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열전-27] 김동원
[배우열전-27] 김동원
  • 김은균 공연전문기자
  • 승인 2011.09.1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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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서 누린 축복의 인생 - 김동원

문단에서 ‘북에는 소월(素月)이 있고 남에는 목월(木月)이 있다’고 하듯이 배우로는 ‘북에는 황철 그리고 남에는 김동원이 있다.’ 연극담당기자로서 가장 처음 맡은 프로젝트가 <체험적 연기론>이었고 그 첫 번째가 김동원 선생이셨다. 당시는 93년 <이성계의 부동산>이후 국립극단에서 은퇴를 하시고 동부이촌동에서 사모님과 오순도순 사실 때였는데 아직도 평화롭게 햇살이 젖어드는 거실의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연기는 ‘배우의 삶에서 우러러 나온다’는 선생의 신념대로 평생을 신앙인으로서 연극배우로서 올곧게 사셨고 아카시아 향기 날리던 2006년 5월에 소천(召天)하시었다. 다음은 당시 선생께서 생존하셨을 때의 인터뷰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 피난지 대구에서 초연된 신협의 <햄릿>에 출연하신 김동원 선생님 (왼쪽에서 세 번째)

▉ 선생님 건강해 보이십니다. 정말이지 혈색이 참 좋으십니다.
  응, 다들 그래. 젊어 보인다고. 보름 전인가 아파트 어디에선가 뒤로 넘어져서 의식을 잃었어. 그래 깨 보니 병원 응급실이데. 가족들이 모두들 와 있더라고. 누가 날 발견하고 이쪽으로 데려다 놓았는데 누군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참 고마운 일이더군. 그리고 갑자기 의식을 잃을 정도였는데 뭘 잡고 넘어 졌었는지 머리가 멀쩡해.
정말이지 Timing이 참 절묘해. 

▉ 요즈음 근황은 어떠하신지요?
  그냥 의사가 자주 걸어 다녀야 한다고 해서 주로 산보를 많이 하고, 그리고 소식을 해야 된다고 해서 조금씩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지. 웬만한 것 빼고는 다 좋아. 감사한 일이지.

▉ 93년 이성계의 부동산 이후로 은퇴를 하셨는데요. 그 후에는 어떻게  지내 오셨는지요?
  은퇴하고 나서 가급적 안 나갔어. 괜히 나가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그렇잖아? 그냥 주일이면 예배 참석하고 가끔씩 고맙게도 방문하면 그때야 사람 만나고 뭐 그렇지. 간혹 아이들이 찾아 와 주기도 하고 말야.

▉ 특별히 연극계에선 이해랑 선생님과의 우정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해랑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내가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이 열아홉 살이 되던 해였어. 우리가 만난 건 일본대학 예술학부에서 일이지. 그때 이해랑, 이진순이 동기였고, 과는 달랐지만 이원경 씨가 미술대학 소속이었지. 1934년 7월에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국 청년 문화인들의 모임인 동경학생 예술좌(藝術座)가 창립되었거든.  신극 운동을 표방했었는데, 보다 깊은 뜻은 조선인 학생들의 정신적 지주를 찾기 위한 민족의식이 먼저였지. 법정대 출신의 주영섭 선배를 중심으로 김정호, 장계원, 마완영, 윤형원, 김병기, 황순원, 그리고 신입생인 나를 포함한 10여 명이 창립 동인이었고, 유치진 선생이 고문격으로 지원을 하셨지. 동경학생 예술좌가 창립되던 해 가을 유치진 선생의 <소>가 동경의 쓰기지(築地) 소극장에서 올려졌었지. 신극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토월회까지 올라가지. 이 때 창립 공연으로 오른 <소>야말로 본격적인 의미의 신극의 효시였다고 생각해. 난 이때 둘째 아들인 개똥이 역할을 했었지. 이후 2회 공연으로 <춘향전>을 했었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오늘 날 내 개인적으로 연기자의 출발점이 된 작품이라고 생각해. 아마 지금까지 춘향전의 대사만큼은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외울 수가 있거든. 이 때 상대역 춘향으로 훗날 극작가인 오화섭의 부인이 된 미모의 박노경 씨가 열연을 했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서 평생 지우(知友)인 해랑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지.  해랑과 나는 동갑나기의 연극 동지로 비록 부모는 다르나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야. 내가 다소 순탄한 성장기를 보냈다면 해랑은 유년기부터 다소 기복이 심했던 편이고, 같은 일본대학 예술과에서도 결국 나보다 한 해 늦게 졸업을 하기도 했지. <춘향전>은 비록 학생 무대이지만 우리 신극사에 기억될 만한 좋은 공연이었어. 연기는 물론이고 분장이고 장치 등 모든 것이 수준급 이였다니까.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효과음을 오케스트라의 생음(生音)으로 대체한 사건인데, 이를 위해 박용구, 함태환, 한상기 등 동경 유학생들이 총동원 됐는데 영문학도이던 오화섭 씨도 이 때 비장의 테너색소폰 연주를 하였어. 아마 내 추측이기는 하지만 동경 학생예술좌의 히로인이었던 박노경 씨가 훗날 그의 아내가 된 것도 그 흐느끼는 색소폰 연주 덕분이 아닌가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