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으로만 어찌 사나, 밥 먹어야지’
‘빵으로만 어찌 사나, 밥 먹어야지’
  • 유시연 문학전문기자[문학In편집주간]
  • 승인 2011.12.2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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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방식 성경읽기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나와

“나는 그동안 국문학 교수로서 학생들과 많은 문학작품들을 읽어왔습니다. 기호학으로 텍스트 분석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었지요. 신학이나 교리는 잘 몰라도 문학으로 읽는 성경, 생활로 읽는 성경이라면 내가 거들 수 있는 작은 몫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적 레토릭과 상상력, 그리고 문화적 접근을 통해 빵과 밥과 떡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

사이의 거리를 좁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맡은 뒤 지난 2007년 기독교에 몸과 마음을 맡긴 이어령 전 장관이 문학이나 생활을 접붙여 성경을 독특하게 읽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열림원)를 펴냈다. 이어령 전 장관은 문학을 가르친 교수이자 기호학자로 틈틈이 성경을 연구하다 성경도 얼마든지 문학작품처럼 쉽게 읽고 재미있게 느낄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전 장관은 그때부터 성경 읽는 즐거움을 알리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상징적인 아이콘들을 키워드 삼아 문화사적 맥락과 컨텍스트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문학작품처럼 이야기를 짜는 요소, 플롯 등을 하나하나 풀어 다시 풀이한다. 그 과정에서 성경 속에 숨겨진 놀라운 매혹과 만나게 된다.

이 책은 서문 ‘빵이냐 떡이냐’로 시작해 모두 4부에 21편에 이르는 이어령 방식 성경읽기가 새로운 눈빛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꽃이 밥 먹여주느냐, 눈물과 함께 먹는 빵, 버린 돌로 집을 세우는 목수, 낙타와 바늘귀, 신 포도가 포도주로 변할 때, 독수리로 거듭나기, 양을 모는 지팡이, 누가 정말 우리의 이웃인가 등이 그것.

그는 “성경읽기의 한 방편으로 시학적인 독서법을 주문하면서 성경에는 시학에서 주로 쓰이는 수사법이 가득하므로 이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만 성경이 감춰둔 섬세한 맛을 느낄 수 있다”라며 “성경 원서에 있는 빵을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떡이라고 번역했다. 그것이 ‘제유법’이라는 수사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오류”라고 밝힌다.

그는 “주기도문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영어원문을 보면 양식이 일용할 빵(daily bread)로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성경에서 빵은 양식 전체, 더 확장해서 의식주의 모든 물질적 생활을 상징하는 제유적 의미로 쓰였다”라며 “그것은 물론 유목을 기초로 했던 유대문화의 산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빵처럼 식탁 위에 매일 오르는 음식물을 어쩌다가 명절 같은 잔칫날에나 먹는 떡으로 옮긴다면 제유적 의미가 사라진다”라며 “이와 같은 오류는 단어 하나의 잘못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곧 성경의 수사 구조 전체가 망가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꼬집었다. 제유법이란 수사법 가운데 비유법으로 사물 명칭을 직접 쓰지 않고 사물 일부분이나 특징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성경에는 밥이란 말이 단 한 곳에서도 나오지 않는군요. 하기야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슨 쌀밥, 보리밥을 먹었겠습니까? 당연히 밀가루로 만든 빵이었겠지요. 그런데 위의 성경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빵이 떡이라고 되어 있군요. 그래서 밥을 주식으로 먹고 사는 한국 사람들이면 누구나 고개를 저을 것입니다. ‘세상에 떡만 먹고 사는 사람도 있나. 별 이상한 소리 다 듣겠네.’ 그러고는 ‘사람이 어떻게 떡으로만 사나, 밥을 먹어야지’라고 할 겁니다.

ⓒ 열림원

알다시피 떡은 주식이 아닙니다. 어쩌다 특별한 날에나 먹는 별식이지요. 그래서 떡을 보면 ‘웬 떡이냐’라고 합니다. 밥을 보고 ‘웬 밥이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 구절이 떡을 밥으로 바꿔 ‘사람이 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했다면 누구든 쉽게 그 뒷말을 이어갈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인생의 목표를 그 뒤에 써넣을 수 있으니까요.

서양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밥 대신 빵이라고 하겠지요. 그렇다고 떡을 빵이나 밥으로 바꾼다고 문제가 끝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바벨탑 이야기처럼 지상의 언어들은 제각기 달라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살아가는 풍토가 다르고 먹는 것이 다르면 그 사이에는 어떤 언어로도 메울 수 없는 깊은 수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특히 방금 읽은 마태복음 4장 4절은 한국말로 번역이 불가능합니다. 아파트 층수에서도 기피하는 4(死) 자가 두 개나 겹쳐 있는 장절이라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른 말은 문맥에 맞춰 대체 가능한 다른 말로 어느 정도 번역할 수 있지만 음식 문화의 체계와그 실체는 다른 것으로 옮겨 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1장 ‘꽃이 밥 먹여주느냐’ 몇 토막

이어령 전 장관이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빵만이 아니다. 눈물, 새와 꽃, 아버지, 탕자, 양, 집, 목수, 접속, 낙타, 포도, 제비, 비둘기, 까마귀, 독수리, 지팡이, 사막과 광야, 예수, 십자가 등 성경에 지주 나오는 대표적인 키워드들도 프리즘 삼아, 성경 읽기와 해석이라는 새로운 거울을 비춘다.

이 전 장관은 탕자에 대해서도 “탕자 이야기 역시 세 가지 요소가 나란히 서 있는 병렬법(parallelism)을 통해 구축되어 있다”라며 “첫째 아흔아홉 마리 양을 버려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가는 비유는 유목 문화를 경험하지 않은 문화권의 사람들은 제대로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은전 열 드라크마를 갖고 있는 여자가 하나의 은전을 찾아 등불을 켜고 입을 뒤지면서 찾는 성경 한 장면을 끄집어낸다. 이렇게 해야 유목문화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화폐를 쓰며 살림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는 마지막으로 형제의 비유를 통해 오랫동안 부모 곁을 지키며 효도를 한 형보다 멀리에서 돌아온 동생을 귀하게 대접하는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 결국 탕자가 지닌 뜻을 거의 완전한 형식으로 이해시킨다.

“근대화와 함께 밥과 빵이, 떡과 케이크가 서로 뒤바뀌는 문명의 상황 속에서 살아온 우리지만 아직도 빵을 떡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서양도 성경도 신기루처럼 환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낸 것이지요. 빵은 떡이 아니다. 학은 비둘기가 아니고 들에 핀 백합은 산골짜기에 핀 진달래가 아니다. 디테일을 넘어서 눈에 보이는 대상물들을 뛰어넘어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책 뒤에 붙이는 남은 말’ 몇 토막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대학 때 평론 ‘이상론’(李箱論)을 발표한 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화된 기성문단에 대한 도전을 선언한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암살자>, <환각의 다리>, <무익조>, <기적을 파는 백화점>,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등이 있으며, <한국과 한국인>(전6권), <생각에 날개를 달자>(전12권), <이어령 라이브러리>(전30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