 신부를 따라오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대구에서도 가마를 타고 오면서 내를 건너게 되면 팥을 던졌고, 해남지역에선 신행을 가는 도중 잡귀가 범접하거나 부정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새미쌀’을 만들어 지니고 있다가 삼거리나 서낭을 지날 때 나무에 걸었다.

새미쌀은 빨강, 파랑의 색지나 천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쌀을 담은 것으로 새미쌀을 걸어두면 부정이 옮아간다고 여긴다. 신랑집에 도착할 때 까지 모두 걸지 못하면 신랑집 대문 앞 짚불에 한꺼번에 던져 넣는다.

 가마가 신부집이니 신랑집 대문을 지날 때는 부정을 예방하는 의미로 짚불을 치거나 밟고 지나갔다. 이런 행위는 각 지역에서 보인 일반적인 현상이며, 대구에서는 이렇게 짚불을 발로 차는 것을 신혼살림이 불같이 일어나라는 뜻을 담은 것으로 여겼다. 대전이나 청주에서는 신랑이 신부 집 대문에 들어설 때 짚불 대신 바가지를 깨고 들어간 경우도 있다.

 청주에서는 신랑의 가마가 집 안으로 들어오면 신부 마을의 청년들이 가마에 재나 밀가루를 뿌린다. 그래서 재와 밀가루를 맞은 신랑이 잘 털지 못하고 초례청에 입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놀이로 여겨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신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태안에서는 신부가 짚불을 넘어 대문 안에 들어서면 다리미나 바가지에 담은 메밀, 콩, 팥, 소금 등을 신부를 향해 뿌린다. 이때 “천 년 이 팥, 만 년 메밀”이라고 하는데, 팥은 천 년이 지나 심어도 싹이 나고, 메밀은 만 년이 지나 심어도 싹이 나듯 오래도록 변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소금은 부정을 막는 역할로 볼 수 있다.

사대부가의 혼례식을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한 모습(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대전지역은 신부에 대한 여러 행위들이 조사됐다. 신부 가마에 살이 끼었다고 하여 화살을 신부가 온 방향으로 쏘기도 했는데, 이는 몽골 등 유목민족에게서 보이는 풍속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사례를 보여 흥미를 끈다. 또한 무당이 징을 치며 ‘액운아 다 나가라!’라고 축원하기도 하며, 가마가 들어올 때 시어머니가 가마 앞에서 호박을 깨뜨리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모두 신부를 따라 왔을 지도 모를 잡귀나 액운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

가마는 대체로 사인교를 사용했다. 해남에선 신랑집에서 신부의 가마를 마련한 경우 초행길에 가지고 가는데, 가마를 모두 분리해 가지고 갔다가 초행길에 조립해 사용하기도 하고, 신랑이나 웃손이 가마를 타고 초행을 가기도 했다. 가마를 메는 일은 보통 마을 주민들이 품앗이로 이루어졌다.

과거 가마사진을 보면 가마 위에 호피나 호담을 덮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민간에서 그리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지역에선 가마 위에 호담을 덮는 것은 신부가 신랑 집으로 들어 올 때 잡귀나 잡신이 따라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다.

 제주도 동남부 온평마을에서는 신랑쪽 부모 중의 한 사람이 사망하면, 신부의 가마에는 흰무명을 씌우고, 신부도 예복으로 소복을 입었다고 한다. 신부는 신랑집에 도착하여 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영혼 상’에 절을 한 다음 음식상을 받았다고 한다. 정해진 혼례날에 초상이 난 경우의 사례이다.

 사모관대, 원삼, 족두리, 비녀, 버선 등 혼례복도 중요한 물질문화 연구대상이다. 각 지역 보고서에는 사모관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보이지 않으며, 주로 신부의 혼례복에 대한 보고가 보이는 정도이다. 그 가운데 대전지역에서는 홀아비가 처녀와 장가를 들 경우에 사모의 뿔 하나를 뺀다는 내용이나 간혹 수의로 마련한 원삼을 3번 빌려주면 좋다는 흥미로운 사례도 있다. 현재 조선족들은 과거 혼례 때 입은 한복을 수의로 사용하고 있다.

 버선에 대한 내용도 단편적인 기술만 있다. 청주지역에선 신부 버선이 잘 빠지지 않도록 바느질을 해서 신랑이 애를 먹는 경우가 있음은 의미가 있다. 맨발은 여성의 성을 나타내며, 버선을 벗는 다는 것은 성을 허락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촛불도 젓가락으로 눌러 끄는데, 이는 중국에서처럼 자손을 빨리 나으라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신부가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을 때 자식을 제일 많이 낳은 사람이 비녀를 꽂아준다. 역시 자손번창을 기원하는 의미다. 족두리는 마을이나 문중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을 쓰기도 하지만 대개 집에서 직접 만들어 쓰기도 했다.

신행길 가마 안엔 놋요강...요강 안엔 찹쌀 팥 목화

 신행은 신부가 신랑을 따라 처음으로 신랑집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신행에는 가마, 가마안의 상징물, 혼수품 등을 수반했다. 신행을 갈 때 신부의 가마 안에는 놋요강, 바느질 상자 등을 넣어 줬다.

요강 안에는 짚을 깔거나 솜이나 목화씨를 넣는 경우가 많은데, 짚을 까는 경우는 신부의 오줌소리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함인데 실제 요강은 잘 사용하지 않았고, 심지의 갈무리 도구로 이용되었다. 청주지역에서는 요강 안에 찹쌀 팥 목화 등을 넣어주고, 요강에 넣어 간 잡곡은 신부가 시집에 가서 3일 만에 처음 부엌에 나왔을 때 시댁의 쌀과 섞어 밥을 지어 먹는다고 한다.

옛 가마의 실물모습(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부산에서는 요강에 엿을 넣어갔다. 이런 사례는 요강이 배뇨용으로뿐만 아니라 다른 용도로도 쓰였음을 말해준다. 해남지역에선 가마 안에 바느질 상자를 넣어가고, 가마 밖에는 머릿기름병과 바가지 등 생활용품을 매달았다.

 혼수품은 신부 자신을 위한 것과 시부모를 위한 것으로 구분됐다. 자신을 위해서는 이불과 옷, 요강과 세숫대야가 기본적으로 준비되었고 시부모를 위해서는 밥그릇과 국그릇, 수저 등을 준비해 갔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앞닫이, 이불, 농 등을 준비하고 시부모에게 이불을 선물하기도 했다.

 옷을 만들 때는 마을에서 팔자 좋은 여자들이 모여 도와준다. 자식을 먼저 잃었거나 과부인 여자는 혼수용 바느질을 할 때 함께 하지 않는다.

친정가는 재행 길엔 ‘이바지 음식’ 가득

시집온 지 3일이 되는 날 신부는 신랑과 함께 친정으로 가는데 이를 재행이라고 한다. 이때 신랑집에서는 신부집에 여러 음식을 보내는데, 이것을 ‘이바지 음식’이라고 한다.

 부산에서는 이바지음식으로 닭고기, 지짐, 찰떡, 조기, 엿, 과일, 밤, 대추 등을, 태안에서는 각종 떡과 술, 안주 등을 가지고 간다. 이바지 음식은 지역이나 개인마다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항은 아니다. 한편 엿은 시어머니가 잔소리하지 말라는 의미로 전주나 부산지역에서 이바지음식에 포함시켜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