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향집 느릅나무는 안녕하십니까?
그 고향집 느릅나무는 안녕하십니까?
  • 이소리(시인, 본지 논설위원)
  • 승인 2011.10.1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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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시인 김규동 선생이 마지막 남긴 책 두 권

 선생님 가신 그날 밤/ 가을비가 허공을 밟으며 가슴을 툭툭 칩니다

 살아서는 다시 밟지 못한 북녘 고향 땅/ 넋이 된 지금 함경북도 종성에는 닿으셨습니까

 그곳에도 잘린 허리 서럽다 서럽다 울며불며/ 가슴 찌르는 철조망 툭툭 차는 가을비가 내립니까

 고향집 우물가 느릅나무는 안녕하십니까/그 느릅나무에 60년 한 서린 시 새기고 계십니까 -이소리‘시인이 아니라 시다- 시인 김규동 선생님 영전에’ 몇 토막

 이 나라 으뜸가는 시인 김규동 선생이 9월 28일 낮 2시 30분 향년 87세로 이 세상을 훌쩍 떠났다. 함경북도 종성에 고향을 두고 있는 시인은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그 고향 집 마당에 서 있는 느릅나무를 잊지 못했다.

 부모님과 가족을 가슴에 묻고, 철조망에 묻었다. 넋이 되어서라도 남북통일을 앞당기는 파수꾼이라도 되려는 듯이.

 3월 끝자락 마지막 남긴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특별한 그만의 재능과 소질이 있어요. 공부가 뭐 별겁니까? 자신의 재능과 소질을 극대화시켜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사람 사는 훈훈한 사회를 일구어가는 게 공부입지요.” -70쪽

 고 김규동 시인 선생님을 추모하며, 지난 3월 끝자락에 낸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바이북스)를 다시 들춘다. 이 책에는 1950년대 시인 박인환과 김경린, 이봉래, 조향, 김차영 등과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며 우리 시문학을 이끌어온 시인 김규동 선생이 걸어온 삶과 시가 그대로 녹아 있다. 어린 소년 시절 초상부터 일제 강점기 때 공부, 은사 김기림과 만남, 시인이 되는 과정, 월남과 민족 분단 등.

 이 책은 시인 김규동 선생이 ‘삶’이란 먹을 찍어 ‘시’란 붓으로 쓴 자전적 에세이만이 아니라 우리 현대 시문학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로서도 아주 소중하다. 김광규 시인은 김규동 시인을 일컬어 “시대를 배반하지 않는 선비”라고 못 박았다. 선생 스스로도 실제 “시대를 배반하지 않는 선비”로 살았다.

 어릴 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가슴 깊숙이 새겼고, 청년 땐 한국전쟁과 분단을, 아버지가 되었을 땐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운동이란 깃발을 들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물질만능주의에 허우적거리는 우리나라 사람들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시로 썼다.

 김규동 시인 어린 때를 펼쳐보자. 김규동 시인은 “동네 마당에서 노니는 당나귀를 잡아타고 달리다 떨어지고, 브레이크도 없는 자전거를 비탈길에서 타고 내려오다 신발 뒤축이 해지고, 높은 나뭇가지 위의 까치집에서 까치 알을 꺼내다 떨어지고, 소학교 1학년을 낙제해 두 번 다니고, 성적통신표를 위조해 부모님께 보여드렸다가 들통이 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공부도 잘 못하던 이 말썽꾸러기 소년이 어떻게 시인이 되었을까. 그는 “책 읽는 것이 좋아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루 종일 아동 문학 전집을 끼고 살고, 작문 시간에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나서는 한 달에 여덟아홉 편의 글을 쓰기도 하면서 문학인의 꿈을 품었다”고 쓴다. 시인은 “경성고보 은사였던 김기림 시인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되짚었다.

 2월 허리춤께 나온 <김규동 시전집>

 고 김규동 시인(87)은 올해 2월 허리춤께 시 432편을 모은 <김규동 시전집>(창비)을 펴냈다. 시인은 남쪽으로 내려온 그해(1948년) <예술조선>에 시 ‘강’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인은 그 뒤 60여 년에 걸쳐 시집 9권(시선집 포함)과 평론집과 산문집 여러 권을 펴냈다.

 <김규동 시전집>은 시인이 모더니즘을 내세운 초기시부터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현실참여시를 쓰기까지 평생에 걸친 시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시전집에는 2010년 겨울호에 <창작과비평>에 발표한 ‘편지’, ‘경고’를 포함해 고령과 폐렴 등으로 몸이 불편했어도 꾸준히 쓴 미간행 작품들도 함께 실려 있다.
시인은 젊을 때 <동아일보> 등 여러 신문사와 출판사에서 일하며 한동안 시를 멀리 했다. 시인이 다시 펜을 잡게 쓰게 된 때는 군사정권이 저지르는 폭압이 꼭짓점으로 치닫던 70년대부터다. 시인은 이때부터 시국에 눈을 돌리며 소위 ‘투사 시인’으로 나선다. 시인은 7~80년대 백낙청, 고은, 박태순 등과 함께 한국문단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을 맡았다. 

 어서는/발레리도 읽고 릴케와 에세닌도 애독했으나/정신분석이니

쉬르레알리즘 선언 따위도 흥미로웠으나/지금은/쌀을 안치고 불을 켜

군말 없이 밥 짓는 일에 애정을 바친다 -‘하나의 세상’ 몇 토막

1948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중퇴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평생 고향을 가지 못하는 한을 품고 산 시인 김규동 선생. 선생은 은관문화훈장과 만해문학상을 받았으며, 올 6월에는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부문 수상자로 뽑히기도 했다. 선생 장례는 10월 1일(토) 아침 8시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원로시인 김규동 선생 문인장’이라 이름 붙은 이 장례식에는 시인 김정환이 사회를, 약력보고는 시인 이은봉, 조시는 시인 맹문재, 조사는 시인 민 영이 맡았다.

 글쓴이가 시집을 보내면 그때마다 꼬박꼬박 글쓴이 시 몇 토막을 붓으로 적고, 그림까지 곁들인 뒤 낙관까지 찍어 보내주시던 시인 김규동 선생. 몸은 비록 사라지지만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을 으뜸 시인이여. 이제 시가 되어 삼라만상이 되어 다시 돌아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