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서울역사', 그의 손길로 되살아나고 미래를 향한다
[인터뷰-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서울역사', 그의 손길로 되살아나고 미래를 향한다
  • 이은영 편집국장 / 정리 윤다함 기자
  • 승인 2011.09.2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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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과 서울사람의 삶'에 주목

 

 우리 사회에는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비해 크게 조명 받지 못하는 사례들이 있다. 강 관장도 그런 케이스 중의 한사람일 듯하다. 서울대와 하버드 MIT 박사 취득의 엘리트 학력은 제외하더라도 그가 도시, 특히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애정이 인문 사회학적으로 바탕이 된 도시를 계획한 그의 그간의 성과는 서울시 부시장과 역사박물관장을 지낸 것으로 묻혀버리기에는 참으로 아깝고 국가적으로도 손실이 아닐까 싶다.

 그는 현재 책임을 맡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을 입안한 것을 비롯 올림픽공원과 상계신시가지를 기본 설계했고, 안기부와 수방사를 내보내고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을 주관했다. ‘정도 600년 사업’의 기획, 가회동, 인사동 등 역사문화환경의 보전, 미술관과 박물관의 창설, 서울학연구소와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설립, 국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의 창설, 그리고 난지도쓰레기장을 생태공원으로 탈바꿈 시킨 월드컵공원 조성, 세계에서 벤치마킹하는 디지털미디어시티(DMC)의 입안과 착수 등 여러 가지 일들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야말로 서울의 하드웨어 정비와 콘텐츠를 담은 소프트 도시로의 전환을 앞당기는 데 앞장서 왔다.

 그 중심에는 역사와 문화, 사람이 있는 도시를 창조하는 그의 기본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또 우리나라 도시 계획 전문가로 현재의 세종시 모태격인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행정수도 이전 계획 밑그림을 그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가끔씩 서울이 잘못 개발돼 가는 것에도 쓴 소리를 한마디씩 한다. 뉴타운 사업은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라고 비판했고, 요사이 한옥이 각광을 받으니 사람이 살아야 할 한옥이 수집가들의 ‘수집아이템’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어린 시절 강 관장은 그림을 좋아해 중 고교생 때 미술반 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건축가 르 꼬르뷔제의 사진집을 보고 건축에 매료돼 서울대 공대 건축과에 들어간다. 하지만 대학 시절에도 전공인 공대보다 문리대 강의실을 더 자주 찾았다고 한다. 문학과 미학, 역사 등에 열중했다고 할 정도로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의 DNA 속에 잠재돼 있는 예술성의 기질이 작동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강 관장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면 그 면면에 참으로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외증조부는 구한말 조양의숙을 세워 농촌 젊은이들의 교육에 앞장섰던 황해도 봉산의 지주이자 독립 운동가였다. 외할아버지 이종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형 출판사인 한성도서주식회사 설립을 주도한 인물이다. 한성도서는 심훈의 '상록수',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 김동환의 '국경의 밤',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등 당대 문학가들의 저서를 출간했다. 고향인 황해도 봉산으로 낙향한 뒤에는 봉산농사학교를 세워 여생을 농촌계몽에 헌신했다. 이광수 소설 '흙'에 등장하는 주인공 허숭의 실제모델이 이종준이다.

 원효 연구로 일가를 이룬 이기영(李箕永)과 분석심리학의 대가인 이부영(李符永)의 조카이자 한국 알레르기학계의 명의로 이름을 날린 강석영(姜晳榮) 서울대 의대 교수의 아들이자 화가인 친할아버지와 삼촌을 둔 강홍빈 관장. 도시전문가이자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의 수장을 맡고 있는 그의 도시와 삶의 이야기가 참 궁금하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도시전문가로서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지금 서울역사박물관은 도시박물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있고, 바로 그런 까닭에 자원해서 여기로 오게 됐다. 60년대 중엽, 건축학도였던 나는 MIT 박사논문에서 다루기도 했던 패트릭 게데스(Patrick Geddes)의 책을 읽고 도시에 눈을 떴다. 게데스가 필생의 일로 펼친 것이 에딘버러에 최초의 도시박물관을 만들고, 인류문명과 도시의 출현, ‘진화’에 대한 전시를 만들어 세계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도시가 문명의 요람이라고 한다면, 도시를 탐구하고 그 성과를 전시와 교육으로 나누는 도시박물관이야말로 도시학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강홍빈 관장

