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 이소리 본지 논설위원
  • 승인 2012.02.1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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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상국 여섯 번째 시집 <뿔을 적시며> 펴내

 

▲이상국 시인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

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

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

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

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

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 -‘산그늘’ 모두

시인 이상국이 다섯 번째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를 펴낸 뒤 7년 만에 여섯 번째 시집 <뿔을 적시며>(창비)를 펴냈다. 이번 시집에는 힘겨운 현실을 밑바탕에 깔고 삼라만상에게 말을 툭툭 건네며 ‘자연’ 그대로 살갑게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시로 가득하다.

이번 시집은 모두 5부에 자연과 어깨동무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따스한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온다. ‘언 강을 내다보며’ ‘내 이름은 문학의 밤’ ‘다리를 위한 변명’ ‘라면 먹는 저녁’ ‘밥상을 버리며’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참 쓸쓸한 봄날’ ‘조껍데기술을 마시다’ ‘비를 기다리며’ ‘아내와 부적’ ‘보일러 망가졌다’ ‘한계령 자작나무들이 하는 말’ ‘우리나라 백일장’ 등 63편이 그 시편들.

시인 이상국은 강원도 양양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가 쓰는 시는 독특하게도 바다보다도 흙에 더 많이 머문다. 시인은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혜화역 4번 출구)이라고 스스로 흙에 빗대며, “붉은 메밀 대궁”에서 “흙의 피”를 떠올리고 “달밤에 깨를 터는”(옥상의 가을) 어머니를 가만가만 떠올린다.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 흙의 피가 들어 있다 / 피는 따뜻하다 /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 세상의 모든 옥상은 /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 / 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 /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옥상의 가을’ 모두

이번 시집에서 눈에 많이 띠는 것은 음식을 밑그림으로 삼은 시편들이다. 국수(국수 공양, 폭설), 장떡(뿔을 적시며), 라면(라면 먹는 저녁), 감자밥(감자밥), 모두부(참 쓸쓸한 봄날), 닭백숙(조껍데기술을 마시다) 등이 그것.

우리 문학사에서 음식을 밑그림으로 즐겨 다룬 시인은 백석이다. 이상국 시인이 1999년 제1회 백석문학상을 받은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그 말이다. 시인은 이천 원짜리 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짭짭 먹으며 “천릿길 영(嶺)을 넘어 동해까지 갈”(국수 공양) 힘을 얻고, 세상살이가 곧 도라는 것을 깨친다.

▲창비
시인은 “동서울터미널 늦은 포장마차에 들어가 / 이천 원을 시주하고 한 그릇의 국수 공양(供養)”을 받는다. 시인 앞에 놓인 그 국수는 “가다꾸리가 풀어진 국숫발이 지렁이처럼 굵었다”. 시인은 그 국수를 먹으며 “나는 그 힘으로 심야버스에 몸을 앉히고 / 천릿길 영(嶺)을 넘어 동해까지 갈 것”(국수공양)이라고 다짐한다.

자연이 곧 나이며 내가 곧 자연이라고 여기는 시인은 물떼새가 해안선을 따라가며 외다리로 종종걸음 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치 지구가 새 한 마리를 업고 가는 것 같았다”(다리를 위한 변명)고 쓴다. 시인이 자연과 사람이 한 몸이라고 여기는 시편들은 이 시집 곳곳에 삼라만상으로 흔들리고 있다.

“나뭇가지에 몸을 찢기며 떠오른 달”(한천)이나 “담장을 기어오르다 멈춰선 담쟁이의 / 시뻘건 손”(매화 생각),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 데서도 들으라고 / 소나무숲은 횃불처럼 타오르고 / 함성처럼 흔들린다”(소나무숲에는) 등이 그러하다.

“나무는 할 말이 많은 것이다 // 그래서 잎잎이 제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다 // 봄에 겨우 만났는데 벌써 헤어져야 한다니 // 슬픔으로 몸이 뜨거운 것이다 // 그래서 물감 같은 눈물 뚝뚝 흘리며 // 계곡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단풍’ 모두

시인 도종환은 “훌륭한 말은 막힘이 없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면서도 힘이 있으나 보잘것없는 말은 수다스럽다고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상국의 시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자연스러우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라며 “교언영색을 찾아볼 수 없고 담백하며 정갈하다. 이상국의 시는 어딘가 헐렁해 보인다. 여백이 많고 다 채우지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고 쓴다.

그는 “그런데 이상하게 그 헐렁함으로 인해 마음이 따듯해지곤 한다. 섭섭하고 외롭고 썰렁한 마음이 위로를 받는다”라며 “이상국의 시는 사소한 것에서 출발하여 크고 깊은 이야기를 한다. ‘대부분 상처이고 또 조잔한’ 삶에서, 팍팍한 생활 속에서 시를 꺼내지만 서늘한 울림과 깊은 그늘이 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게 삶이 아닐까?’를 생각하게 되고, 가끔씩 묵언의 대답을 듣기도 한다”고 평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는 / 한겨울에 뿌리를 얼려 / 조금씩 아주 조금씩 / 바위에 틈을 낸다고 한다 / 바위도 / 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며 / 몸을 내주었던 것이다 / 치열한 삶이다 / 아름다운 생이다 / 나는 지난겨울 한 무리의 철거민들이 / 용산에 언 뿌리를 내리려다가 / 불에 타 죽는 걸 보았다 / 바위도 나무에게 틈을 내주는데 / 사람은 사람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 틈” -‘틈’ 모두

시인 이상국은 1946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1976년 <심상>에 시 '겨울 추상화'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동해별곡> <내일로 가는 소>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가 있다. 지금, 속초에 살면서 만해마을 운영위원장을 맡아 매일 진부령을 넘어 백담사 만해마을을 다니고 있다.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유심작품상, 불교문예작품상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