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락(盤樂) 3인3색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반락(盤樂) 3인3색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김영찬기자
  • 승인 2011.08.2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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턴 테이블위의 유성기 음반, '지적 엔도르핀’이 돈다!

[서울문화투데이 김영찬기자] 반락이라니?
반락은 ‘음반을 즐긴다’는 의미로 만든 말이다. 반(盤)자는 ‘소반’을 뜻하는 말로 ‘그릇 명(皿)’과 ‘돌 반(般)’으로 이루어졌다. 턴테이블 위에 돌면서 저장한 소리를 돌이켜 내는 ‘음반(音盤)’에 쓰라고 미리 준비해둔 글자 같다. 이 적절한 ‘반(盤)’자에 ‘즐길 락(樂)’자를 붙여 반락하여 공연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사장 이세섭)은 한국문화의집에서 9월 7일(수)/9월 21일(수) / 10월 5일(수) 3일 동안 '반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올린다. 우리 음악 기록에 있어서 진정한 권위자인 이보형, 김호성, 박찬호 3인이 무대에 서서 ‘제 스스로 깊어진’ 소리와의 인연을 털어 놓으며, 권하고픈 명곡을 함께 감상하는 자리이다.

민속악과 궁중음악 그리고 근대 대중가요사까지 총 망라한 그야말로 한국음악역사의 산증인들이 차례로 지상 최대의 입담대결을 펼친다. 양념처럼 등장하는 명음반들과 유성기는 공연의 감칠맛을 한껏 살려준다. 작년에 처음 시도되어 열화와 같은 성원에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 2010 반락은 “이보형, 김호성, 박찬호의 2011 반락”의 맛보기이자 예고편에 불과하다.

9월일7(수) 반락의 첫 무대를 장식할 길잡이는 고음반 학자 이보형이다. 비밀정원으로 둘러싸인 공릉동 저택에 고이 숨겨진 보물들과 그에 얽힌 영웅담을 한국문화의집 무대에서 펼친다. 소박하지만 잘 가꿔진 정원을 지닌 공릉동 자택은 30년 동안 제 모습 그대로 고음반 자료를 머금은 신비한 보물창고다. 세상에 공개되는 때를 기다린, 발품 팔아 찾아낸 음반들과 소리에 얽힌 사연들은 공릉동 저택에서 한국문화의집 무대로 그대로 옮겨와 관객들을 새로운 인문학의 세계로 초대할 것이다.

2011 반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단순한 ‘레코드 감상회’를 넘어서 그가 발품으로 모은 무수한 음반과 자료들에 그의 생생한 증언이 더해져 관객들에게 고음반의 가치를 전하는 소중한 선물이 될 것임을 장담한다.

다음은 반락 출연진 공연 일정과 프로필이다

◆2011. 9. 7(수) 오후 8시 ‘반락, 이보형편: 공릉동 할아버지, 발품의 소리학’

이보형 : 1935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김매기 소리가 1년 내내 들리고 세시농악이 울려 퍼지던 바로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그 곳, 김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 석암 정경태로부터 시조창을 배웠고, 1960~1971까지 10년 넘게 연세대 나운영 교수로부터 서양작곡법을 배웠다. 70년대 중반부터 김명환에게 판소리 고법과 정권진에게는 직접 판소리까지 배우게 되었다. 음악 뿐만 아니라 오옥진에게 서각, 여원구에게 서예 및 전각, 최근에는 김영철에게 문인화까지 배우며 문화 다방면에 지식을 쌓게 된다. 이후 이혜구 선생의 역저 <한국음악연구>를 접하면서 본격적인 국악연구 민속악 연구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전국을 누비며 판소리, 굿, 민요, 농악 등 우리의 민속예술자료를 모으고 셀 수 없으리만큼 많은 논문과 보고서를 냈다. 전 문화재 전문위원을 역임하고, 지금까지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후학양성과 연구에 노력을 기울이며 현재 한국고음반연구회를 이끌고 있다. 前 문화재 전문위원을 역임했다.용을 입력해 주세요.

 

◆9. 21(수) 오후 8시 ‘반락, 김호성편: 반 세기 보고 들은 국악 50년’

김호성 : 1943년 충남 당진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중고등학교)에서 6년 동안 소위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당시 향피리, 대금, 단소, 민요, 판소리, 범패, 가곡, 무용까지 국악의 웬만한 분야는 모두 섭렵하여 우리음악의 기본기를 다졌다. 이후 이주환 선생(국립국악원 초대 원장)을 만나 대금잽이에서 성악으로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수제자로서 스승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평생 정가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된다. 성악분야 외에도 1965년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창단 초대 부지휘자를 역임하면서 국악관현악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후 국악보급진흥회를 창립하여 국악교육을 통한 대중화에 힘써왔다. 어릴 적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덕에 모은 박물관을 방불케할만한 자료들은 2009년 국립국악원 전통예술 아카이브에 기증되었다. 현재는 국립국악원 원로사범이자 국악방송 진행자로, 무형문화재 제 41호 가곡 전수소 소장으로 우리음악을 위해 활발히 활동 중이다.

 

◆10. 5(수) 오후 8시 ‘반락, 박찬호편: 인생 60년, 가요와 더불어 60년’

박찬호 : 1943년 일본 나고야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 2세이다. 1964년 와세다대학교 문학부 재학 중 재일한국학생동맹(한학동)에 가입했고 와세다 대학 졸업 후에는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명문대를 졸업하고서도 일본인 동기들처럼 번듯한 직장을 가질 수 없는 좌절을 맛보게 된다. 4·19혁명 이후 재일교포 사회에 고양된 민족의식에 공감해 한청(재일한국청년동맹) 운동, 김대중 구출 운동 등에 참여했고 다양한 조직, 단체에서 열정적으로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모국의 독재 권력은 재일교포 청년의 열정에 빨간 색을 칠해 버렸고, 오랫동안 그가 모국 땅을 밟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1977년 말부터 1984년까지 민족시보사에서 일하며 편집차장, 편집장을 역임했다. 2009년 부족한 한국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1894년부터 1980년까지 노래 2천 366곡, 음악인 2천 84명, SP음반, 당시의 공연현장을 담은 사진까지... 시대 속 가요를 총 망라한 책‘한국가요사’를 완간하였고 이를 계기로 대중가요사에 역사적인 인물로 재조명 되고 있다. 현재는 일본 나고야에 거주하며 잊혀져가는 대중음악의 고음반 자료를 계속 수집,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