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박정욱 명창] “한복집, 가례헌과 맞물려 우리문화 발전 꾀하고 싶다”
[인터뷰-박정욱 명창] “한복집, 가례헌과 맞물려 우리문화 발전 꾀하고 싶다”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글 윤다함 기자
  • 승인 2012.09.2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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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청담동에 개업… 전통의례의복 대중화 위해…

감출 수 없는 ‘한복DNA’, 이제야 뜻 이뤘다

전통문화관 ‘가례헌’, 국악·오페라 등 장르 불문 상설공연 인기

     어렸을 때부터 상여소리, 초상 곡소리, 제사 지내는 소리가 모두 공연처럼 느껴졌다는 박정욱 명창. 동네 시조방에서 어르신들 사이에 거리낌 없이 껴들어 시조창을 배우던 10살 소년이 오늘날 무대를 휘어잡으며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호응이 좋은 인기명창이 된 건 아마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학창시절에도 별다른 소리교육은 받지 않고 그저 라디오를 들으며 따라 부르는 게 전부였다는 그는 더 이상은 감출 수 없는 꿈을 깨닫고 급작스럽게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서울로 상경한다. 국악인 인간문화재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말이다.

     그는 결국 서도소리 이수자에 그쳤지만, 관객 그 누구도 그 점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의 맛깔스러운 소리와 신명나는 무대는 이제 ‘가례헌’이라는 전통문화관에서 매주 상설공연으로 만날 수 있어서 소리에 익숙지 않은 요즘 학생들도 블로그에 가볼만한 곳이라며 연신 후기를 올리고 있다. 이런 그가 얼마 전, 강남 도산공원 근처에 ‘전통의례문화’를 표방하는 한복집을 개업했다. 늘 사람 좋은 웃음을 달고 살며 스승들 일에는 먼저 발 벗고 나서는  박정욱 명창. 30년 구력에 잘 나가는 소리꾼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한복집을 열게 된 속 얘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1965년 거창 출생 △박정욱한복 대표, 가례헌 관장, 한국서도소리연구보존회 이사장, 중요무형문화재 제90호 평산소놀음굿 예능이수자,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이수자 △2010 중구문화예술체육상, 1991 제8회 KBS 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통령상

-한 달 전, 한복집 ‘박정욱한복’을 열었다. 소리꾼과 아예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복집을 차리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원래 꿈은 ‘한국의례연구소’를 만드는 거였다. 국악을 현대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 전통의례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의례 연구소라는 게 너무 거창하게 들리니까(웃음)…, 가례헌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고, 이젠 한복 중심의 문화권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에 한복집을 차리게 된 거다. 무엇보다도 난 한복을 입고 공연을 하지 않나. 나처럼 남자들도 얼마든지 한복을 입고 생활할 수 있을 텐데, 한복의 대중화에 힘쓰고 싶었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론 국악의 발전도 꾀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전통의례를 연구하고 보급하는 데 있어서 가례헌과 함께 이 한복가게가 맞물리는 문화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한복이 본인에게 어떤 개인적인 의미가 있나?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서 바느질을 해 오셨다. 그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였는데, 새벽까지도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에 행복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내 첫 무대 의상도 어머니께서 직접 지어주셨다. 이렇듯 어머니의 영향도 있겠지만, 내겐 한복DNA가 있는 것 같다. 아직까지도 넥타이 하나 잘 맬 줄 모르지만, 한복고름 하나는 아주 예쁘게 잘 맨다. 차려 입는 곳 가야할 때면 양복 말고 한복으로 점잖게 멋을 내곤 한다.”

-한복 바느질을 어머니의 솜씨를 어깨너머 본 것 외에 정식으로 배운 적이 있는가?
“87년에 동대문에서 한복학원을 반년정도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것이 있어서인지 실력이 금방 늘더라. 내 단원들과 제자들 무대에 올릴 때도 의상들을 직접 제작하곤 했다.”

-땅 값 비싼 강남에 한복집을 차려 내심 놀랐다. 굳이 강남에 가게를 낸 이유가 있는가?
“전통문화시설과 관련 업종이 대부분 강북에 집중돼 있는 편이다. 반면, 유행과 명품은 청담동 일대에 몰려있다. 그래서 난 전통의례와 한복을 강남으로 끌고 와 대중화를 꾀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정면승부를 해보겠단 생각도 있었다.”

그는 고객의 주문이 들어오면 한복의 디자인은 손수 맡는다. 또한 한복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느질과 원단이라며, 무조건 비단과 명주가 최고가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원단을 찾는 것이 바로 명품 한복을 짓는 방법이라고 했다.

