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일본속보]도쿄 속의 100년전 한국 史料들(2-1)
[이수경의 일본속보]도쿄 속의 100년전 한국 史料들(2-1)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 승인 2011.08.1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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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오쿠라 슈우코칸(集古館) 뜰에 놓여진 5층 석탑 및 한국 문화재들

11세기의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5층 석탑(경기도 이천군 정토사지)과 14세기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팔각 5층 석탑(평안남도 대동군 율리사지)등을 소유하고 있는 도쿄의 호텔 오쿠라 슈우코칸(集古館, 1917년에 세워진 일본 첫 사설 박물관)은 일본의 중심 관청가에 근접하고 있어서 국회의사당이나 수상 관저 등이 가깝고, 호텔 부근에 미국 대사관이나 스웨덴, 스페인 대사관 등이 인접하고 있어서 그 주변에는 경찰 기동대가 곳곳에 있다.

호텔 오쿠라 슈우코칸

슈우코칸 석탑 등의 문화재에 대해서는 몇 년 전에 호텔 오쿠라에서 열린 어느 파티에 갔을 때 알게 되었다. 그러다 한국 유학생이 문화재를 연구하겠다기에 슈우코칸 석탑과 필자가 예전에 근무했던 야마구치현립대학교의 [데라우치 문고의 문화재를 통한 대학 교류 사례]에 대해서 비교해 보라고 지도를 한 적이 있다.

이천 지역의 문화재 환수라는 입장에서 이천 망현산 5층 석탑이 부각되고 있지만, 슈우코칸 뜰에는 다른 한국 문화재도 꽤 있다. 그래서 재확인도 겸해서 마침 8월 5일, 궁내청 서릉부에 항일 의병장 사진을 열람하러 나갔다가 슈우코칸으로 향했다.

슈우코칸 건물은 호텔 본관 맞은 편에 있는데, 일본을 대표하는 신사 건축물인 메이지 신궁, 헤이안 신궁을 비롯해, 야스쿠니 신사 神門, 유슈칸 등의 신사, 사찰, 성당 등을 건축 설계한 이토 츄타(伊東忠太, 당시 도쿄제국대학 교수)의 건축물로, 상당히 독특하고 화려한 전시관이다.

무엇보다도 이토 츄타라면 1925년에 남산에 지었던 조선신궁의 건축가임을 잊을 수 없다. 그가 설계한 조선신궁은 당시의 시민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향해 참배를 강요당했던 건축물이다. 그러다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인 스스로가 해체 소각시켰고, 지금은 남산 공원으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슈우코칸은 일본 정부로부터 건물 자체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호텔 오쿠라 본관 맞은 편의 독특한 디자인과 붉은 색 사용의 건축물이라서 누구라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근대 일본의 재벌 기업가 건축 사업가로서 각종 유명 건축사업과 전쟁 군수산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 가 한반도나 중국 등지에서 가져 온 각종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고, 800엔을 지불하면 1층과 2층의 실내 전시물을 구경할 수 있다.

실내에는 주로 중국의 불상이나 일본 중세 근세의 중요 문화재 등이 설치되어 있고, 2층에는 일본식 퉁소를 서양의 플룻과 조합시켜 만든 오쿠라의 아들 기시치로(大倉喜七郞,1882-1963)의 오리지널 악기나 기모노,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2층 입구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왕족과 함께 어린 황태자 이은(나중에 이방자 여사와 결혼)이 타고 있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오쿠라 기시치로가 운전하는 사진도 있어서, 초대 일본 수상이자 한국의 첫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나 일본 왕족와의 교류도 잦았음을 엿볼 수가 있다.

슈우코칸 옥외 전시(한국에서는 방치라는 표현 사용)품은 총 40점이 되는데, 그 속에 평안남도의 고려 팔각 5층 석탑과 이천 망현산 5층 석탑을 포함하여 한국 문화재는 8점 이상이 된다. 우선 슈우코칸 입구에 들어서면 양 쪽으로 서 있는 금동옥녀입상이라 불리는 석조의 능묘를 장식하는 조각이 있다.

