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발칙할 수 없는 양녕에 대한 새로운 해석!
더 이상 발칙할 수 없는 양녕에 대한 새로운 해석!
  • 김영찬기자
  • 승인 2011.08.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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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환장지경' 창자가 뒤집힐 정도로 전혀 다른 인물 등장

[서울문화투데이 김영찬기자] 제9회 옥랑희곡상 당선작 '환장지경'이 공연예술제작소 비상을 만나 2011년 8월 여름, 대학로에 다시금 새 바람을 일으킨다. 한국공연예술센터 공공지원 시리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창작기금 선정작으로 이번에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초연된다.

 

 

이 작품은 이미 연극,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을 통해 너무 많이 소개된 양녕대군의 이야기로 식상할 것이라는 모두의 우려를 뒤로 하고 홍석진 작가의 발칙한 상상력과 '처용의 노래', '위대한 신 브라운', '알파치노 카푸치노' 등 여러 작품을 통해 탄탄한 연출력과 젊은 감각으로 인정 받는 김정근 연출에 의해 우리가 알던 이야기와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로 태어났다.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욕망의 좌절에 또 좌절하는 이중적인 정서를 통해 왕의 자리를 잃은 양녕이 어떻게 헤쳐 나가는 지 생생하게 그리며, 권력을 중심에 둔 인간들의 흥미진진한 게임을 의미 있게 펼쳐놓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양녕대군은 폭군에 주색잡기를 일삼아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그 이후에도 복수를 위해 수양대군을 도와주며 단종을 죽게 한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야사에 의하면 충녕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폐세자 될 만한 행동들을 일삼아 동생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인물로 나와 있다. 한 인물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대비되는 만큼, 그 동안 TV, 드라마, 영화 속에서 양녕대군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소재이며,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만큼이나 많이 다뤄졌다. 그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용의 눈물'의 양녕(이민우)는 정치가 싫고, 아버지가 사람 죽이고 하는데 질려서, 아우님께 모든 걸 맡기고 미치광이 행세하며 궁을 떠난 것처럼 그려졌다. 또한 드라마 '대왕세종' 양녕(박상민)은 마치 현실 정치를 빗댄 것처럼 백성은 안중에도 없는 교만, 신료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독선, 측근만 감싸는 오만으로 가득 찬 세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연극 '환장지경'의 양녕대군은 다르다. 최고의 권력이 눈 앞에 있었고, 자기가 갖는 게 당연했던 양녕대군이 그것을 박탈당했을 때 과연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러면서 권력을 잃고 무너져가는 양녕대군의 모습을 통해 결국 권력자이기 전에 한 인간이고자 했던 양녕대군과 권력을 향한 인간의 허망한 욕구를 그려낸다.

연극 '환장지경'의 힘은 풍부한 연기경력을 가진 배우들에게 있다. 양녕대군 역의 김홍근은 제3회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차세대연기자선발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은 배우로 '처용의 노래'의 처용 역, '말해요, 찬드라'의 민성기 역 외에도 드라마 '신의 퀴즈', '아이리스' 등 연극과 드라마를 넘나들며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배우이다. 구종수 역의 정충구, 세자빈 역의 신서진은 양녕대군과 어리와 함께 극의 주축이 되는 인물로 극의 주인공인 양녕대군 역의 김홍근 배우 옆에서 함께 호흡하고 이끌어 주며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준다. 사극이라는 어려운 장르의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연기를 계속해 오고 있는 베테랑 배우들이 함께해서 연극의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다.

연극 '환장지경'은 사극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극은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역사책을 읽으며 상상해 왔던 거침없는 마초남 태종, 건강을 해칠 정도로 책을 좋아하던 성군 세종, 주색을 일삼던 양녕대군은 '환장지경'에 없다. 남들 앞에 서지도 못하는 겁쟁이 태종, 자신의 업적을 쌓기에 눈이 멀어 역사에 기록될 모습만 고민하는 세종, 앙녕의 귀양길에 따라간 구종수와 이오방, 동성애로 양녕에게 받은 무관심을 위로 받던 세자빈, 앙녕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주색을 일삼으며 흥청망청 사는 이오방 등 홍석진 작가의 발칙한 상상력을 통해 우리들은 우리의 상상보다 더 흥미로운 인물들이 살고 있는 조선시대로 떠나게 된다. 권력을 향한 그들의 욕망과 그에 따른 사건들 속에서 시종일관 무거운 사극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재미있는 사건들을 통해 곳곳에 숨어있는 웃음 포인트를 발견하면서 관객들은 퓨전사극의 재미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

제9회 옥랑희곡상에서 본심을 맡은 심사위원들은 주저없이 홍석진의 '환장지경'을 선택했다. "제목 '환장지경'이 의미하듯이, 창자가 뒤집힐 정도로 이 작품은 지금까지의 양녕대군 이야기하고는 전혀 다르다."라는 심사평처럼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양녕대군을 아예 몰랐던 사람처럼 새롭게 그리고 있다. 또한 극 중에서 왕이 되지 못한 양녕대군이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욕망의 좌절에 또 좌절하는 이중적인 정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다. 이 작품에는 관능적인 색채와 함께, 묘하게도 허무의 무채색이 있다. 일곱 가지 화려한 색채와 보이지 않는 무(無)색채, 이렇게 배합하는 능력은 매우 드물다. 무한한 상상력과 극을 이끌어 가는 힘이 있는 작가 홍석진, 연극계는 그의 작품을 기대하고 있다!

2007년 제9회 옥랑희곡상에 당선된 '환장지경'은 심사위원들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4년 동안 공연되지 못했다. 드디어 2011년 8월, 공연예술제작소 비상을 만나 아르코예술극장소극장에서 공연하게 된다. 공연예술제작소 비상은 창단작인 '처용의 노래'를 원작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새롭게 해석하여 주목을 받은 극단이다. 그런데 이번에 비상이 가장 자신 있는 장르인 역사 소재 창작극을 가지고 관객을 만나게 된다. 이번 공연을 통해 관객들은 가벼운 웃음만이 가득한 연극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작품성 있는 역사극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가능성이 있는 작품의 시작을 함께할 수 있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