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평우의 우리문화 바로보기]청계천! 다시 복구하자.
[황평우의 우리문화 바로보기]청계천! 다시 복구하자.
  •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 승인 2012.02.2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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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표조사 토대로 체계적ㆍ 장기적 발굴조사 제대로 안된 채로 복구돼

엉망으로 복원된 청계천에 최근 희망의 소식이 전해진다. 박원순 시장이 수표교를 원래자리에 오게 하는 등 청계천 다시 복원하기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처음으로 청계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42년 전의 일이다. 사업에 실패한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향했다.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형성된 돈암동의 산중턱에 월세를 얻고, 어렵게 청계천 평화시장 통일상가에 점원으로 취업하신 어머니는 3남매를 모두 데리고 일터로 나가셨다.

▲1970년대 청계천의 모습

어린 필자의 눈앞에 나타난 청계 고가의 거대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다. 어머니가 일하던 평화시장 옆에는 서울대 음대가 있었다. 담 너머로 흘러나오는 피아노소리와 노래 소리는 메마른 어린 나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줬다. 어머니는 새벽에 청계천으로 일을 나가셨고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서 돌아오셨다. 필자는 어머니로부터 청계천 주변에서 벌어지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으며 세상의 궁금증을 풀기도 했다.

어린날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청계천

한 날 어머니는 "젊은 청년이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자살을 했다" 라는 소식을 알려주셨다. 세월이 흘러 필자가 대학에 가서야 "전 태 일"을 알았다. 우리 3남매는 청계천주변에서 거두어들인 어머니의 잉여생산물로 성장했으니 가히 청계천은 필자가 성장한 거름이었던 것이다.

▲왼쪽에서 두 번 째가 필자(2002년)
필자는 청계천 복원 전에 서울역사박물관 도슨트라는 명분에 힘입어(?) 서울시의 부탁으로 청계천시민투어 안내를 20여회 진행했다. 참석한 시민들은 두 시간정도 어둡고 암모니아냄새 가득한 지하에서 광통교와 수표교 터를 확인하고 서울시에서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구조적인 결함(시멘트가 떨어져나가고 철근이 들어난 곳)이 있는 곳을 관찰했다. 시민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생태적, 구조적으로 청계천복원에 찬성을 보내지만 다양하고 심도 깊은 장기계획이 없는 서울시의 밀어붙이기에는 걱정이 많았고, 주변 영세상인대책과 교통대책, 청계천의 용수공급에 대한 문제의식은 분명했다.

필자로부터 서울의 역사와 청계천의 유례를 듣고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어린이와 주부 학생 장년들을 보면서 뿌듯한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만, 서울시에 매주 출입을 하면서 느낀 것은 청계천복원이 이명박 서울시장 선거용으로 잘 부각은 했지만 당선자나 서울시 공무원이나 청계천복원사업이 이렇게 뜨거운 반응을 일으킬 줄을 몰랐던 것 같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청계천 자체의 복원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다.

◆조선 도성 86개 다리 중 22개가 청계천에 있을 정도로 중요한 개천

청계천은 일제 초(1910년대)까지 개천(開川)으로 불리웠다. 실개천이던 것이 태종11년(1411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행한 준설공사로 직선화가 되었고 조선 최초의 석교인 광통교가 세워지며 개천에는 22개의 다리가 세워졌다. 도성에 86개의 다리 중 22개가 개천에 있었으니 개천의 중요도를 알 수 있다. 개천은 서울 도성의 배수기능을 한 내천이었던 것이다. 청계천이란 지명은 일제에 의해 "조선하천령"이 제정되면서 인왕산의 청풍계에서 흐르는 청풍계천(淸風溪川)을 줄여서 지어진 이름이다. 조선시대는 도성문화의 중심지로 답교놀이, 편싸움, 연등행사, 연날리기 등이 행해졌고, 서민과 거지들의 생활터전이었던 청계천을 단지 더럽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은 44년 전 환경에 대한 고민 없이 일방적인 지시로 청계천을 복개하고 만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행정이 50년 앞을 내다보지 못함을 증명하고 있는 큰 증거가 된다.

▲1920년대 청계천.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미역을 감는 정겨운 풍경.

