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가고 또 하루가 온들 도시에 분수는 시들고....”
“오늘이 가고 또 하루가 온들 도시에 분수는 시들고....”
  • 임동현 객원기자
  • 승인 2012.02.2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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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맘대로 현대문학] ‘애정남’ 박인환의 ‘달과 서울 사이’(4)

센티멘털 쟈니

주말여행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수묵담채/창현 박종회 화백

엽서...... 낙엽
낡은 유행가의 설움에 맞추어
피폐한 소설을 읽던 소녀

이태백의 딸은
울고 떠나고
너는 벽화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숙녀

카프리 섬의 원정
파이프의 향기를 날려보내라
이브는 내 마음에 살고
나는 그림자를 잡는다

세월은 관념
독서는 위장
그저 죽기 싫은 예술가

오늘이 가고 또 하루가 온들
도시에 분수는 시들고
어제와 지금의 사람은
천상유사(天上有事)를 모른다

술을 마시면 즐겁고
비가 내리면 서럽고
분별이여 구분이여

수목은 외롭다
혼자 길을 가는 여자와 같이
정다운 것은 죽고
다리 아래 강은 흐른다

지금 수목에서 떨어지는 엽서
긴 사연은
구름에 걸린 달 속에 묻히고
우리들은 여행을 떠난다
주말여행
별말씀
그저 옛날로 가는 것이다

아 센티멘털 쟈니
센티멘털 쟈니

우리는 지금 박인환의 센티멘털리즘을 따라가보고 있다. <목마와 숙녀>를 시작으로 박인환의 멋과 감격벽, 그리고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세월이 가면>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시들을 통해 우리는 낭만을 배우고 센티멘탈에 직접 빠져보기도 했다.

 

그래서 박인환은 동경의 대상이면서 또한 비난의 대상이었다. 현실 인식 없이 멋진 시어만 읊어대던,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 시들의 연속이었다고. 하지만 과연 그의 시에 시대의 아픔이 없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박인환이란 사람은 정말로 시대를 무시하고 현실을 무시한 철없는 어린애에 불과했을까? 이제 그 질문에 답을 할 차레가 온 것 같다. 그의 성장 과정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문학과 예술에 빠진 수재

그는 머리가 굉장히 좋았던 것 같다. 어릴 적 그의 아버지는 면사무소 직원을 하다가 그만두고 산판사업을 했다고 한다. 혼자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서울에 정착한 그는 박인환이 열한 살이 되던 해에 가족들을 모두 서울로 데려온다.

당시 박인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사준 버스표 한 장만 가지고 아버지가 계신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본 아버지는 박인환을 대단한 머리를 가진 아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가족을 서울로 이주시킨 중요한 이유가 됐다.

그의 아버지는 면사무소 직원으로 일하면서 약간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큰 어려움없는 생활을 했다. 얼굴도 미남형에 호방함과 넉살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니 아들 박인환이 그 아버지를 닮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기대대로 박인환은 당시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경기중학교에 입학해 집안의 기대를 이루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공부보다는 시와 영화, 그림 등을 좋아했고 자연히 그의 성적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경기중학교를 자퇴하고 황해도 재령에 있는 명신중학교에 편입해 졸업장을 따낸다.

스무살 나이에 ‘마리서사’를 만들다

아버지의 강요로 그는 졸업 후 평양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지만 해방이 되자 바로 학업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에 와서 그는 아버지와 이모에게 빌린 5만원으로 시인 오장환이 경영하던 낙원동의 책방을 인수, 새로운 책방을 만들게 되니 그 곳이 바로 50년대 모더니즘의 탄생지가 된 ‘마리서사’다.

마리서사는 박인환이 소장하던 예술서적이 주를 이루었는데 당시에 접하기 어려웠던 서양의 시집이나 일본의 문학잡지들을 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자연히 예술인들의 발길이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김광균, 김병욱, 김경린 등 시인과 최재덕, 길영주 등 화가들이 책방을 드나들었고 그리고 그 곳에서 그의 평생 문우였지만 끝내 화해하지 못했던 시인 김수영을 만나게 된다.


글쓴이:'임동현

세상사, 특히 문학, 영화, 예술에 관심은 있지만 기웃거리기만 하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글쟁이 겸 수다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