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김현식 춘천옥산가 대일광업(주) 전무이사
[인터뷰]김현식 춘천옥산가 대일광업(주) 전무이사
  • 이은영 발행인
  • 승인 2011.09.0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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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상군처럼 식객 3천 거느린 사람이 되고 싶다”

 “이웃에게 베풀고 사는 것이 제 꿈입니다”
-삐라, 통속잡지, 고서화, 옹기수집 등으로 학자들에게 중요한 사료 제공
-잡지는 '잡'자 들어 있어 시대상과 서민의 삶 가장 다양하게 보여줘

김현식, 그는 참 독특한 사람이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대일광업주식회사 전무이사 김현식’이라 찍혀 있다. 그는 우리나라 유일한 옥광산인 ‘춘천옥’으로 널리 알려진 회사를 꾸리는 기업인이 틀림없다.(그는 어머니가 소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한 춘천옥광산의 실질적인 경영인이다.) 그는 그 일 외에도 근대서지학회 이사, 한국줄넘기협회 부회장, 프로축구 K3리그 춘천FC구단장, 잡지.삐라 수집가, 소설가, 박물관 준비 등으로 보통 사람은 엄두를 내기 힘든 분야까지 활동하고 있다.
  그는 최근 그동안 모은 삐라를 국민대 정선태 교수와 함께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책도 보통 책이 아니다. 사료적 가치로서도 뛰어나고 책의 스케일을 보더라도 ‘과연 그답다’라는 말이 나올법하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책 출간에 기여한 김 전무의 공로를 크게 평가한 것도 그저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는 인문학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뒷골목 문화에도 꽤 통달하고 있다. 이쪽인 것 같으면 저쪽이 있고 저쪽으로 치우쳤나 하고 보면 어느새 좌우 균형을 딱 잡고 있다. 그는 여느 학자 못지않게 독서량도 상당하다. 은근슬쩍 물었더니 일주일에 열 권 정도 읽는단다. 그는 사무실과 집을 나서면서도 책을 들고 다닌다. 그는 “문사철을 다 지니고 싶지만 일천해서 철학은 한다고 말할 수 없고 단지 문학과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낮춘다.
  그는 동심을 동경하고 어린 시절의 정서를 그리며 보듬고 산다. 그가 만든 철인반점 지하에 가면 깜짝 놀랄만한 일들이 펼쳐져 있다. 로봇장난감이 한 가득이기 때문이다. 창고에는 그보다 10배나 많은 양이 있다 한다. 왜 그럴까? 그는 어른이 돼서 잃어버리거나 잊고 있던 그 동심을 되살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로봇장난감 박물관도 만든다. 이동전시차량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아이들에게 재밌는 로봇들을 보여주고 500원 1000원의 싼 값에 사는 재미도 톡톡히 주고 싶어 한다.
  그는 물질적으로도 보통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행복한 남자다. 그 귀하다는 옥(玉)을 앞으로 2,000년 동안 캐낼 수 있는 광산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올 추석을 전후해 옹기박물관도 열 예정이다. '철인반점'이라는 이색 중국집도 열어 후배에게 운영을 맡겼다. 고 김수근 씨가 설계한 춘천 어린이회관을 수리하여 전국의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도록 하겠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그 뿐 아니다. 춘천시청소년축구단장을 맡아 강원도의 축구 발전을 위해 애씀은 물론 최근 공중파방송을 타며 관심을 끌고 있는 전국줄넘기협회 부회장으로 줄넘기 대중화에도 열심이다. 그는 고대정외과 재학시절 아이스하키 선수로도 활발히 활동했고, 현재도 마라톤과 검도를 즐기는 체육인이다.

이곳이 사무실이야? 서재 아니면 창고야?

