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의 시대적 혼란, '삐라'는 알고 있다
해방 전후의 시대적 혼란, '삐라'는 알고 있다
  • 김영찬기자
  • 승인 2011.08.1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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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 출간

해방 전후의 시대적 혼란, '삐라'는 알고 있다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 출간

[서울문화투데이 김영찬기자] 광복절을 앞두고 근대사적으로나 서지학 및 언론사적으로 의미있는 책 한 권이 발간됐다. '<삐라>'로 듣는 해방직후의 목소리(소명출판사)'가 바로 그 것이다.

▲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 김현식

 현재 대일광업(주) 전무이사인 김현식씨가 수십년에 걸쳐 직접 발로 뛰거나, 사들인 삐라들을 한 데 묶어 세상에 선보인 이 책은 광복전후의 정치, 사회상황을 연구하는 역사가와 정치학자에게, 그리고 당시의 출판물에 목말라하던 서지학 및 언론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자료들을 소롯이 담고 있다.

당시의 문헌이나 언론의 보도를 통해 추론해볼 수 있었던 해방전후의 상황들이 마치 방금 인쇄되어 나온 듯 '따끈따끈'하게 담고 있는 책 속의 '삐라'가 보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한다.

이달 13일 춘천 어린이회관앞 '철인반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역사와 문학, 대중가요, 만화, 서지학 및 언론을 연구하는 학계와 관계자들, 그리고 언론인들이 다수 참석했다. 참석자들의 면면이 다양함은 그만큼 이 책이 미칠 영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가 된다.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일왕 히로히토가 육성으로 전했지만 우리나라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린 국민은 많지 않았다. 지금처럼 휴대폰이나 TV 등과 같은 속보성 있는 언론매체도 없었고, 라디오의 보급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은 '입에서 입으로' 천천히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반도는 정치적, 행정적 공백과 깊어가는 좌우익의 이념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독립은 이뤘지만 정부가 없는 '공황 상태'가 이어지자 정체가 불분명한 정당과 비슷한 이름의 단체들이 생겨났고, 수십년간 억눌려있던 저마다의 목소리들이 여과없이 터져 나왔다. 그때 가장 많이 이용되고, 유용한 수단이 바로 '삐라'였다.

일본이 항복한 해방 당일에 조선헌병대사령부는 '내선관민(內鮮官民)에게 고함'이라는 벽보를 서울을 비롯한 지방 곳곳에 내붙였다. 그 내용은 사뭇 살벌하게 "조선인 가운데 조선이 독립한 것으로 생각하고 교통, 통신, 학교, 공장 등을 접수하려는 자가 있는데 이는 큰 오해이니 결코 이에 응해서는 안된다. 만약 강행하려는 자가 있으면 속히 군헌에 신고하라. 내선인은 장래에도 맹우가 될 것이니 서로 믿고, 선동이나 항쟁을 해서는 안된다(쉽게 풀어 씀)"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벽보에 대응해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선전국에서는 "시민여러분! 여러분의 대열 가운데 끼어 있는 민족반역자를 잡아냅시다. 이 대열 선두에, 또 바로 당신 앞에 선 저 자! 민족을 팔아 자신의 배를 채운 민족반역자를 소탕합시다!"라는 전단을 돌리며 일본의 앞잡이 색출을 독려하는 '삐라'를 뿌렸다.

국어사전은 '삐라'의 본뜻을 '전단, 광고, 포스터 등을 가리키는 영어 'bill'에서 나온 말이다. 단, 계산서를 가리킬 때는 원어대로 빌(bill)이라고 한다'고 정의하고, 바뀐 뜻으로 '벽에 붙이는 선전 광고지나 돌려주는 광고지로 전단(傳單) 또는 전단지의 잘못된 표기'로 정의내린다. 이런 '삐라'에는 성명서 또는 항의문까지 폭넓게 포함된 역사적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목소리를 그대로 담고 있고, 자세히 들여다 보면 때로는 자신의 주장을 침 튀기며, 혹은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까지 그대로 생생하게 담고 있을 때가 많다.

