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땅이름...우리 문화세포가 '위험'
오랜 땅이름...우리 문화세포가 '위험'
  • 권대섭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11.08.1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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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주소 사업으로 수만개 지명이 사라진다니...

 내 고향마을의 원래 지명은 구마리(驅馬里)였다. ‘말을 달리는 동네’라는 뜻이다. 400년 전 임진왜란 때 그곳에서 말달리고 활쏘며 군사를 조련한 데서 비롯됐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은 ‘구마리’라는 지명을 잊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전승해 가고 있다.

 때로는 발음이 와전, 그곳 강가 절벽과 묶어 ‘구만리 덤’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릴 적 우리네 아이들은 그곳 넓은 개활지에서 쌀이 구만섬이나 났다하여 ‘구만리’라 한다느니, 장군을 태우고 달리기 위한 말이 났다하여 ‘구마리’라 했다느니 등등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으며 자랐다.

그 구마리 덤 위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영락없이 붕어처럼 생긴 ‘붕어듬’이 보인다. 이 덤은 진짜 완전 붕어다. 붕어빵 저리 가라 할 ‘붕어듬’이다. 북쪽 한천(漢川) 쪽을 향한 덤의 머리 부분은 마치 붕어가 연신 주둥이를 버끔거리는 듯 하다.

 그곳 머리 위에 임진란 당시 이 지방 의병장과 그와 함께 했던 이곳 사내들의 굳세면서도 순진한 표정이 새겨진 장군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시작된 붕어듬은 그 등과 기슭따라 삼창마을을 업고 가다 꼬리 지느러미 부분에 지곡학교를 앉힌 후 곧바로 자티고개 솔밭 언덕으로 이어진다.

 그 모양새가 어찌나 붕어와 똑같은지 물길 거슬러 노니는 형상에 어유산(魚游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어유산(붕어듬) 지느러미와 꼬리가 왼쪽으로 틀면서 끝자락 산기슭(구릉)에 생겨난 동네가 괴뜰과 탑안이며 탑안을 안고 갑자기 웅장하게 솟은 산이 양각소(앙강수) 덤이다.

괴뜰은 큰 괴화나무가 아름다운 동네였다는 데서 생긴 이름이고, 탑안은 옛날 이곳에 절이 있어 탑이 섰던 안쪽 마을이라는 뜻이다. 양각소는 대천마을 쪽에서 바라보면 양의 뿔처럼 생긴 높은 덤 아래 깊은 소(沼)가 흐르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볼록하게 솟은 양쪽 뿔 산봉우리가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그 능선따라 삼국시대 이전 옛 골벌국 시대의 토성이 지금도 남아있다. 조선시대엔 그곳 토성안 분지에 서당을 세워 젊은이들이 학문을 연마하기도 했다.

 양각소 너머는 또 어디일까? 가래실(楸谷里)이다. 조선시대 서판서(徐判書)란 분이 피난처를 찾아 이곳에 정착, 큰 집을 짓고 둘레에 가래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데서 유래됐다. 정감록(鄭鑑錄)에서 3대 국란을 피할 길지로 꼽은 곳이며, 임란 구국영웅 권응수 장군이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11세에 아버지를 따라 인근 구마리(중리)로 이사한 사연이 있는 곳이다.

고향 이야기를 이리 늘어놓는 것은 우리들의 모든 고향이 다 이토록 오랜 스토리와 역사를 품고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고향 한 쪽 켠만 들여다 봐도 이토록 풍부한 이야기와 삶의 궤적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궤적들은 강과 산과 마을과 길과 골짜기들을 따라 우리 조국 방방곡곡에 땅이름(지명)으로 남아 마치 유전인자처럼 우리 기억에 가슴에 전해 오고 있다.

그것은 곧 우리 조국을 이루는 역사이자 신화이며, 전설이자 민속이며 민담으로 우리들의 오랜 자산이요 문화로서의 땅이름이다. 또 우리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우리들의 살아 온 맨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같은 땅이름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토대로 뼈대와 뿌리를 갖춘 족속이 되는 것이며, 뼈대와 뿌리로부터 끈 떨어지지 않은 국민이 되는 것이다.

뼈대와 뿌리로부터 끈 떨어지지 않은 국민이라야 세계시민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어디서 굴러 온 지도 모르는 떠돌이 같은 사람이 행신을 더럽게 할 때 ‘뿌리도 없는 놈’ 또는 ‘정체가 불분명한 놈’이라며 무시해 대우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기 역사와 문화, 자기 뼈대와 뿌리를 잊어버리는 국민은 세계시민사회에 나가서도 역할을 못하며 헤매다가 세계로부터 무시당할 수 있다. 자기 정체를 분명히 확립하고,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세계시민사회에 어울려 기여하는 국민이 되려면 그만큼 자기 것을 이해하고 정립하며, 지킬 줄 아는 민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기초토대는 바로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전해오는 땅이름들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그동안 산업화와 도시화, 또는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많이도 잊혀져 왔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더 본격적으로 우리들의 땅이름이 잊혀지고 사라져 갈 위기가 온 듯 보인다. 정부가 추진해 온 ‘새도로명 주소사업’이 그것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도로명 새주소가 시행될 경우 남한 전체에 약 4만개의 땅이름(지명)이 사라진다고 한다. 4만개...기자가 보기에 이것은 4만개가 아니라 그 몇 백 배의 개수에 해당하는 우리들의 문화적 세포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내 몸을 이루어 온 유전인자, 내 몸의 세포가 손상당한다는 것이다. 설령, 낡고 죽은 세포를 도려내고 새롭고 건강한 세포를 심는다는 단순 임상학적 시각으로 보더라도 이것은 위험하다.

지난달 27일 오후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새도로명 주소 전면 폐지를 촉구하는 토론회’는 이런 우려를 나타내는 모임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새주소 사업이 이나라 전체의 깊은  속살 문화와 역사를 말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수 천년 축적되어 온 지명과 동명중심의 풍성하고 구체적인 주소를 버리고,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주소를 만든 데 대한 성토의 목소리를 높인다.

옛 것에서 새 것을 찾는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이 있듯 지금이라도 새 주소를 추진하는 정부 당국은 기왕이면 그 땅이름과 그 오랜 마을을 기억하고 인식할 수 있는 주소체계를 다시 연구해 줬으면 한다. 그것은 곧 우리 몸에 가장 토착화된 세포, 그것에 토대하고 그것으로 창의하며 세계와 어울려야 할 우리들의 문화세포를 지키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