  춘천 옥산가로 세인에게 더 잘 알려진 그의 사무실을 찾았더니 업무를 보는 사무실인지 서재인지 창고(?)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 오래된 책과 고가구, 옹기들이 세월의 무게를 얹어 켜켜이 쌓여 있다. 함께 사무실을 방문한 미술품 경매회사 (주)단의 김영복 대표이사가 사무실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오래된 서적들을 살펴보다가 화들짝 놀란다. 이유를 물었더니 자신도 본 적 없는 귀한 고서가 아무렇지 않게 나뒹굴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는 한 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진품명품'에 고정 출연해 고서, 고미술품, 서예작품 등의 진위 여부와 현재의 가치까지 알려주는 것으로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감정가다.
 김 전무는 이런 특이한 일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공식적으로 후원하는 여러 곳 외에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후원도 오랫동안 많은 단체와 개인에게 해왔다. 그는 “궁극적인 꿈이 맹산군처럼 식솔 3천을 거느리는 것”이라 한다. 그의 마음 씀씀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베풀며 사는 삶이 자신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그를 지난 13일 춘천옥산가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삐라...’ 책 출판회가 조촐하게 열린 철인반점까지 이어졌다. 다음은 김 전무와 일문일답이다.

 

▲ 대일광업주식회사 전무이사 김현식.뒷편으로 보이는 서가에는 그가 즐겨 읽는 책과 수집한 자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이번에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라는 책을 냈습니다. 삐라를 모으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책을 좋아해서 청계천에 책 사러 자주 갔는데 어느 날 책 속에서 우연히 '삐라'를 발견했어요. 읽어 보니 아주 흥미롭더군요. 후하게 값을 쳐줬더니 계속 연락이 와서 모으다 보니 거의 5백장 가까이 됐고, 귀한 사료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책으로 엮게 됐어요. 우리나라에서 언론자유가 가장 잘 보장됐던 시기가 해방직후인 그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 삐라에 나와 있는 인물들은 이미 역사 속에 묻혔지만 당시의 뜨거운 열정이 녹아 있는 것 같아 요즘도 자주 들여다보게 됩니다. 혹시 오래된 '삐라'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면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값은 후하게 치르겠습니다.”

-옹기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있습니다. 옹기와 특별한 인연이 있으셨는지요?
 “처음부터 옹기를 수집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사실 이것저것 수집하는 사람들을 보면 성공하는 사람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아요. 30여 년 전에 사정이 딱한 분이 저를 찾아와 부탁하기에 물건을 보지도 않고 구입해서 지하실에 넣어뒀었는데, 지하실을 정리하다 보니 갑자기 가슴에 와 닿지 뭡니까. 우리 광산에 공간이 있어서 추석 전에 개관하려 합니다. 30년 전에 20년 동안 모은 물건들을 샀죠. 제가 모은 거랑 합하면 100년을 모았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겁니다. 삼성 같은 큰 기업은 국보급 청자나 그림을 모아 리움미술관에 전시하고,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옹기를 모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이렇게 다 자기 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 인터뷰를 가진 이날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를 출간했다.

-옹기박물관 운영계획이 궁금합니다.
 “제가 근대서지학회지에서도 밝혔지만 옹기도록을 만든 이유는 한국 옹기대전을 10년 계획으로 해보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물건을 다 사서 할 수는 없어요. 소장자들에게 협조를 구해서 미국 전시회 할 때 반드시 영어 도록을, 북경 전시회에서는 중국어로 만든 도록을, 일본은 일어판 도록을 만들어 그들이 우리 옹기를 알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옹기는 미국에선 생소한 물건이죠. 가장 동양적이고 그들과 차별화 되는 것이 옹기라고 판단했습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세계인들에게 우리의 옹기를 다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좋은 옹기를 소장하고 계신 분들이 그 기간 동안 대여해 주시면 제 것과 함께 평창에서 전시회를 하고 싶어요.”

