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한국무용가 김현자 한예종 교수] 춤의 본질… 그곳엔 변화가 있다
[인터뷰 - 한국무용가 김현자 한예종 교수] 춤의 본질… 그곳엔 변화가 있다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정리 윤다함 기자
  • 승인 2012.05.08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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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자 춤 60년 - MY LIFE’, 16일, 17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바람처럼 구름처럼' 대자유 꿈꿔… 

무용가로서 60년 외길인생을 걸어온 김현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교수. “참… 세월이란 게 지날 땐 더디고, 지나고 나니 언제 이렇게 다 지나갔나 싶어요. 너무 오랫동안 춤을 췄나하는 생각도 들고”(웃음)

한국전쟁이 끝나고 혼란 속 격변의 시절, 그의 스승인 故황무봉 선생은 우연히 그의 집을 찾아오고, 집 마루에서 스승으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5살 때 일이다. 그래서 그는 춤이 운명이고 숙명이라 믿었는지도 모른다. 아무 연고 없이 우연히 그를 발굴해낸 스승과 60년 세월동안 아무 잡념 없이 춤에 집중한 그 자신까지도 모두 그저 신기할 따름이라고. “한번쯤은 다른 걸 해볼까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어쩜 그리 춤에만 매달려왔는지… 예술가의 길이란 응당 그런 것이라 생각해 잡념 하나 없이 오로지 춤에만 집중했죠. 다른 길에 대해선 궁금해 해본 적도 없어요”

이런 그의 춤 인생 60주년 결산 공연 ‘김현자 춤 60년 - MY LIFE’가 오는 16일과 17일 양일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한국 무용계의 창작 텃밭을 튼실하게 일군 교육자이자 안무가 그리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며 시대를 앞서온 예술가로서 걸어온 60년을 되돌아보는 자리이다.

-먼저 춤인생 60주년 축하드립니다. 이번 공연은 좀 더 특별할 것 같습니다.
“이번 공연은 제 춤인생을 돌아보는 자리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정년퇴임 기념 공연이기도 합니다. 제가 직접 무대에 오르진 않고 안무는 두 작품 했어요. 60년동안 뿌린 씨앗들이 자라 새싹 나온 걸 선보이는 마음이랄까요?(웃음) 좀 더 편하게, 삶을 관조하는 자세로 공연을 준비했어요. 주장도 털어내 버리고 단순화했죠. 특별한 의도 없이 준비했기에 이번 공연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 공연에서는 제 후기 예술인생의 대표작 두 편 ‘연화연’(蓮花淵)과 ‘매화를 바라보다’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연화연’은 연못에 피는 연꽃을 시각화해 춤 언어로 나타낸 작품으로, 새벽에 피어난 연꽃이 큰 봉오리를 여는 모습을 표현했어요. ‘매화를 바라보다’는 가야금 산조에 맞춰 달빛과 매화의 이미지를 담아, 달빛과 매화를 바라보는 여성의 낭만적인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첫날 공연에 앞서, 그의 제자들이 마련한 ‘김현자·생(生)·명(命)·춤’ 출판기념식도 함께 열린다. 비평, 신문기사, 어릴 적 사진 등 그의 60년 춤 인생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담았다. ‘생’은 그의 춤인생 화두를, ‘명’은 그의 운명을 뜻한다고 한다.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해오셨고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오셨습니다. 특히 ‘생춤’은 뉴욕타임스에서 ‘lived dance’로 소개하며 동양 특유의 춤 미학을 보여준다고 평가 받았습니다.
“많은 실험들을 해왔지만 가장 주안점을 뒀던 건 바로 몸 그 자체였습니다. 몸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했어요. 춤의 테크닉보단 몸 자체가 화두된 거죠. 오랜 시간 받아왔던 춤사위 교육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춤의 문법에서 해방되고 싶었고…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려놓고 몸 그 자체로 처음부터 시작해보자는 마음이었는데 당시 상당히 혁명적이었어요. 30년 배워왔던 춤을 버리고 어떤 걸 할 수 있을까 생각했죠.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안해 낸 게 바로 생춤이었어요. 40대 초반이었죠. 성공이냐 아니면 파멸이냐 둘 중의 기로에 서있었어요. 실패하면 춤을 떠나야겠다는 생각까지도 했으니까요”

