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칼럼] 德壽宮은 우리의 역사이자, 조선의 관례였다.
[컬쳐칼럼] 德壽宮은 우리의 역사이자, 조선의 관례였다.
  •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 승인 2011.12.2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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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壽宮은 조선왕조실록 원문에 175회 기사되어있으며 순종부록에는 400회 기사되어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처음 기사는 정종(4권 2년 6월 1일)대 이다. 그 내용은 “태상왕의 궁을 세워 德壽宮이라 하고 府를 세워 承寧府 라 했다.” 이다.

조선왕조실록의 덕수궁에 대한 추가 기사는 정종 10건, 태종 84건, 세종 6건, 성종 2건, 영조5건, 고종 1건, 순종 67건 이다. 정종과 태종대의 기사 내용은 주로 상왕(이성계)에 대한 문안 인사가 주를 이룬다. 세종대에도 세자가 덕수궁에 나아가 문안한다는 기사로 볼 때 태종도 짧은 기간이지만 거처하던 곳은 德壽宮인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영조대에는 조선 건국 초기 덕수궁에 대한 기록을 묻는 기사가 있으며 연희방의 德壽宮 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를 한다.

그리고 순종 즉위년에  순종 1권, 즉위년(1907 정미 / 대한 광무(光武) 11년) 8월 2일(양력)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윤용(李允用)이, ‘태황제궁의 호망단자(號望單子)를 덕수(德壽)로, 부(府)의 호망단자를 승녕(承寧)으로 의정(議定)하였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라는 기사가 나오며 이윽고 순종 즉위년 8월 6일(이윤용의 상주(上奏) 4일 지남) 장례원 경 신기선이 덕수궁의 관례에 대하여 上疏를 올렸다.
순종 즉위년 8월 2일과 궁내부 대신 이윤용은 말(上奏)로 건의했고, 왕실의 업무를 담당하고 관장하던 장례원의 최고 책임자 신기선은 글(上疏)로 올렸다.

두 사람의 말과 글에는 태조때 부터 관례로 사용되었던  덕수와 이를 관리하던 관청 승녕부를 거론했다. 추후 이윤용은 친일의 길, 신기선은 의병의 길로 나간다.
위의 건의 내용으로는 일제의 압력이기 보다는 조선의 관례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德壽宮이란 명칭은 1907년에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며 조선 전체 역사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관례에 따른 명칭이며, 조선과 이를 승계한 대한제국의 제도적 승계이다. 이 사실은 덕수궁을 관리하던 관청까지 존재했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덕수궁은 조선의 역사에서 왜 태조와 태종, 고종 대에만 설립되었는가! 이다. 답은 간단하다. 임금이 생존하면서 퇴위한 예가 태조와 태종, 고종이기 때문이다.
또한 덕수궁은 중국의 문헌에도 나타난다. 宋의 高宗(1127~1162) 역시 퇴위 후 거처한 곳이 德壽宮이었다. 이렇듯 德壽란 퇴위한 상왕의 건강과 안녕을 기리는 의미이며 德壽宮은 그 거처이다. 즉 ‘조선 500년’과 ‘대한 100년’의 공식적이고 역사적인 명칭인 것이다.

덕수궁은 1907년 고종황제가 순종황제에게 왕위를 물려 준 뒤 이곳에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에서 기존 조선의 전통적인 질서와 법식에 의거하여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된 조선과 대한의 연결선상에 있는 주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일부에서 100년 이상 부른 이름이라 하는데 덕수궁은 600년을 이어온 우리의 역사이다.
덕수궁을 원래 이름인 경운궁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압력 때문이었다는 구실을 댄다. 매사를 일제 핑계로 돌리는 것은 옳은 역사의식이 아니다. 덕수궁은 조선과 대한제국시기를 이어온 엄연한 우리의 역사다. 일제의 압력이라는 증거는 아직 조사된바 없는 막연한 억측일 뿐이다. 덕수궁은 조선과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연속선상에서의 역사·문화적 명칭인 것이다.

또 한편에선 덕수궁의 의미와 역할이 끝났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환원해야한다고 주장하는데 경운궁으로 환원하자면 그에 타당한 건축물의 중건도 따라야하며 이미 조선의 역사는 마감했다. 덕수궁으로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역사를 기억해야한다. 오히려 덕수궁은 종묘와 사직단처럼 동북아에서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국가주요건축물이다. 따라서 궁궐건축물의 다양성 있는 형태 보존을 역사·문화적 강점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