-평창 동계올림픽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옹기전시 외에 또 다른 계획은 없으신가요?
 “선수들에게 수여하는 메달 뒷면에 옥을 넣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대회 조직위원회에서 원한다면 저희가 생산하는 최상급의 옥을 무상으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휘장권 일부를 준다면 내가 수집한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한국적인 것을 전 세계에 보여 주고 싶습니다. 앞면은 조직위가 지정한 대로 제작해야 되지만 뒷면은 주최국이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북경 올림픽 때 금메달은 흰색, 은메달은 노란색, 동메달은 청색 옥을 넣었어요. 춘천옥으로 차별화된 메달을 만들고 싶습니다.”

 

▲ 김현식 전무이사 방에는 고서를 비롯해 잡지와 영화포스터들이 즐비하다.

 

-옛날 잡지를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통속잡지’가 주를 이루는데요?
“제가 모은 것들은 구한말에서 70년대까지 통속잡지들이 대부분입니다. 사실 잡지는 이미 잡스러운 것 ‘통속’이라는 말이 포함돼 있는데 거기에 굳이 통속을 붙인다는 것이 모순이 있고 비하하는 의미라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순수문예지가 아닌 잡지들을 수집한다고 뒤에서 욕하기도 했어요. 저는 오히려 그런 분들이 답답합니다. 잡지는 말 그대로 온갖 게 다 실려 있는, 말 그대로 '잡' 자가 들어 있잖아요. 당시의 시대상과, 그때 서민의 삶을 가장 다양하게 보여주는 게 잡지인 것 같아요. 처음부터 통속적인 잡지만 모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현대문학이랑 문학사상 이런 류의 문학지는 쉽게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잡지는 이사 갈 때도 다 챙겨 가지요. 그런데 선데이서울이나 아리랑 같은 잡지는 죄다 버리고 갑니다. 이러다간 통속잡지들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걱정이 되는 거예요. 나 혼자라도 모아 둬야겠다고 생각한 게 30년이 된 거죠. 이제는 통속잡지 창간호는 찾아 볼 수가 없지만 다행히 저는 갖고 있습니다. 통속잡지 창간호는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 김현식 전무 이사는 삐라, 통속잡지, 고서화, 옹기수집 등으로 학자들에게 중요한 사료로도 제공한다. 그의 뒷편으로 옛날 영화 포스터와 통속잡지 등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또 꾸리신 철인반점의 컨셉이 참 재미있어 보입니다
“철인은 아톰과 일본을 대표하는 캐릭터에요. 저희 세대가 철인 28호 세대죠. 한국에서 일본 캐릭터를 이용한 중국음식을 파는 집을 만들어 한국과 중국, 일본이 한 데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 수는 없을까 고민하다 철인반점을 냈습니다. 사실 춘천은 중국과도 밀접한 인연이 있습니다. 83년 중국민항기 불시착지가 이 곳 춘천이지요. 그때는 수교 전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 중국과 수교협상이 본격 착수됐죠. 중국인 주방장이 요리하고, 한국 사람이 서빙하고, 일본 관광객이 많이 와서 식사를 하니 의도대로 되고 있습니다. 쓰나미로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건이 발생해 일본은 물론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다음 달이면 일본의 피폭자 1진이 춘천을 방문합니다. 철인반점이 그들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 출판기념회가 열린 춘천 철인반점, 춘천시외버스터미너괄 춘천역에서 대중교통으로 5분 거리.

 

-사실 본업은 춘천 옥산가잖아요. 옥에 대한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우리가 생산하는 옥은 거의 전량, 정확히 99%를 중국으로 수출하고 있어요. 옥하면 중국이잖아요. 예전에 사업을 위해 중국을 방문할 때 에피소드입니다. 비행기 옆자리 앉은 사람이 "중국에 무슨 사업하러 가십니까?"하고 물어 보더라고요. 그래서 "옥 때문에 간다."고 대답했더니 "옥 사려고요?"하고 반문하기에 "아뇨, 옥 팔러 갑니다" 그랬지요. 저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더군요. 옥 하면 중국인데 중국에 옥을 팔러 간다니 그 분이 이해가 안 된 거죠. 중국은 5,000년 동안 옥을 캤기 때문에 옥이 고갈되고 없습니다. 저는 세계 옥문화의 중심이라는 중국에 우리의 옥을 수출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옥들은 모두 중국에서 온 겁니다. 사신이 인삼을 주고 대신 옥을 받아 온 거죠. 신라시대 금관에도 옥이 들어가 있는데, 그 옥도 중국에서 들어온 것들입니다.”

