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열전-29] 김동원
[배우열전-29] 김동원
  • 김은균 공연전문기자
  • 승인 2011.12.0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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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랑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동원은 진흙 한번 안 밟아 본 사람이야 ’라는 말씀처럼 삶이 순조로우셨는데, 삶의 고비나 어려웠던 적은  없으셨는지요?

 그렇지, 비교적 삶이 평탄했었던 것 같아. 하지만 돌이켜보면 삶의 고비가 없진 않았을 거야. 

6.25 사변이 터지고 불과 닷새 만에 서울은 유린되고 이미 한강교는 끊어져 버려서 나는 오갈 데 없는 잔류 시민이 되고 말았지. 원래 나의 본가는 한강 건너편에 있는 노량진이었는데 <뇌우> 출연관계로 한동안 처가가 있는 필운동에 기거하고 있던 중이었지. 한 열흘쯤 숨어 지내려니 식량도 바닥나고 노량진 본가의 소식도 궁금해 한강을 건너가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대분 밖을 나섰지. 

조심스럽게 뒷골목으로 30여 분쯤 걸어 화신백화점 뒤쪽을 돌아드는데 누군가 어깨를 잡아 채길래 너무나도 놀라 돌아보니 좌익계 연극동맹의 열성분자인 백민(白民)이“왜 다른 사람들처럼 혁명전선 대열에 솔선수범하지 않느냐”면서 그 길로 명동성당으로 연행을 해 끌려가 보니 거기는 바로 예술계 인사들의 임시 수용소로서 김승호, 최은희 그리고 지휘자인 임원식이 이미 연행되어 있더라고.

수용된 후 적색 교양교육으로 며칠을 보내다가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되자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다는 것이 구실이었지만 그들에게 이끌려서 하루하루 북으로 향해 어느덧 38선 표지판을 넘어서게 되었지. 낮에는 자고 밤에만 움직이던 북으로의 행군이 어느덧 평양을 통과할 때는 이미 비통함을 지나쳐 체념의 상태가 되었었지.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랄까? 그러다가 어느 날 휴식 시간에 잠시 낮잠을 잤는데 꿈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나타나자 내가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아버지는‘무슨 천(川)’을 가라면서 인자로우신 미소를 띠우시더니 사라졌어. 그래 바로 일어나 그 기억을 수첩에 적으면서 무슨‘천’이라고 하신 건 분명한데 희미해서 잘 떠오르지가 않더군. 평양을 지나 얼마나 되었을까?

이 날은 새벽부터 행군에 나서 정오 때는 들판 길을 통과하고 있었지. 사실 산이 많은 북한 땅에서는 드물게 보는 평지였지. 너무 노출되는 지역이고 보니 한편으론 불안한 느낌이 들더군. 아니나 다를까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더니 여기저기서 기총탄이 무더기로 머리 위로 쏟아지는 바람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지. 그 전에도 여러 번 공습을 받아 보았지만 이처럼 심하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내립따 그냥 논두렁에 엎드려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지.“아. 이제는 죽는구나”싶었어.

서울 출발 때 괴뢰군이 우리에게도 군복을 입혔기 때문에 아군들에겐 영락없이 적군으로 오인받을 수밖에. 공습이 다소 뜸해진 후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시체들만이 뒹굴고 있더라고. 단번에 공포감과 고독감이 밀려들더군. 어딘가 몸을 숨겨야 할 것 같아 들러보니 전방 백 미터 즈음에 아카시아 숲이 있어 단숨에 뛰었지. 그리고 개울 건너의 숲 속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는데 바짝 긴장이 되어 경계하려는 순간 그 소리가 귀에 익은 소리임을 깨닫고 보니 명동성당 수용 생활 때부터 마음을 트고 지내던 양백명(배우 양택조씨 부친) 씨임을 대뜸 알아차릴 수가 있었던 것이야.

나이가 많은 그는 심한 해소를 앓고 있었는데 서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기뻐 얼싸안고 마구 뒹굴었지. 비로소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의 공습은 유엔군의‘순천 파라슈트 작전’이었는데 꿈속에서 아버지가 가르쳐주신‘천’이 바로 이를 말한 것 같았어. 죽어서도 자식을 아끼는 아버지의 마음이 절절이 생각이 나더군. 돌이켜 생각하니 이 모두가 어떤 섭리가 아닌가 하고 느껴져.
 

▲1952년 부산에서 초연된 '처용의 노래' 에서 열연 중인 김동원 선생님

-일생 배우로 살아오시면서 많은 작품을 하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이미 전술한 대로 햄릿이고, 그 다음을 꼽을라 치면 1956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연한 아서 밀러의 작품 <세일즈맨의 죽음>을 꼽을 수가 있지. 서민 생활의 애환을 그린 이 작품은 그만큼 상황 설정이 우리의 생활과 닮아 연극이라고도 느낄 수 없이 그저 호흡하듯이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가는 작품이었지. 한마디로 연기자나 관객 모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었던 것 같아.

윌리로만 역을 하면서 나는 내면연기의 실상을 깨닫게 되었어. 판에 박힌 스타일에서 벗어나 고도심리 표현의 연기로 과감하게 접근을 꾀하게 되었지. 특히 신경썼던 부분은 목소리의 볼륨을 낮춘 채 정확한 톤의 대사를 구사하였는데 첫 회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목소리가 안 들린다면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더군.

크게 지른다고 해서 좋은 연기가 나오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 이 작품을 통해서 신인 연출가 김규대가 기량을 떨치게 되었고 장민호 씨, 최은희 씨가 같이 무대에 섰었던 작품이지. 그리고 세 번째로 파우스트를 손꼽을 수 있지. 이 작품에서 내가 맡은 배역은 처음에 바랐던 파우스트가 아니라 메피스토펠레스였어. 처음에는 약간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 악역인 메피스토펠레스를 맡은 것이 결과적으로는 더 좋은 평판을 얻었던 것 같아.

이와 비슷한 예로 <포기와 베스>에서 해랑이 주인공인‘포기’로 분했고 내가 악역인‘클라운’을 맡았지. 여기서 악역을 해 보고서야 주인공 역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 그리고 연극이 앙상블 작업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어. 어떤 배역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소중한 기회였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