사실 필자는 청계천 단독 복원에 반대했었다. 청계천은 600년 전에 정리법(바둑판식 도시설계의 우리식 설계법)이라는 도시 설계에 의해 건설된 서울의 내부 하천일 뿐이다. 거대 도시인 서울에는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흠잡을 때 없는 한양도성이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지이며 전통적으로 성읍국가이다. 조선 초에 759개 의 성곽이 있었으며 현재도 120여 개의 성곽이 여러 형태로 남아있다. 도성은 산성, 읍성, 장성, 토성, 석성 등의 성곽 중 최고의 완성된 형태이며 공동체 행위의 결정체인 구조물이다. 이러한 도성이 일제 강점기를 시작해서 훼손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까지도 ㅌ호텔의 골프연습장을 만들기 위해 또다시 훼손 되었다.

청계천 복원 전 한양도성 먼저 복원됐어야

필자는 청계천 복원 전에 우선 한양도성을 복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 복원이 당장 어렵다 하더라도 도성이 존재했던 느낌이라도 복원하기를 바랐다. 거대도시 서울에 16.5km의 아주 오래된 문화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살고 있다.

한양도성의 선을 따라 가보면 좌청룡인 낙산(대학로)에 공연의 거리, 문화예술의 거리로 특화하고 조금 더 가면 이현(동대문 시장)시장이다. 현재의 동대문 시장규모는 세계적인 의류상권으로 성장해 있다. 과거부터 난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얼마나 알까? 작은 난전이 세계적인 시장이 되었으니 얼마나 생존력이 강한가를 알 수 있다. 이곳은 경제특구로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낙산 성곽

그 옆에 가면 동대문운동장과 장충체육관과 장충단 공원이 있다. 이 곳은 시민들을 위한 생활체육공간으로 전용하고, 조금 더 올라간 곳의 국립극장은 전통예술 공연장으로 상설화해야 한다. 그 옆의 남산에는 남의 땅에서 주인 행사하는 미군의 휴양소가 있다. 속히 철거되어야 할 건물이다. 남산은 서울의 허파로 보존하고 시민휴식공간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다시 조금 더 가면 칠패(남대문시장)시장이 있다. 이 역시 이현시장처럼 경제관광지구로 특화했으면 좋겠다.

다시 조금 더 가면 정동이다. 정동에는 근대교육기관과 근대 외교단지가 존재하고 있다. 정동을 근현대사 역사 현장으로 보존할 요소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마땅히 미국대사관과 대사관직원용 아파트 건립도 철회되어야 했었고 4년 반의 긴 싸움 끝에 미대사관은 용산행으로 결정 났지만, 만약 정동을 느릿느릿 걸어가는데 17층의 미국대사관 그림자가 나를 방해한다면 매우 불쾌할 것이다.

이렇게 현존하는 도성의 흔적을 느낌으로나마 복원하면서, 도성의 선을 따라 형성된 지역의 장점을 특화한다면 거대 도시 서울은 600년 고도의 명분을 되찾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봤다.

청계천 복원은 생태학적, 환경적, 구조안전적으로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서울의 역사와 문화유산의 복원과 활용을 염두 해두면서 600년 도시 형성의 맥락과 연계된 긴 호흡으로 이루어져야했다. 따라서 무조건 철거를 할 것이 아니라 문화재 지표조사를 토대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발굴조사가 선행되어야했다.

▲청계천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 바리게이트를 쳐 놓은 모습

앞에서도 밝혔지만 청계천은 600년 도시의 배수구였으며 600년 도시생활사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곳이다. 600여 년을 인간들의 온갖 모습들의 잔류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청계천이다. 단지 석재와 유구가 남아있는 곳을 부분발굴을 하겠다는 서울시의 짧은 판단에는 문제가 있었다. 청계천에서 다양한 생활상들이 발굴되는 것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치와 희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명심했어야 했다.

청계천은 도시 배수구로 퇴적물은 600년 인간 희노애락 고스란히 간직한 문화인류학적 보고

청계천 퇴적물에는 600여년 인간의 희노애락을 간직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였으며, 당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묻혀진 역사를 찾아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우리는 배고픈 1940~70년대와 배부른 1990~ 2000년대 살면서 알게 모르게 파괴하고 훼손시킨 유적지(근대 문화유산과 생활사 포함)들이 많이 존재한다. 과거시절이야 모르고 지났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일방적인 개발론자들은 청계천 복원에 긴 호흡과 합리적이고 다양한 인류문화상태의 근본적인 점검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비장하게 귀기울여야 했었다.

