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교수의 일본은 지금 ]송몽규 재판 판결문 최초 공개
[이수경교수의 일본은 지금 ]송몽규 재판 판결문 최초 공개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 승인 2011.08.0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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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교토 검찰청, 윤동주에 이어 송몽규 재판 판결문도 전문 공개
7월22일 오전 10시, 교토 지방 검찰청이 시인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으로 후쿠오카에서 옥사한 송몽규(북간 도에서 태어나 연희전문을 거쳐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에 유학 중, 윤동주와 함께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를 당한 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1917년9월28일~1945년3월7일) 의 재판 판결문 전문 7매를 전격 공개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상범으로 취급된 사람들의 기록 공개가 이뤄지지 않았던 상황을 생각하면 작년의 윤동주 판결문 공개에 이어 이번 송몽규 재판 판결문 공개도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윤동주 연구자가 판결문을 몰래 베껴서 내용은 이미 알려진 상태지만, 일본의 검찰청 기록과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 것은 처음이다.

이 배경에는 윤동주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며 그의 평화를 사랑한 정신을 기리며 국가나 민족을 초월한 인간적 교류를 알리려는 의도에서 윤동주가 교토에서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진 장소인 우지강 주변에 시비를 건립하려는 윤동주 시비건립위원회(安斎育郎대표)의 공로가 크다.

특히 곤다니 노부코(紺谷延子) 사무국장은 윤동주의 죽음을 알게 된 이후, 한 가정의 주부지만 침략전쟁을 자행한 일본에 태어난 시민의 양심으로서 결코 전쟁을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윤동주 시비 건립 운동을 통하여 널리 알리는데 힘써 왔다. 그리고 윤동주 및 송몽규의 판결문과 자료 공개를 요청하였고, 다른 형태로 판결문 내용이 알려져 있는 터라 검찰청도 공개에 응한 것이다.

필자는 1학기 수업이 끝난 7월 22일로 날짜를 조정하여 신칸센을 타고 교토로 갔다. 오전 10시, 교토 검찰청 로비에는 작년의 윤동주 판결문 입회자인 곤다니 노부코씨와 미즈노 나오키 교수(水野直樹, 교토대학교)와 필자 이수경(도쿄가쿠게이대학교), 그리고 윤동주 시비건립위원회 안자이 이쿠로 대표의 바쁜 사정으로 대리 출석을 한 가토 히데노리 (加藤英範)변호사, 하사바 기요시(波佐場清) 전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이 판결문 확인을 하였다.

▲ 교토지방검찰청 앞의 입회자들(이수경 촬영)

원래는 판결문과 취조 기록은 별도 보존을 하므로 취조 기록 내용은 먼저 폐기 처분을 하고, 이번 송몽규(지검 기록번호 19번)나 윤동주(지검 기록번호 15번) 등의 재판 판결문이 들어있는『금고 이상 재판 원본(禁錮以上裁判原本)』 (1944년 1월—6월분)파일은 영구 보존을 하도록 되어있다고 기록과의 담당자인 야마모토씨가 설명을 한다. 이번에는 작년의 윤동주 판결문 공개와는 달리 유족의 공개 요구 승락 위임장을 요구하여서, 송몽규의 조카이자 역사학자로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였던 송우혜씨의 승락서를 받아서 제출하였다.판결문을 보면 1944년 4월13일에 선고를 받고 4월 17일에 확정이 되어있다. 

송몽규의 본적은 조선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 422번지가 되어 있고, 주거지는 교토 사쿄쿠 키타시라가와 히가시 히라이쵸 60번지 시미즈 에이이치방 (京都市左京区北白川東平井町60番地 清水榮一方)이 되어있다.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선과학생인 송몽규를 치안 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있어서 교토 지방 재판소 제1 형사부 재판장 고니시 노부하루 판사는 검사 에지마 다카시 관여 심리를 한 결과 징역 2년에 처한다고 되어있다.송몽규의 주된 활동이 비교적 정리가 잘 되어 있기에 알기 쉬운 판결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종교적으로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며 시를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이 그의 문학적 재질을 인정 받으면서도([밤][하늘과 더불어]등의 시가 있다) 문학보다는 독립 운동에 결여된 이론적 보완의 필요성을 느껴 직접 운동에 뛰어들었고, 예리한 시대 상황을 분석하여 조선의 독립에 대처하는 선견지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판결문 내용을 보면 우선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 특히 언어 문화를 말살하는 사회 상황 구조를 파악하여 지적하고 있고, 기존의 독립 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 이론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차별적 대우와 조선의 징병제도에 대한 현실 및 징병제도를 역으로 활용하여 국력을 보완해야 한다는 발상, 일본이 머지않아 대동아전쟁에서 패전을 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도록 조선을 이끌 훌륭한 지도자 양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론 전개를 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 송몽규 재판 판결문 첫장

