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탄생 100년, 그가 남긴 화두는?
백석 탄생 100년, 그가 남긴 화두는?
  • 최경호 객원기자
  • 승인 2012.07.26 14: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석문학전집’ 2권 나와... 비평문학회, 30일 학술대회 열어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평안도(平安道)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여인(女人)은 나 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섭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 '여승'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손꼽는 시인 백석. 백석(1912년∼1996년)은 그가 작품활동을 했던 시대 어느 문학동인이나 유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홀로 작품활동을 한 ‘독고다이’ 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마을을 둘러싼 자연과 사람, 그 마을에서 내려오는 민속과 속신(俗信)을 밑그림으로 그 지역 토착어(土着語)를 시로 가장 뛰어나게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1일 시인 백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문학전집이 나오면서 시인이 살아낸 삶과 문학을 되짚어보는 학술대회가 잇따라 열린다. 천재시인으로 불리는 백석. 삶 끝자락을 몹시 아프고 가슴 시리게 살다 마감했던 그 시인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남긴 화두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백석문학전집>(2권, 서정시학)이 나왔다. 이번 전집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도 사리알처럼 박혀 있다. ‘등고지’,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조국의 바다여’ 등 시 3편, ‘문학 신문 편집국 앞’, ‘관평의 양’, ‘가츠리섬을 그리워하실 형에게’, ‘체코슬로바키야 산문 문학 소묘’ 등 산문 4편이 그 작품들.

이 시와 산문들은 남한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로 1957∼1962년 북한 ‘문학신문’에 실렸다. 이번 전집에는 모두 5부에 작품연보와 연구자료목록, 후기 백석 문학의 전체 등이 함께 실려 있어 백석 그 속내를 살펴보기에 더없이 좋은 사료집 역할까지 하고 있다.

제1부 ‘시’에는 ‘그 母(모)와 아들’, ‘마을의 遺話(유화)’, ‘닭을 채인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제2부 ‘수필’에는 ‘해빈수첩海濱手帖’, ‘무지개 뻗치듯 만세교’, ‘소월素月과 조선생曺先生’, ‘조선인朝鮮人과 요설饒舌’ 등 18편이, 제3부 ‘평문’에는 ‘막씸 고리끼’, ‘동화 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나의 항의, 나의 제의’ 등 8편이 들어 있다.

제4부 ‘정론’에는 ‘침략자는 인류의 원쑤이다’, ‘아세아와 아프리카는 하나다’, ‘사회주의적 도덕에 대한 단상’ 등 7편이, 제5부 ‘번역문’에는 ‘耳說 귀ㅅ고리’, ‘창작의 자유를 론함’, ‘생활의 시적 탐구’ 등 8편이 백석 자화상처럼 실려 있다.

서정시학은 “이번 전집이 백석 문학의 정본(定本)”이라며 “그동안 발굴됐던 작품을 원본과 일일이 대조해 오류를 잡았다”며 “‘동식당’으로 알려졌던 시 제목은 ‘공동식당’이라는 본래 이름으로 바로잡았고, 후반부가 잘려나간 채 소개됐던 시 ‘나루터’도 전문을 실었다”고 밝혔다.

서정시학은 “백석이 번역해 펴낸 러시아 작가 숄로호프의 대하소설 ‘고요한 돈’ 1, 2권을 중국 옌볜(延邊)대 도서관에서 발굴해 올해내 전자책으로 선보일 예정”이라며 “1912년 7월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은 1995년 1월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부인 이윤희씨의 편지)”고 설명했다.

서정시학은 “1930년 19세의 나이로 등단, 1936년 시집 ‘사슴’을 출간하며 혜성처럼 문단에 나온 백석은 북한 당국에 의해 1959년 1월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추방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양치기로 살았다”고 덧붙였다.

시인 백석(白石)은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으로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태어났다. 시인에게는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라는 아호(雅號)가 있었으나, 작품에서는 거의 ‘백석(白石)’을 쓰고 있다.

시인은 1929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마쳤다. 그 뒤 8.15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함흥 소재), 여성사, 왕문사(旺文社, 일본 동경) 등에서 일하면서 시작활동을 했다.

1930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마을의 유화(遺話)’, ‘닭을 채인 이야기’ 등 산문 몇 편과 번역소설 및 논문을 썼다.

1936년 1월에는 33편 시를 4부로 나눈 시집 <사슴>을 펴낸 뒤 남북이 분단되기까지 60여 편에 이르는 시를 그가 맡고 있었던 <여성>지와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해방 뒤에는 고향인 정주로 돌아가 아동문학과 번역에 매달리며 시는 발표하지 않았다.

1957년에는 북한에서 아동문학 논쟁이 벌어지자 계급적인 요소를 강조하기보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는 게 옳다는 주장을 펼치다가 “낡은 사상의 잔재”라는 비판을 받고 1959년 1월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보내졌다. 삼수에 내려간 시인은 농촌 협동화 과정에서 찾아낸 새로운 공동체를 노래한 시와 함께 북한 체제 선전 및 김일성 찬양 요구를 담은 정치 시들을 선보였다.

1962년에는 동시 선집 <새날의 노래>를 펴낸 뒤 붓을 꺾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석은 그동안 1963년을 앞뒤로 북한 협동농장에서 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삼수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1996년에 눈을 감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