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민, 한양도성 여행기' 그 첫번째 이야기
'서울시민, 한양도성 여행기' 그 첫번째 이야기
  • 서문원 기자
  • 승인 2012.07.2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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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체육관에서 혜화문까지 시대별로 쌓인 형형색색의 성곽들

지난 1월 31일 눈비가 쏟아지던 날,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전문가와 함께 하는 원순씨 의 한양도성 순성’코스를 다녀온 바 있다.

당시는 새벽 6시부터 복원이 한창이던 숭례문에서 출발, 남산에 위치한 한양도성을 따라 신당동 집집사이로 얽힌 도성을 보며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흥인지문을 거쳤다.

▲ 오전 11시 장충체육관을 출발해 신당동 한양도성을 따라 광희문 앞까지 왔다.

그 뒤 낙산자락에 위치한 혜화문, 그리고 북한산 정상까지 순서를 밟아 걸어갔다. 그때 기자는 “서울시내에 자리 잡은 한양도성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한양도성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형식적인 도성복원은 없다”라고 발언했던 박원순 시장도 기억난다.

사실 알고 보면 서울시는 역사탐방은 물론 서울시내관광지로서, 산행과 산책로로서 서울시는 가장 중요한 자산을 가졌던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남한산성을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자 복원사업이 야심차게 추진됐으나 도성이 또다시 콘크리트로 개축된 점을 감안하면 한양도성은 좀 더 신중한 문화재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 사진은 앵무새를 어깨에 달고 가는 여성. 참고로 낙산공원의 성곽은 쌓아올린 돌 모양이 각기 다르다. 이는 무너질때마다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민 한양도성 여행기’ 첫 번째 여정

지난 14일 오전 인터넷저널 최방식 국장(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코리아 편집국장)의 제안으로 한 달 동안 계획한 ‘서울시민, 한양도성 여행기’는 장충체육관 앞에서 최방식 인터넷저널 국장과 기자들 화가 다비드 예가네씨, 여행생협 ‘밝은마을’ 회원들이 모여 출발했다.

바로 전날 종로구청 김진수 관광산업과장이 준 ‘한양도성스탬프 투어’지도를 나눠주고 신당동 사이에 연결된 한양도성부터 찾아갔다. 빼곡이 들어찬 주택사이로 보이는 복원조차 안된 도성들을 뒤로하고 골목골목을 지나 창의문으로 걸어갔다. 최 국장은 ‘일일여행가이드’를 하며 광희문에 대해 설명했다.

최 국장은 “4소(小)문((창의문·광희문·혜화문·소의문)중 하나인 광희문은 예부터 도성 안 시신을 밖으로 내보내는 문으로 ‘주검 시(屍)’가 포함된 ‘시구문’(屍軀門)이 당시 이름”이라고 말했다. 듣자하니 이곳은 조선 말 신유(1801년), 병인박해(1866)로 한양도성 내에 시신을 둘 수 없어 4대문 사이에 위치한 서소문과 광희문뿐이었다.

그중 광희문은 서소문처럼 귀한 양반이 돌아가시고 상여가 나가는 그 문(門이) 아니라, 평민들이 가마로 덮어 갖고 나가거나 내버리는 곳이다. 당시는 배교조차 못한 천주교인들의 시신으로 가득했다고 전한다. 순간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제마저 잃어 갈 곳조차 없던 어린아이들의 구걸과 곡소리가 눈에 아른거렸다. 안 그래도 날씨도 우울한데 광희문에 얽힌 사연을 듣고 가슴속이 뭔가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구슬픈 비사를 뒤로하고 일행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발견 뒤 복원했다는 서울성곽과 이간수문은 물론, 지방군 훈련과 치안을 담당한 ‘하도감’(下都監)터와 훈련원 터를 둘러봤다. 최 국장은 이간수문은 ‘백성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라고 말하면서 “도성 밖 천민과 장사치들이 중국산 물품을 거래하고 때로는 잠입을 시도했다”고 설명했다. 신분이 분명치 않으면 도성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란다.

한참 설명하고 최 국장은 일행들을 방향을 돌려 ‘전태일 열사 흉상’이 있는 평화시장 버들다리로 향했다. 가던 도중 평화시장 길가에 보이는 중고서점들 그리고 오래된 책들이 눈에 띄었다. 한때 참고서와 외국어사전 가격이 비싸 일부러 찾아갔던 곳. 이제는 다양한 참고서는 물론 외국 디자인서적들이 즐비하다.

