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대정 돌하르방이 수호신인, '추사유적지'
제주 대정 돌하르방이 수호신인, '추사유적지'
  • 홍경찬 기자
  • 승인 2011.09.0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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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그의 추사체 마침표 찍은 제주 추사유적지

[서울문화투데이 홍경찬 기자]제주 3대문화권의 발상지는 제주목(제주시), 정의현(성읍리) 그리고 대정현(대정읍)이다. 이 대정마을에 자리 잡은 추사유적지(추사 秋史 김정희 1786~1856)는 제주 유배 문화의 본향이고 우리나라 미술사의 큰 맥이 서려 있는 문화유적지이다. 

▲ 추사 김정희 흉상(임옥상 작)

 제주도는 그의 유배지를 복원하고 그 지척에 지난해 2010년 5월 추사유적지를 건립했다. 8월의 끝자락에 찾은 추사유적지는 화창한 날씨처럼 높고 푸른 그의 학문적 업적이 웅장하게 숨 쉬고 있었다.

 대정골 돌하르방이 추사유적지를 보고 우뚝 서서 그곳을 유구하게 감싸며 지키고 있다.

 추사유적지는 들어가고 내려가는 계단부터 시선을 끌었고 2010년 제주특별자치도 건축문화대상을 수상했다는 표시가 눈에 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기증한 ‘시경루’ 등 그가 남긴 편지와 시와 글들이 오롯이 남아 있고 2층에는 임옥상 화백이 제작한 추사 흉상이 반갑게 맞아 주고 있다.

 2층에서 돌아나가 관람할 수 있는 강도순의 초가집은 위리안치를 당한 추사의 그 당시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곳 한 평 남짓한 방안에서 9년간 유배생활을 한 그는 세한도(국보 180호)를 비롯한 걸작들을 남겼다.  [위리안치: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 추사가 9년간 제주에서 위리안치 당한 유배지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일생을 말하며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유배로 온갖 풍상을 겪었고,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하면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기록됐다.

 그는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밝혔듯이 "나는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며 치열한 그 인고의 산물들이 고스란히 전했다. 그의 학문과 예술의 경지가 후세에도 칭송받아야만하는 이유가 들어맞는다.

 현재 350여 통 정도 남아있는 그의 편지 중 제주에서 쓴 것이 많다. 제주에서 추사의 편지는 학문과 예술, 삶의 기쁨과 슬픔이 교류하며 바다를 건너는 위대한 업적들이다. 그는 박제가, 정약용, 권돈인, 조인영, 이상적, 이하응, 허련과 같은 지인과 후학 등 다양한 이들과 소통하며 유배지에서도 세계를 꿰뚫어 본, 그 시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또 차를 좋아해 초의선사와 돈득한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의 학문의 길은 '사실에 근거해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실사구시. '옛것을 들어가 새롭게 나간다'는 입고출신을 지향한다는, 추사유적지 안내글이 그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제주 유배를 통해서 둥글어졌고 고개 숙일 줄 아는 세상이치를 터득한 진정한 천재이자 대가였다.

▲ 추사관 내부에 있는 봉은사 판전, 그의 절필이다

  1856년 그의 나이 71세에 봉은사 ‘판전’(板殿)이 그의 절필이다. 이 글을 쓰고 사흘 후에 세상을 떠났다. 추사유적지 넓은 전시실에 그의 판전이 떡하니 자리잡고 관람객을 부르고 있다.

▲ 추사유적지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대정 돌하르방
▲ 추사관 입구, 들어가는 계단이 독특하다
▲ 추사관 뒤로 보이는 추사 김정희 유배지, 제주 대정읍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