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인, 왜 11월을 그토록 좋아할까?
그 시인, 왜 11월을 그토록 좋아할까?
  • 이소리(시인, 본지 논설위원)
  • 승인 2011.12.2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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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맞은 시인 이행자 다섯 번째 신작시집 <11월> 펴내

“절름발이 인생’이라는 / 글 한 꼭지에 / 울화가 치밀어 / 좋아하지도 않는 / 소주 두 병도 모자라 / 양주까지 마시고는 / 필름이 끊어진 / 내 자신이 싫다고 얘기하자 / 소설가 김별아가 하시는 말씀 “언니는 / 워낙 씩씩하게 잘 살아서 / 우리 모두 못 느끼고 살았는데......”
-24쪽, ‘워낙 씩씩하게 잘 살아서’ 모두

시인 고정희(1948~1991년), 작가 윤정모, 이경자에 이어 ‘한국문단의 영원한 누님’으로 통하는 시인이 있다. 문인들이 ‘행자야~ 술 한 병 가져 오너라’라고 놀리면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죽을래’라고 말하며 싱긋 웃고 마는 시인. 그가 ‘재야운동단체 식모’라는 또 다른 애칭을 지니고 있는 이행자 시인이다.

“시나 쓰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되는 시대를, 통증을 핑계 삼아 사는 것 같아, 이 정부 들어 시집을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래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희를 기념하여 이 세상에 뭔가 흔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냐는 후생들의 간청에 못 이겨 이렇게 한 권의 시집을 꾸려 보았다... 내 곁에 사랑하는 이들이 많고도 많아, ‘발문’ 축하의 글을 써주어 참, 고맙다.” -‘시인의 말’ 몇 토막

이행자 시인이 올해 11월 고희를 맞아 다섯 번째 신작시집 <11월>(화남)을 펴냈다. 이번 시집 제목이 된 11월은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달이다. 왜? 11월은 시인이 태어난 달이기도 하지만 ‘전태일문학상’을 받고 시인으로 다시 태어난 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집 제목을 <11월>이라 붙인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모두 4부로 이루어진 이번 시집에는 3부까지 신작시 52편이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에게 혹은 낮고 부드럽게 혹은 거칠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번 시집은 특히 고희 기념시집이어서 그런지 다른 시집과는 다르게 4부에 시인 강민, 정우영, 작가 김별아 등 12명에 이르는 축하 ‘발문’이 꽃다발처럼 얹혀 있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시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12명(김원익, 김별아, 전성태, 강민, 채원희, 안용대, 정우영, 김승환, 이원중, 홍선웅, 이수호, 박래군)이 쓴 ‘발문’이다. 문인, 화가, 노동운동가, 정치인 등 각계각층에서 일하는 이들이 쓴 이 ‘발문’을 읽으면 시인 이행자가 칠순까지 살아온 삶이 그대로 보인다.

“누가, 그 물길을 막으려 하느냐”
“달이 웃는다 / 갈비뼈가 두 대씩이나 부러져 / 땀띠 나는 여름을 보내면서도 / 나이 앞에서 / 겸손할 줄 모른다며 / 달이 웃는다”-16쪽, ‘달이 웃는다’ 모두

시인 이행자 다섯 번째 시집은 크게 세 다발로 묶을 수 있다. 1부는 그리운 이나 달, 고드름, 앵두, 바람, 명품가방 등을 통해 그동안 살아온 마음밭에 비추는 거울이다. 2부는 그동안 다녔던 곳, 삼청동이나 백련사 동백숲길, 물왕저수지, 과천, 바다 등에게 보내는 사랑편지이다. 3부는 그동안 가까이 만났던 사람들, 문익환 목사나 박현채, 구중서, 박정호 등을 그리워하는 음표다.

시인은 하늘에 휘영청 떠있는 달을 통해 스스로 아주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달이 어찌 사람처럼 웃을 수 있겠는가. 시인은 달을 바라보며 “나이 앞에서 / 겸손할 줄” 모르는 자신을 비웃고 있다. 달이 웃는다는 것은 곧 시인이 스스로 삶을 되짚어보며 스스로에게 비웃고 있다는 뜻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 곳곳에서 칠 십 해 동안 살아온 자신을 꼼꼼하게 되돌아보고 있다. “남한강 백조들처럼 / 흐르며 살고 싶은데 / 감히, / 누가, 그 물길을 막으려 하느냐”(감히 누가)에서는 4대강 사업을 꼬집으며, 스스로를 되짚는다. 시인이든 누구든지 그 무언가를 억지로 거스르면 결국 탈이 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녀가 고희를 맞이한다니 ‘모르겠다’”
소설가 전성태는 “선생은 사람 사귀는 데 까다롭다”며 “배운 사람은 입을 오래 보고, 이름 있는 사람은 어깨를 가만히 겨누고, 젊은 사람은 앉는 자리를 살피고 나서 취급해준다”고 썼다. 시인 강민은 “내 고희문집에 이행자 시인이 덕담을 써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녀가 칠순이란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녀는 세월을 좀먹는지 늙지를 않는다”고 적었다.

지성사 대표 이원중은 “시간이 지나면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그런데 고희를 맞이하는 선생님은 여전히 소녀고, 소녀가 고희를 맞이한다니 ‘모르겠다’”라고 엄살을 떨었고,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박래군은 “이제 누님이 걱정 사는 일은 하지 않고 살아야겠는데, 언제고 불쑥 전화해서 잘 먹고 다니냐고 물어 오실 것 같다. 이제 누님께 먼저 전화하는 동생이면 좋겠는데…”라고 썼다.

시인 이행자는 1942년 서울에서 독립운동가 딸로 태어나 1990년 제3회 <전태일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들꽃 향기 같은 사람들> <그대, 핏줄 속 산불이 시로 빛날 때> <은빛 인연>이 있으며, 시화집 강민, 이행자 <꽃, 파도, 세월>, 산문집 <흐르는 물만 보면 빨래를 하고 싶은 여자> <시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아! 사람아>가 있다.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후원회 부회장,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 등을 맡았으며, 지금 한국문학평화포럼 고문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