 -다른 박물관들과 서울역사박물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어떻게 차별화하려 하는가?
 "세 가지 점에서 서울역사박물관은 여타 다른 박물관들과 구별되고 있고, 또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서울역사박물관은 고고학박물관도, 미술관도, 문화박물관도 아닌 도시박물관이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우리 박물관의 주제이자 대상이며 목표 가치이다. 서울이라는 총체, 서울을 구성하는 장소, 서울에서 살아가며 서울을 살아있는 도시로 만드는 서울사람의 삶과 그 성과, 이런 것들이 서울역사박물관이 다루어야 할 영역이다. 여기에서 서울역사박물관과 중앙박물관, 민속박물관은 구별된다.
 둘째,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600년의 역사를 다룬다. 급 성장기를 거쳐 오늘날 세계도시로 자라난 서울의 모든 역사적인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 우리 박물관이 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한성백제박물관과 차별화된다. 
 셋째,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을 총체적으로 다루되 특히 생활사에 주목한다. 도시를 만들고 변화시키는 주역은 결국 도시에서 일하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다. 따라서 서울역사박물관은 특별한 사람들, 특별한 성취, 특별한 사건만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일상사에 주목해야 한다. 고궁과 한옥뿐만이 아니라 동대문시장, 창신동, 변두리 지역, 달동네가 모두 서울역사박물관이 관심을 가지고 다루어야 할 주제들이다."

-그동안의 성취는?
 2009년 5월, 내가 서울역사박물관장으로 취임한 이래 박물관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상설전시관을 3년에 걸쳐 전면 업그레이드 하고 있는 중이고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보이는 모형영상관을 개관했고, 지금 한참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의 서울부분을 연내 개관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한성시대 부분도 전면개편하고 있는 중이다. 또 기획전의 내용과 빈도도 모두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전시주제는 철저하게 서울의 도시 상에 초점을 맞추고 단순한 유물전시에서 탈피해 역동적인 연출기법을 도입했다. 예컨대, 전시와 퍼포먼스의 결합이다. 그리고 런던, 모스코바 (이번 달 말에는 프라하) 등과의 교류전을 고정 프로그램화해서 박물관을 도시교류의 창구로 정착시켰다.

 교육활동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그간 취약하던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이 대폭 확대되었고, 외국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또한 대폭 확대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내외 환경을 ‘박물관’답게 만들려는 노력 역시 결실을 맺고 있는 중이다. 콘크리트 광화문, 전차, 시전유구, 운현궁 석물들을 배치했고 곧 보신각의 주춧돌을 가져와 거울연못 옆에 설치할 예정이다. 행정 시스템은 보다 정교화, 조직화시켰다. 그 결과 지난해에 처음으로 관람객 100만 명을 기록했고 책임운영기관 경영평가에서 1위를 달성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100년 뒤 서울역사박물관은 어떻게 변화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지, 어떻게 변해 있기를 바라는지?
 "글쎄... 아무리 내가 역사를 공부하고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와있다 해도 한 세기 뒤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러나 기억이 개인과 사회 정체성의 원천으로 남아있는 이상, 그리고 형체 없는 기억이 형체 있는 물건을 통해 저장되고 되살려지는 이상, 박물관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해도 도시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강화될 것이다. 한국의 중심, 서울의 미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도시 서울에 대한 기억의 총저장고이자 서울 정체성의 보루인 서울역사박물관은 시간이 흐른다고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관장으로 일하면서 힘들었던 일, 시행착오, 에피소드가 있다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 자원해서 박물관에 온데다가, 오랜 일의 경험으로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힘들었던 일은 없었다. 해야 할 일을 놓고 보면 예산은 물론 다다익선이지만, 시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정된 예산을 균형 있고 계획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굳이 한 가지를 들라면 박물관을 시정의 홍보공간으로 활용하려는 시의 생각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이 역시 좋은 뜻으로 이해하면 적절한 선에서 수용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점을 두고 있는 사업과 향후 추진하고픈 일은?
 "2012년까지 ‘서울역사박물관 재탄생계획’을 차질 없이 완성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다. 또 해외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서울이 세계와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시간과 장소, ‘정동 1900’을 주제로 전시와 국제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재탄생계획’이 마무리되는 내년 중반기까지 박물관의 모든 분야에서 재탄생계획 완성 이후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로드맵을 짜고 있고, 이와 함께 박물관 구성원의 학예역량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을 도입, 추진할 계획이다."

▲서울살이의 지난했던 삶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청계천 봉제공장 모습을 재현한 공간을 강 관장은 좋아한다.