그는 1985년 럭키창작무용단과 함께 ‘황금가지’를 선보이며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한복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무대를 누비는 무용수들은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다. 자연과 인간만이 존재하는 원시를 표현한 이 작품은 무용수들의 탈의에 대해 논란이 됐다. 그는 현대란 가장 원시적인 것과 맞닿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결국 무용단을 나와 1989년 ‘늘 함이 없음을 깨닫고’와 ‘다시 없음이 되어’를 통해 생춤을 시작하게 된다.

-2006년까지 국립무용단장을 지내셨습니다. 레퍼토리의 다양화를 꾀하겠다고 다짐하시던 게 생각납니다.
“이전까지 국립무용단은 극무용 위주로 활동해왔었어요. 극적 구성이 있으면 대중들에게 흥미를 주기도,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는 여러 장점이 있긴 해요. 하지만 전 그것만이 춤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해왔던 제 스타일을 한번 이식해 보겠다는 생각이었죠. 국립무용단에겐 실험과도 같았을 겁니다. 초기엔 단원들이 익숙하지 않아 낯설어 했어요. 생각하고 그 생각을 공유하는데 시간이 걸렸지, 한번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적응은 아주 빨랐습니다. 그 결과, 단원들의 생각의 폭이 보다 훨씬 넓어지게 됐죠. 이미지로 구성하는 대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갖게 됐고요. 스토리 위주로 가면 춤이 딸려가는 느낌이고, 관객들의 감상의 폭이 좁아지게 됩니다. 하지만 제 작품은 보는 사람의 인생만큼, 보는 사람이 갈망하는 만큼 개인의 생각대로 느끼고 가져갈 수 있어요. 다들 각자의 눈높이로 작품을 받아들이는 거죠. 메아리와도 같은 공연이 되길 바랐던 겁니다”

-1992년 백남준 선생과 합동 공연 ‘백남준의 퍼포먼스와 김현자의 춤’은 당시 엄청난 화제였죠.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공연이 확정되고 제가 백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죠. 뭘 준비해야하냐는 제 질문에 선생님께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시더군요. 당시 저는 둘이 공연을 같이 한다하면 공연 직전까지 몇 개월간 매일 붙어살다시피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개념이 잡히질 않아 또 전화를 드렸더니 역시나 똑같은 답을 주셨어요. 그러니 이젠 다시 전화도 못하겠고 제 속만 타들어간 거죠 뭐.(웃음) 공연 당일에서야 처음으로 무대를 서로 맞춰봤어요. 하지만 어색함 하나 전혀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습니다. 선생님은 피아노 아래에 톱을 두셨고, 저나 관객들이나 모두 ‘저 톱으로 피아노를 깨부술 모양인가보다’하고 있었는데 공연이 끝나갈 그때까지도 톱은 손도 안대셨어요. 그리곤 선생님과 저는 무대를 퇴장했습니다. 그런데 무대 퇴장 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관객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 거예요. 피아노를 깨부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그때 선생님은 무대 위로 다시 올라가셔서는 객석을 향해 소리치셨어요, ‘다 끝났으니 이제 좀 가세요!’라고”(웃음)

-공연이 열린 해는 백남준 선생님의 회갑이자 문화부가 지정한 춤의 해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모로 선생님께도 뜻 깊은 공연이었을 것 같습니다.
“제겐 제 평생을 통틀어 가장 큰 영광의 무대였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한동안은 정신을 못 차렸어요. 제겐 선생님의 그런 자유로움과 거리낌 없음이 감당 못할 만큼 너무도 컸거든요. 지금 와서나 이렇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거지, 당시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어요. 진공상태라고 해야 할까요… 몽롱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죠. 선생님께서는 왜 꼭 두 사람이 뭔가를 함께 맞춰서 준비해야하냐고, 우린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 안에 존재했고 최선을 다 했으니 된 것 아니냐고 하시는데, 그 말을 듣고 뭔가에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저 또한 평생 자유를 추구하며 ‘겸허한 해방을 위해’란 타이틀을 달고 생춤을 추면서도 다시 예술이란 것에 얽매이고 있었던 겁니다. 선생님과 함께 하며 그때서야 깨달은 거죠. 진정한 대자유가 무엇인지…”