'삐라'로 듣는 해방직후의 목소리도 예외는 아니다. 해방기 자신들의 이익과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80여 개의 단체가 낸 이런 목소리 443개가 생생하게 담겼다. 살포 주체는 미-소 주둔군부터 대한독립당, 조선공산당, 민주학생돌격대, 자살동맹, 흑색청년연맹, 조선부녀총동맹, 철권대, 아세아탐정사, 흑색청년연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빛 바랜 종이 위에 문어체로 직접 쓰거나 등사된 글들은 당시의 격하고 절실한 주장과 정서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격' '격문' '급고' '경보'로 불리기도 하며 격정과 긴박함의 소용돌이 속에 뿌려졌을 이 '삐라' 속에는 당시의 정치적 열망과 상황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선언'에는 "친애하는 삼천만 동포여! 오랜 굴욕의 날, 압박과 착취의 긴 날은 끝나고, 자유와 해방의 화려한 날은 왔다. 우리의 거룩한 조국, 아름다운 산천, 자랑스러운 민족의 머리 위에, 현란한 자유의 광명은 비치었다"(1945년8월18일)라고 썼다. 그리고 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회본부 '환영회 취지서'는 "우리의 기다리고 바라던 날은 왔다. 굴욕과 압박에서 자유와 해방의 첫걸음을 걷게 된 우리의 감격과 환희는 표현할 말이 없다."(1945년8월)고 흥분해 마지 않는다.

삐라로 듣는 해방직후의 목소리 출판기념회가 지난 8월 13일 춘천에서 개최됐다. 삐라를 수집, 제공한 김현식씨가 출판기념회 인사말을 하고 있다.

 당시 뿌려지거나 벽에 나붙은 '삐라' 속에는 섬뜩하기까지 한 문구들도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실린 경우도 많다.

   "삼천만 대한전민족의 총궐기의 秋(추). 신탁통치 절대반대! 결사코 자유를 전취하자!! 살아서 노예가 되느니보다 죽어서 조국을 방호하라!!"(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성명서' 1945년12월28일)

"조선이 외국의 신탁관리를 당한다면 어느 누가 항쟁치 아니하랴? 그러나 조선민족을 일본제국주의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하여 주었으며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피투성이의 싸움을 하여온 연합국이 우리에게 압박과 노예화를 기도할 리가 있는가? 단연코 없다."(반파쇼공동투쟁경기도위원회 '파쇼분자의 반동적 책동을 분쇄하자!' 1946년 1월)
 
"보라! 천인이 공노할 역적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단말마적 암약과 도량을 인민대중을 기만하여 통일전선을 의식적으로 파괴하려는 매국적 정치 뿌로키. (중략) 이와 같이 정치와 경제가 매음적 결혼을 하여 민족통일전선과 자유독립전선을 지연교란하려는 민족적 최대의 적을 우리들은 이 이상 묵시할 수가 없다."(아세아탐정사 '성명서' 1946년 1월11일)

▲책의 해제를 쓴 정선태 교수가 인사말을 하는 모습

 이 외에도 이 책에는 3ㆍ1운동과 8ㆍ15해방 기념행사와 미ㆍ소공동위원회, 제주도 4ㆍ3 민중항쟁과 여수ㆍ순천사건 등 1948년까지 숨가쁜 사건들을 겪으며 쏟아진 목소리들도 생생하게 담겨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왜곡된 근대사가 바로잡힐 수도 있다는 기대도 크다.

어찌됐던 뜻있는 한 사람에 의해 모아진 '삐라'가 책으로 엮여 소개됐다. 약간은 생뚱스럽게도 그 주인공인 김현식씨가 현재 광산을 운영하는 사람이라 더욱 관심을 끈다. 옥으로 유명한 춘천 옥산가(대일광업주식회사)의 전무이사지만 대표인 어머니께서 연로하여 실질적으로는 그가 회사를 맡고 있다.

그는 출판기념회에 모인 많은 학자들 앞에서 또 하나의 엄청난(?) 약속을 했다. "여러분이 원하지만 구하기 어려운 자료가 있다면 언제든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돈으로 못 사면, 훔쳐서라도 구해드리겠습니다..."

진귀한 자료들이 더 많이, 빠른 시간 안에 모아져서 증보판이 나오는 시기가 빨라질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 조선건국동맹 성명서가 적힌 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