-서울시 부시장, 시정개발연구원장, 서울학연구소장 등을 지내면서 서울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다. 그동안 해왔던 대표적인 사업은 무엇인가?
 "도시설계가로서, 서울시의 도시정책담당자와 제1부시장으로서, 그리고 강단에 선 도시․이론․역사가로서 나의 역할은 서울의 하드웨어 정비를 마무리하고 소프트 도시로의 전환을 앞당기는 것이었다. 서울시에 합류하기 전에 올림픽공원과 상계신시가지를 기본 설계했고, 서울시에 들어가서는 안기부와 수방사를 내보내고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을 주관했다. 2002년 고건시장의 문화정책 기틀로 되살아난 ‘정도 600년 사업’의 기획, 가회동, 인사동 등 역사문화환경의 보전, 미술관과 박물관의 창설, 서울학연구소와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설립, 국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의 창설, 그리고 쓰레기장을 생태공원으로 탈바꿈 시킨 월드컵 공원의 조성, 세계에서 벤치마킹하는 디지털미디어시티(DMC)의 입안과 착수 등 여러 가지 일들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내 아들과 며느리의 연애시절 (지금은 하나 반이지만.(웃음)) 주로 데이트하던 곳이 두 군데였는데 하나는 며느리 집이 가까운 올림픽 공원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월드컵 공원이었다고 한다. 한강 상하류의 두 큰 공원, 각기 개발시대와 탈개발시대를 대표하는 시설들의 기틀을 다 내가 만들었다는 데에 큰 보람을 느낀다."

강 관장은 이런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상징을 보여줬다. 직원들이 퇴임할 때 만들어준 상패였다. 강 관장은 상패를 보고 이만하면 공무원들이 잘 만들지 않았느냐며 자랑했다. 자신이 해왔던 일을 윗사람보다도 부하직원들이 인정해 준 것을 더욱 큰 의미로 꼽았다.

-서울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보는지? 
 "서울의 원형이 지닌 고유한 특징은 자연과 인공이 하나로 조화된 도시 형태에 있다. 서울처럼 자연과 인공이 마치 손에 꼭 맞는 장갑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도시는 어디에도 없다. 옛 서울을 둘러싼 네 산들, 한강과 한강에 이르는 지천들이 서울의 골격을 구성하고 그 질서에 기대어 궁궐과 주요 관서와 도성과 길들을 놓았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문화를 생각할 여유가 없던 시절에 대량생산 식으로 건설된 신흥도시라 건물과 거리에 섬세함과 문화적 향취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나 나는 여기에서도 나름대로의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작년에 박물관에서 서울과 북경과 동경을 비교하는 전시회를 개최하면서도 분명하게 들어났지만, 서울의 원형이 지닌 고유한 특징은 자연과 인공이 하나로 조화된 도시형태에 있다. 서울처럼 자연과 인공이 마치 손과 장갑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도시는 어디에도 없다. 옛 서울을 둘러싼 네 산들, 한강과 한강에 이르는 지천들, 이들이 서울의 골격을 구성하고 그 질서에 기대어 궁궐과 주요 관서와 도성과 길들을 놓았다. 서울이 지닌 이런 자연친화적인 공간질서와 경관은 그 뒤 근대화와 개발시대를 거치면서 많이 파괴되었지만 아직도 서울, 특히 강북 지역의 특징으로 남아있다. 이 특별한 유산이 더 이상 파괴되지 않도록 잘 지키고 유지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시대의 진취성이랄지 역동성이랄지, 그리고 전래의 계층질서가 무너진 속에서 형성된 나름대로의 다원성과 여러 요소들의 혼재, 이런 것이 역설적으로 서울에 독특한 특징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게 결국 자화상에 대한 이야기인데, 내가 험한 시대를 살아 오늘날의 내 얼굴에 흉터가 있고, 피부에 충분한 영양(웃음)이 없다 해서 내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급성장을 하면서도 그대로 유지되는 곳은 없다. 서울은 성공적으로 그 위험한 시기를 넘겼고 견뎌낸 그 자체로 거기에서 가치와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아쉬운 점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우리가 하나하나 억지로 뜯어내서 아름답게 꾸며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못생긴 것 같아도 찌그러진 건물도 나름의 멋이 있고 오히려 이런 것들이 외국인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잘 보면 우리에게도 참 좋은 동네가 많다.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꾸 치장하려 하고 없애고 있는데 나는 그런 게 참 안타깝게 여겨진다.
 한옥촌도 좋긴 한데 아쉬운 게 하나 있다. 요즘 한옥촌은 ‘가구촌’으로 전락했다. 한옥이 사람이 들어가 사는 집이지 돈 많은 사람들의 수집 아이템은 아니지 않은가?"