-97년에 뜻하지 않은 무릎부상으로 한동안 무대에서 뵙지 못했습니다. 그때 심정이 어떠셨는지요?
“신께서 제 몸을 거두어 가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젠 움직이지 말고 더 깊이 생각하고 사유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죠. 연주자가 악기가 고장 나면 연주를 못하듯이 무용가는 몸이 부서지면 끝이란 생각이 들어 참담했어요. 제자들 잘 가르치고, 안무로나마 작품 활동하며 절절한 심정을 해소했죠…”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눈가가 조용히 젖어들었다. 무릎에 이상을 느꼈지만 회복될 겨를 없이 무대를 누벼온 그는 결국 90년대 말부터 5년간 무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많은 행운이 따라주며 탄탄대로를 달려오다 브레이크가 걸린 심정이었다고.

-오는 8월이면, 한국종합예술학교 무용원 강단을 떠나십니다. 이후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뭘 해야겠다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으려고요. 바람처럼 구름처럼 어디에 매이지 않겠다는 게 계획이라면 계획이겠죠? 그저 생각도 마음도 훌훌 털어버리고 좀 더 가벼워질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무용은 여전히 대중들과 거리가 있는 공연 장르입니다.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필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현재 무용은 대부분 대학교수님들이 주류를 이뤄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작품이 아카데믹하고 순수한 대신 대중성하곤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요… 무용은 상업화되지 않아 여전히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다만 보다 더 작품의 완성도와 질을 높이고, 뛰어난 무용수들을 양성하기 위한 여건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게 아쉬워요. 공연 하나 하는데 몇 달씩 고생해서 준비하지만, 자본이 없어 장기대관은 꿈도 못 꾸고 며칠 공연하는 것에 만족해야하죠. 그리고 비용이 없어 홍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요. 결국 악순환인 거죠. 이 시점에서 매스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요즘 뮤지컬이 한창 인기가 있죠. 지금 이 단계가 지나면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절로 생길 것이라 확신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대중들이 스스로 우리 것을

찾을 거라 믿고 있어요”

인터뷰 중 울리는 벨소리에 그가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망백을 넘긴 그의 어머니께서 공연 준비로 끼니를 잘 챙겨먹지 못할 딸을 걱정하며, 간장게장을 담아주시겠다는 전화였다. “제 성공의 많은 몫은 어머니 몫이세요. 평생 제 밑받침이 돼 주셨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이렇게 절 챙겨주세요” 지금까지의 춤인생을 되돌아보면 거기엔 늘 어머니가 계셨다고 한다.

아름다운 미모와 타고난 춤사위로 스타 무용가로 군림해오며 한국 무용계의 르네상스를 이끌어온 김현자 교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그곳, 글자가 표현하지 못하는 그곳을 어루만질 수 있는 건 오로지 춤뿐이라고 했다. 무용계는 물론 문화예술계 전체가 주목하고 있는 이번 공연에서 그가 평생 쫓았던 춤의 순수성과 본질성이 무대에 오른다. 지천으로 피어나는 봄꽃 속에서 그의 60년을 되돌아보는 춤의 향연이 기대된다.

김현자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교수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 교수 △부산시립무용단 상임안무 △럭키창작무용단 상임안무 △국립무용단 단장 및 예술감독 △제6회 대한민국 무용제 대상 △2003년 대통령 표창 △백남준의 퍼포먼스와 김현자의 춤 공연, 서울-뉴욕 MAX MEDIALE 초청공연, 뉴욕 ASIA SOCIETY 초청 공연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