슈우코칸 입구 양쪽으로 조선 금동옥녀입상

 조선시대 문화재로, 평안남도 5층 석탑 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점의 한국 문화재는 전부 오쿠라 자택 정원에 뒀다가 호텔 건설 때 옮겨 온 것이다. 그 석상이 슈우코칸 방문자를 양쪽에서 맞이하고 있는데, 실내 전시장 보다는 옥외 정원을 둘러보는게 그 곳의 한국 문화재를 볼 수 있다.

입구 오른쪽 구석에 보면 오쿠라 기하치로의 거대한 좌상과 벤치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오면 옆에 앉아서 기념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 좌상 못 미쳐서 왼쪽에 능묘 수호상인 양의 모양을 한 석상이나 능묘 입구에 세우는 작은 석문이 있는데, 모두 조선시대 문화재들이다.

능묘를 장식하는 조선시대의 화표, 양의 석조

 왼쪽으로 돌아가서 슈우코칸 뒷 뜰로 가면 슈우코칸 쪽에 14세기에 만들어진 고려 불교를 상징하는 다중 팔각 석탑(평양 율리사 석탑)이 나타난다. 탑 꼭대기 부분은 결여되어 있다.

그 탑과 약 10미터 떨어진 곳에는 이번 3월 대지진으로 인해 모서리와 기단부 등이 파손되어서 더 이상의 파손을 막기 위한 가림막으로 보호를 해 놓고, 그 안에는 지랫대로 고정해 놓았기에 윗부분만 보였다. 이번 대지진은 물론, 이 글을 적는 오늘 미명에도 도쿄 주변은 지진으로 흔들리는 상황이라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현실이 있다.

평양 팔각 5층 석탑과 그 뒤로 보수중인 이천 5층 석탑,1933년에 중요미술품으로 등록

 그렇기에 이미 100년 가까운 과거에 가져 온 식민지 통치 시대의 문화재라고는 하지만, 한일관계의 미래 지향적인 앞날을 위한 신뢰 구축을 위해서라도 그 문화재 지역 주민들이 그토록 원하는 원래의 자리로 돌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어떤 정치적 사회적 상황으로 인하여 반출된 문화재라 할지언정, 지역 주민들로서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고향 땅을 벗어나게 만든 석탑에 대한 환수 책임이 있고, 더더구나 이천 5층 석탑의 경우는 원래 한 쌍의 석탑이었기에 더욱 더 반환에 대한 사명을 느끼는 것이다.

짝을 잃은 석탑이기에 시민들의 감정도 증폭되는 상황이다. 그렇게까지 간절한 시민들의 요구를 무시하면서까지, 고려 때 제작된 한국의 석탑을 소유하려는 욕심에 강경히 반환 거부를 하다가, 도쿄 지진이 심해져서 만약 그곳의 문화재들이 파손 된다면 그 보존 책임에 대한 향후의 많은 원망과 불신의 구조가 깊어질 뿐이다.

지진으로 훼손되어 보수중인 이천 5층석탑

 이번 동북 대지진으로 인해 4월달까지 국가 지정 문화재가 400건 이상 파괴되었다고 한다(일본 문화재청 공식 사이트 참조). 그렇다면 일본에 현존하는 약6만여점의 한국 문화재는 건재할까? 도쿄의 5층 석탑이 파손된 정도이니 어떤 상황일지 쉬이 짐작은 가는 바다. 그렇기에 잦은 지진의 도쿄이기에 시간과의 다툼이라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슈우코칸 자체를 유형문화재로 남기고 있기에 이해 타산의 경영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건물 및 문화재 유지 관리에 많이 힘든 상황일 것이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오후 3시를 넘은 시간 이었는데, 그 사이에 입장료를 지불하고 실내 전시관에 들어 온 방문객이라고는 세 사람 뿐이었다.

1-2층 에어컨과 방송 안내를 켜놓고 유지를 하면서 2명의 여직원을 고용하여 전시관을 지켜야 하는 것은 계산을 떠난 자존심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딘가 빛이 바랜듯한 분위기의 덩그러니 넓은 공간 속에 몇 점 없는 대규모 중국 목불상이나 근세의 요괴를 그린 두루마리 그림이 외롭게 느껴졌고, 밖의 뒷 뜰에 놓여진 한국 문화재나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문화재들도 땡볕 아래에서 퇴색해 가는 조형물 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