-옥이 왜 좋습니까? 또 어떤 옥이 좋은 옥인가요?
 “중국 문헌을 보면 옥은 기를 모아주는 안테나 역할을 한다고 해요. 기 수련하는 분들에게 들어 보니 기 수련이 기가 배꼽 이상 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는 훈련이라는데 옥이 기를 눌러준다고 했습니다. 중국 문자로 임금 왕(王)자에 점 하나 찍은 게 옥(玉)이잖아요. 춘향전에 보면 백옥 같은 피부에 앵두 같은 입술이라고 하죠. 뽀얗고 윤기 나는, 흰색의 옥이 좋은 옥입니다. 중국인들은 양지옥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말에도 옥자가 들어가면 최상급이 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중에 옥석, 절차탁마, 타산지석과 같은 단어들이 옥과 관계되는 말입니다. 옥동자, 옥황상제, 양귀비 본명이 옥한이고, 예쁜 어깨는 옥견이라고 해요. 옥자만 붙이면 최상급 형용사가 됩니다. 앞으로 옥을 활용해 ‘옥김치’를 만들어 보려고 준비 중입니다. 옥김치가 중국과 일본에서 많이 팔리면 우리 농산물 수출도 하고, 일자리도 늘릴 수 있고, 우리 음식도 널리 알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평탄한 삶을 사신 것 같은데, 실패나 좌절을 겪은 일은 없으셨을 것 같은데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도박에 빠져서 패가망신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어요. 경영에서 밀려나 서울 남가좌동 반 지하방에서 무려 5년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때 나를 지탱해준 친구들이 청계천 책방 친구들이었습니다. 당시엔 청계천을 오가며 인터넷에 모아둔 고서를 올려서 팔기도 하면서 살았어요. 2006년도에 경영 일선으로 돌아왔는데 세금이 30억 원, 직원 봉급도 석 달이나 밀려 있더라구요.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만에 워크아웃 졸업했습니다. 그때부터 여행을 다니며 팔아먹은 수집품도 도로 다시 샀습니다. 하나 뿐인 아들도 가슴에 묻었습니다. 어머니도 연로하시고 당장 후계자를 키우지도 못했고, 그래서 기업 이익을 사회로 돌려줄 수 있는 재단을 만들려 합니다.”

▲ 옥산가 김현식 전무이사는 "이웃에게 베풀고 사는 것이 제 꿈이며","맹산군처럼 식객 3천 거느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전했다.

-앞으로 또 어떤 꿈을 꾸시는지요?
 “식객 3천을 거느리는 맹상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 현재 어림잡아 1천5백 명 정도의 식객은 거느리고 있는 것 같은데 배로 늘리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옥 김치가 대박 나면 만 명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요?(웃음) 암튼 베풀며 사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 철인 반점 지하 1층에 마련된 철인 28호와 아톰 로봇트 태권V 장난감이 전시돼 지난날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모든 이에게 있다는 희노애락은 모든 것을 가진, 남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김현식 전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특이한 인물이다. 사업이 탄탄대로여서 조금은 쉬어 가며 일해도 될 것 같은데 보통사람보다 10배는 더 바쁘다. 까닭에 인터뷰를 마치며 제발 몸 생각도 좀 하시라는 부탁을 드렸다. 건강해야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고, 그 덕에 우리 아이들이 훌륭한 자료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될 것 같아서다. 중국과 일본에서 옥김치가 대박이 나고, 2018년 평창에서 옥으로 만든 메달이 땀 흘린 선수들에게 수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