그에게 서울은 어떤 의미일까? 서울을 바라보고, 들여다보고, 가꿔온 그에게 서울이란 자신의 삶과 인생 그 자체다. 그런 만큼 서울이 잘못돼 가는 것은 자신의 일부분이 상처나고 아픈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박물관 은퇴 후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나 분야가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해온 일이 계획, 기획이었지만 정작 제 인생에 대해서는 그다지 계획적이지 못한 편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하고 미리 정하고 그렇게 따르기 보다는 그 때 그 때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은퇴 이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세워 논 계획은 아직 없다. 다만 은퇴하면 그동안 미뤄뒀던 글들을 좀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선배, 동료, 후배와 비교하면 나는 어쩌다가 유독 다양한 위치에서 도시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하며 일하고 가르치는 행운을 누렸다.

 서 있는 자리도 다양했지만, 공부에서도 인문, 사회, 공학, 예술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생각, 공부, 경험이 얼마간 후학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고 난 후에도 시간이 허락하면 공대를 가면서 접어둔 그림을 다시 해보고 싶다. 그리고 피아노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싶다. 플루트 연습도 빼놓고 싶지 않다. 그러고도 여유가 있으면 요리를 배울까 한다. 내가 한 요리를 식구들, 손자들과 함께 먹을 생각을 하면 생각만으로도 아주 흐뭇해진다.(웃음)"

▲개발시대의 불도저식 개발은 더 이상 안된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전시된 포크레인. '돌격 건설'문구가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가족들을 위해 가끔 요리를 하나?
 "토요일은 내가 요리하는 날이다. 주로 하는 요리는 집사람이 주문하는 ‘알리오올리오’(스파게티)와 해물 등 스파게티 종류다. 중국 요리를 좀 해보고 싶은데 우리나라 주방이 불을 일으키며하는 중국요리를 하기 곤란해서 아쉽다.(웃음)"

-그림 얘기가 나왔으니 어머니 얘기가 궁금하다. 70대에 책도 내시고 화단에 입문하셔서 작품들을 아름다운가게에 기증하셨다. 어린시절 그림을 좋아하고 잘 했던 그런 재능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아닌가?
 "사실 어머니쪽 보다 친가쪽의 영향이 더 컸던 것 같다. 할아버지께서 당시 좀 이름있는 화가였고 삼촌 또한 화가로서 남겨진 그림을 보면 상당한 실력을 갖췄던 것 같다. 어머니는 사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조각보가 참 훌륭하시다. 주변에서 전시회를 하시라고 해도 고사를 하신다. 사실 내가 입고 있는 이 옷도 어머님이 손수 만들어 주신거다."

-삶의 철학은 무엇인가?
 "사상이 세상을 보는 안경이라면, 그 안경을 통해 보는 세상은 훨씬 더 거대하고 ‘리얼’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패트릭 게데스를 빌려 말하자면, 대단히 다양한 사상을 섭렵하고 방대한 주장을 펼쳤던 그였지만 그의 모토는 ‘삶을 통해서 배운다’ <vivendo discimus>였다. 머리 속의 세계가 아니라 일상의 삶, 그리고 일상의 세계와 몸으로 부딪치면서 체득하는 깨우침이야말로 인생에서 정말 가치 있는 성찰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삶이 배움이다, ‘살아가면서 배운다’는 것이다."

 현재 서울시민들에게 서울역사박물관의 인지도가 70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강 관장은 시민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지속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인지도를 더 끌어 올리고 싶어 한다. 그는 도시 서울의 현 모습과 앞으로의 미래,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이 지닌 의무와 풀어 나가야할 과제를 얘기하며 결의와 열정을 보였다. 전시조명의 미세한 조도, 명도 차이에도 관장으로서의 책임을 막중하게 느낀다는 그에게서 도시 서울과 도시박물관으로서의 서울역사박물관이 지향하는 올바른 길을 볼 수 있었다.

 마침 인터뷰 중에 어린 손자가 찾아왔다. 강 관장은 멀리서 들려오는 손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얼굴이 환해졌다. 기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와 약속한 것이 있었다며 손자를 보러 나갔다. 아이와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자상한 할아버지 모습의 강 관장을 보니  철저한 계획과 추진력으로 '사람 중심'의 교육장을 갖춘 서울역사박물관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