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 임동현 객원기자
  • 승인 2012.03.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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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맘대로 현대문학] ‘애정남’ 박인환의 ‘달과 서울 사이’(6)

 

어린 딸에게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죽음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 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哀訴)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박인환은 슬하에 3남매를 뒸는데 그 중 유일한 딸이자 막내인 세화를 가장 사랑했다. 세화는 박인환에겐 딸 이상의 존재였을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태어난, 일곱 번이나 이사를 다니며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태어나고 태어나자마자 목숨을 위협받으며 옷도 입지 못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한 세화.

아버지 박인환은 그 세화가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리고 세화에게 부끄러웠을 것이다. 소중한 딸, ‘호수처럼 푸른 눈을 가진’ 딸에게 맨 처음 보여준 세상이 바로 전쟁으로 깨지고 파괴된 세상이라니. 어디서 태어난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야하는 세상을 물려줬다니. 박인환은 지금 전쟁으로 물든 세상을 살아야하는 세화에게 한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박인환이 끝까지 사랑한 여자, 이정숙

지금 우리는 ‘센티멘탈’, ‘댄디보이’로 인식된 박인환을 벗어나 전쟁으로 피폐된 세상의 분위기를 노래하는 ‘현실시인’ 박인환을 만나고 있다. 그는 우리들의 낭만, 우리들의 행복한 삶이 분단과 전쟁으로 무너지고 없어지는 것을 슬퍼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친구들이 전쟁의 상처에 신음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앞에서도 밝혔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사랑한 여자는 바로 부인인 이정숙이었다. 워낙 멋쟁이인 박인환이다보니 여성팬들이 줄을 이었고 그래서 박인환이 혹시 바람둥이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당시 박인환만한 페미니스트는 없었다는 것이 문학인들의 의견이다. 어느 여성 독자에게 직접 받은 셔츠를 포장을 뜯지도 않고 바로 개천에 내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박인환은 오직 이정숙 외엔 없었다.

박인환이 죽은 얼마 뒤, 부인 이정숙이 명동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돈다. 바로 ‘바 나이아가라’라는 술집의 마담이 된 것이다. 그녀는 진한 화장을 하고 남자들과 술을 마셨다. 남편을 죽였던 술, 그 술을 아내가 마시고 있다. 그렇게 명동에 나타났다.

문인들은 크게 놀랐다. ‘명동의 비극’이라며 탄식하는 이들도 있었고 ‘기왕 마실 거 인환이 아내에게 팔아주자’며 바를 찾는 이들도 있었다. 시인의 아내가 술을 판다고, 웃음을 판다고 손가락질해도 좋다는 이정숙의 눈물 앞에서 문인들은 고개를 떨궈야했다. 박인환의 아이들에게 연필 한 자루, 공책 한 권도 사주지 못했던 문인들의 부끄러움이 명동을 감쌌다. 포화는 멈췄지만 ‘호강’도 ‘행복’도 없었다. 퍽퍽한 삶만이 남아있었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던’ 그 현실 속에서...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와 숙녀>)라는 싯구는 어쩌면 멋으로 꾸며낸 말이 아니라 그가 본 서울, 그가 본 한국 사회의 모습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인환의 시야말로 현실주의에 더 가깝다는 몇몇 학자들의 평가가 주목을 끌고 인정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수영이 박인환의 시에 엄청난 독설을 퍼붓고 김관식이 계속 폭음과 기행으로 자신을 망치고, 그리고... 박인환이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계속 마신 것은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린’ 현실을 버텨보려는 필사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속에서 박인환이 쓰러진다. 1956년 3월 20일, 지금의 광화문 교보빌딩 자리에 있던 그의 집 앞에서...

글쓴이:'임동현

세상사, 특히 문학, 영화, 예술에 관심은 있지만 기웃거리기만 하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글쟁이 겸 수다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