▲ 한양도성 여행일행, 평화시장 버들다리 전태일 흉상 앞에서

전태일과 닭칼국수

지난 1970년 평화시장 재봉사로 일하던 중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해 22살의 꽃다운 나이로 고인이 된 전태일, 그는 한국 최초 노동인권운동가였다. 19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죽음’(훗날 전태일 평전 돌베개)에서는 전태일이 분신직후 “배가 고프다..”라는 말을 남긴 채 사망했다고 한다. 

이젠 직종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비정규직. 같이 온 일행 중 한명은 “모두에게 전태일은 또 다른 귀감이 됐다”고 말하며 한참동안 흉상을 바라봤다. 솔직히 전태일 열사가 귀감은 됐어도 변한 건 별로 없어 보인다. 한국은 자칭 ‘진보’라는 가면을 쓰고 온갖 추태를 부리는 사람들도 제법 늘었고, 노동자들의 삶은 너나 할 것 없이 여전히 고단하기만 한데 무슨 얘기일까? 라고 중얼대는 순간, 별별 생각들이 떠올랐다. 

흉상을 지켜보며 배가 고팠다.. 인간이란.. 숭엄한 장소에서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최 국장과 일행이 향한 곳은 전태일 흉상 건너 동대문종합시장이었다. 오랜만에 피맛골 골목길을 지나는 느낌이 들었다. 알록달록한 시장골목을 지나니 일본과 중국관광객들도 제법 눈에 띄었고, 곳곳에 음식점들이 들어왔다.

▲ 동대문종합시장 닭칼국수 집에서. 마침 방송사 기자가 우리 일행에게 다가와 취재를 했다. 이유는 하나. 일본과 중국 관광객은 많아도 서구인은 다비드 예가네 씨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메뉴는 닭칼국수, 유명한 곳인 것 같았다. 외국관광객들이 카메라 폰으로 여기저기 촬영하고, 심지어 방송사에서 나와 사람들 먹는 모습을 취재해갔다. 다비드 예가네 씨는 ‘한국 와서 처음 마셔본다’는 막걸리를 한잔 하며 맛있다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방송기자 취재에 적극적으로 응해줬다.

식사를 마친 뒤 흥인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각자 가져온 종로구청 서울성곽 스탬프투어의 정점을 표시하고자 바로 옆 안내소에 붙은 기념스탬프를 찍었다. 이어 동대문디자인센터(옛 이화병원)을 넘어 낙산으로 올라가는 길.

낙산 주변은 현재도 개발이 안 된 곳이다. 한옥가옥도 여러 채 보이고 길게 놓인 도성 밖으로 채석장으로 알려진 창신동이 보였다. 그 채석장에서 돌들을 가공해 한양도성을 쌓았다고 하니 백성들의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만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지만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아침부터 기상청에서 ‘폭우가 쏟아진다’고 예보했지만 여지없이 빗나갔다. 오죽하면 민간보험사가 기상예측을 발표했을까?

▲ 동대문 흥인지문 안내소앞에 있는 스탬프를 갖고온 관광안내지도에 찍었다. 서울시민 여행객들에게는 기념이다.

머리 속을 맴돌던 ‘청계천 8가’

마지막 장소인 혜화문으로 향하는 길. 그곳에서 멈췄다. 더 올라가면 와룡공원 그리고 북한산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오후 3시까지 통행이 가능하다. 시간도 다됐고 하산하기로 결정하고 성북구 안암천으로 걸어갔다. 뒤풀이를 위해서다. 뒤풀이 장소에서 일행들은 ‘이야기보따리’를 하나둘씩 내놨다.

“한양도성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 인줄은 몰랐다”부터 사는 이야기, 자녀교육, 프랑스 이야기 등등 하다 보니 뒤풀이도 어느덧 끝났다. ‘다음 여정은 혜화문에서 출발한다’는 약속을 하고 비가 쏟아지는 길거리에서 해산했다. 어디선가 천지인의 ‘청계천8가’가 들려왔다. 아니... 가만 보니 하루 종일 글쓴이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칠흙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서울시민 한양도성 여행기 1부를 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