▲청계천 통수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관계자들

필자가 분명하게 예단할 수 있는 것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간직한 현장을 단 몇 개월의 탁상공론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새만금이나 시화호같은 사례가 재발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청계천 복원 사업이라는 것이다.

서울시 곳곳에 걸려있었던 "역사와 문화복원-청계천복원사업" 이라는 개발독재시대의 최대 수혜자의 거짓말을 무조건 따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역사문화복원이라는 허위의 논리로 가득 찬 정치경제적 세력들의 ‘자기만 살기식’인 청계천 복원은 재고되었어야 했으며, 전 서울시민의 축제의 힘 같은 공감대 형성이 우선되는 청계천 복원이 되어야 했었다.

얼마 전부터 훼손되고 사라져간 문화유산에 대해서 복원이라는 용어가 무분별하게 남발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문화재에 대한 원형복원은 불가능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복원이라는 단어에는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고 싶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을 그대로 보여주는 지극히 폭력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토건세력들은 청계천 복원을 정치적 야욕을 내세워 역사·문화 복원이라는 미명으로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최고의 권력가인 흥선대원군조차 경복궁을 다시 지으며「경복궁 중건」이라고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청계천은 조선의 중심인 한양의 도성궁궐과 함께 600년의 역사가 흐른 곳이다. 그런데 청계천을 겨우 2년 넘은 공사로 복원(?)을 했다고 야단법석이다.

광통교는 제자리를 떠나버린 외로운 섬이 되어버렸고, 광통교 중건 공사 중에는 콘크리트 하수관로 때문에 몇 백 년 전해온 광통교의 바닥돌을 무단으로 깎아버렸고, 서울시는 호된 질책을 맞고는 하수관로를 이동시켰다. 중건한 광통교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화강암 조각의 기법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소개할 수 있는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적 가치는 상실되어있다. 또한 조선시대 다리공사의 토목기법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으며1800년경 확장된 광통교의 흔적을 살리지 못해 역사성마저 상실한 광통교가 되고 말았다.

▲외로운 섬이 되어 버리고 제 모습과 제 자리를 잃어버린 광통교

청계천 시궁창 밑에서 마치 고대 그리스 유적의 신전처럼 당당히 나타났던 양측면의 석축들은 이리저리 그라인더로 가공되어 신형부재들 사이에 초라하고 지친모습으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다.

복원(?)으로 외로운 섬 된 광통교, 아직도 제 자리 찾지 못한 수표교

수표교의 경우는 문화재 위원회에서 「원위치에 온다」라는 결정을 통보했지만 서울시는 다른 공사는 2년에 마치면서 수표교의 안전성 검사를 핑계로 대며 아직까지 검토결과를 공식적으로 보고조차 하지 않고 있다. 수표교 남측의 교대(다리벽) 매입에 몇 백억이 든다는 모호한 숫자공포주의를 흘리며 수표교 제자리 찾기에 핑계만 대고 있다. 시장 한마디에 몇 십 억 원을 써가며 다른 다리의 디자인을 바꾸는 이율배반을 보였으면서 말이다. 오간수문 역시 문화재위원회에서 발굴된 기초석들을 후대에 도성을 중건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원위치에 놓으라고 결정했으나 서울시는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다.

▲발굴된 수표교 기초석과 수표교를 고정시켰던 기초석

 

▲발굴된 오간수교 기초석

아마도 서울시의 오만은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유일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중랑하수종말처리장에는 서울에서 모여온 각종 오물들과 잡초 속에서 훼손·방치된 청계천 출토 석재들이 나뒹굴고 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이명박식 청계천 재건을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는데 악착같았으며, 가짜 청계천 복구를 발판으로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권력자로 등단했다. 그렇지만 결국 청계천은 우리나라 문화재 중건 공사 중 최악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나는 청계천문화재위원으로서 역사와 문화유산 앞에 죄인이며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 아직까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필자 프로필>
문화연대 약탈문화재환수 특별위원회 위원장
종로역사문화박물관(육의전) 개관준비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