이 내용으로 보면 송몽규의 행동이란 당시 일본인이었다면 영웅적 운동가로 평가 받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식민지 출신이었기에 조국의 독립을 생각해서는 안 되는 모순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송몽규의 조국 독립에 대한 갈망과 독립 운동의 이론적 학문적 필요성은 냉철한 현실 대처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고, 징병제도를 통해 무기에 대한 지식을 지닌 뒤, 그런 힘으로 일본의 패망의 시기에 한꺼번에 대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 방법론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독립후의 시대를 이끌 지도자 등의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논하면서 조선이 독립된 뒤의 사회적 운영에 대비한 이론까지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말대로 대동아전쟁이란 미명하에 일본은 곧 패망을 하게 되나, 그는 윤동주와 함께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로 옮겨지고, 매일 밤 이름 모를 주사를 맞다가 윤 동주를 1945년 2월 16일에 잃은 뒤, 본인도 3월 7일에 절명을 하게 된다. 규슈제국대학의 생체실험도 당시에 여러 형태로 행해졌기에 그들도 그러한 희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 27세의 청년은 조선 독립만 꿈꾸며 생애를 태웠지만 결국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지금은 중국 연변의 명동 고향 땅 언덕 위에 잠들고 있다.

2011년 7월 4일, 필자가 담당하는 인권 교육 수업에서 송몽규와 윤동주를 비롯한 일본 특별고등경찰의 폭압으로 희생이 된 한일 문학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설명과 강연, 낭송 등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송몽규와 윤동주는 유학을 통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갈구하였던 만큼, 전원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학생들에게 그들과 같은 20대의 삶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던 전쟁 폭압을 두 번 다시 용서해서는 안된다는 재확인을 한 셈이다. 용정의 언덕에는 청년 문사 송몽규의 묘가 윤동주 묘 옆에서 고즈넉히 세월의 풍화 속에 침묵하고 있으나, 진정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지혜를 모색했고 민족의 문화가 말살 당하는 안타까움에 가슴 아파하며 독립 운동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이었음을 판결문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 살고 있다는 감사와 더불어 그들이 못 다한 삶을 대신 살아야 하는 책임을 느끼며 다시금 불행한 역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풍화된 역사의 흐름이 있어도 자신들의 고향 땅에서 잘못된 시대에 태어나 그 시대의 불행을 대신 짊어지고 사회를 보다 좋게 만들려고 하다가 희생된 조상이 있었음을 가르치는 교육을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교토지방 검찰청 앞에서 입회자들(하사바씨 촬영)

필자의 학교에는 매년 조선족 출신의 응모자도 많이 입시에 응한다. 그들은 모두 인문사회학 분야에서 그럴싸한 내용의 제목으로 응시를 한다. 그러나 면접을 하면서 참으로 실망할 때가 많다. 용정 출신이라기에 반가워서 송몽규, 윤동주, 문익환 등을 물어보면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족이지만 중국 국적이고 어릴 때부터 중국에 대한 교육을 받을 테니 교육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 출신이라면 조선족이 왜 중국에 살게 되었는지, 왜 자신이 조선말을 포함한 다언어 사용자가 되었는지, 내가 해외에 나갔을 때 알릴 수 있는 고향 사람이 어떤 사람이 있는지, 적어도 길림 연변 출신의 해외 유학생이라면 문화 교류 차원에서라도 지식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일본 시민들이 이토록 그들의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건만, 정작 그들의 고향에서 온 학생들은 그들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면 그들의 20대의 죽음은 너무나 억울하지 않을까? 누구를 위한 삶이었던가? 그들의 활동이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분명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다 억울하게 희생이 된 것이다.자신의 고향도 모르는 사람이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사회 문화 연구를 한다고 와도 그들이 과연 얼마만큼 연구 내용에 대해 접근하고 규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주변부터 관심을 가지고 파고드는 자세, 그리고 전문적 지식을 배워서 사회 공헌에 앞장서는 진취적 발상의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 대학이기도 하기에, 송몽규나 윤동주와 같이 이국 땅에서 공부를 하려는 학생이라면 사회 발전과 향상을 위해서 살다가 희생이 된 그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오는 8월 2일에서 7일까지 교토의 리츠메이칸 평화박물관에서 열리는 [제31회 평화를 위한 교토의 전쟁전]에서 송몽규 판결문과 윤동주 판결문이 자세히 공개되고, 기간 내에 곤다니 사무국장의 설명 안내 등을 들을 수 있다.또한, 8월 2일 오전에는 미즈노 나오키 교수의 ‘윤동주와 전쟁 말기의 치안 유지법— 조선 독립운동의 검증’ 강연이 열린다. 여름 방학을 맞아서 각종 스펙 만들기에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듣지만, 교토 등의 해외 지역을 방문할 기회를 만들어서 한국 관련 역사 유적지를 조사도 해보고, 발로 뛰면서 지역 도서관이나 자료실을 방문하여 한일 관계사 자료나 지역 관련 사료 찾기 등을 해 보면서 우리가 걸어 온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도 유익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