-가게에 매여 공연에 소홀하진 않을까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실은 지장을 많이 받고 있긴 하다. 공연이 있는 날에는 가게 문을 닫는다. 한복집 운영은 예약제로 이뤄지기 때문에 그런 점에선 큰 무리가 없긴 하지만, 점점 규모가 커갈 수록 나 혼자만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전문 인력 양성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난 둘 중 그 어느 것 하나에도 소홀히 한다거나,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둘 다 공평하게 똑같이 가길 바란다.”

-그렇게 공평하게 똑같이 간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한복점이 바빠질 경우를 생각해 뭔가 운영 복안이 있을 것도 같은데?
“맞는 말이다. 소리와 가게 운영을 어느 것 하나 쳐지는 것 없이 공평하게 집중하고 싶다곤 했지만, 아무래도 소리에 좀 더 치중하지 않겠나. 그러다보니 함께 운영할 전문가가 필요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나는 디자인 참여에 의의를 두고, 공연하는 분들께서 보다 더 적절한 한복을 입을 수 있게끔 힘쓰고 싶다. 격조에 맞는 옷이 자리 잡고 거기에 국악이 껴들어가는 사업을 구상 중에 있다.”

-전통문화관 ‘가례헌’의 관장을 맡고 있다. 가례헌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서도소리보존연구회를 만들면서 첫 번째 사업으로 스승님들을 기념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세대 선생님들이 작고하시면 2~3세대로 가면 갈수록 1세대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더라. 그러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설립한 곳이 전통문화관인 가례헌이다. 설립한지 9년째인 지금, 다행히 잘 발전해 왔고, 문화계에선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서 뿌듯하다.”

-저렴한 가격으로 가례헌 상설공연을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또한 관객들을 위해 모친께서 직접 밥상과 다과를 준비하신다고 들었다.
“여전히 어머니께서 이것저것 도와주고 계신다. 사랑방에서 즐기는 전통예술이라고 해서 ‘사랑방음악회’라고 불린다. 국악뿐만 아니라 오페라, 피아노, 현악3중주 등의 다양한 장르의 공연도 하고 있다. 요즘 같은 가을이나 겨울에는 주로 판소리 위주의 국악 프로그램으로 이뤄져 있다. 내가 하는 배뱅이굿은 매주 들을 수 있다. 오는 10월말부터는 판소리 명창전이 준비돼 있어서 왕기철 명창 등 여러 명창을 만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배뱅이굿의 매력은 무엇인가?
“판소리와 비교해서 굉장히 현대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 다섯마당을 살펴보면 굉장히 유교적이고 권선징악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작품의 문학적 특징 자체가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배뱅이굿은 1900년대 초반 근대화시기에 만들어져 내용이 아주 실질적이고 요즘 사람들이 봐도 공감이 되는 내용이다. 예를 들면,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짝사랑하다가 돌아오지 않는 그 남자를 그리다가 죽어서, 여자의 부모가 한을 풀어주기 위해 딸의 혼을 부르려고 하는데, 어떤 건달이 그 사실을 알고 무당인 척하면서 그 부모의 돈만 싹 빼들고 도망갔다는 내용이다. 판소리에서는 이와 같은 내용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판소리였다면 아마도 그 건달은 벼락 맞아서 죽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은 판소리에서는 있을 수 없는 내용이다. 이렇듯 배뱅이굿과 판소리는 달라도 너무 다른 탓에 당시에도 굉장히 색다르고 신선한 느낌이란 평이었다. 배뱅이굿은 현대인들을 대상으로 충분히 공연할만하다고 보며, 앞으로도 발전할 방향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1991년 문예회관(현 아르코극장)에서 첫 시작한 굿판공연 ‘철물이굿’ 무대는 당시 파격적이었다. 도심에서, 그것도 문예회관에서 굿판을 벌인다고 화제가 됐었는데….
“그 해 민요경창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해서 대극장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원래 배뱅이굿도 굿을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다. 황해도굿보다 평양굿을 먼저 배웠었는데, 그 형식이 배뱅이굿에 그대로 나오더라. 당시 문예회관에서 굿을 한다고 하니까 굉장히 센세이셔널 하긴 했다. 관객들의 반응도 너무 좋아서 10년 간 정기적으로 무대에 계속 올렸다.”

-김정연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다가 그가 작고한 뒤 이은관 선생께 배우려고 했지만, 문화재청의 규칙 등 반대에 부딪혔다고 들었는데, 어떤 사연이 있었나?
“김정연 선생님의 수심가를 듣고 본격적으로 소리를 시작했다. 선생님 밑에서 국비장학생으로 지내며 전수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내가 이수를 마치기 전에 선생님이 돌아가셨는데, 마침 이은관 선생님께서 배뱅이굿으로 예능보유자가 되셨을 때라 당신 제자로 오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문화재관리국에 얘길 했더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한 번 여류명창에게 배웠으면, 앞으로도 여류 명창의 문하로 들어가야 한다는 규칙을 내세우는 바람에, 결국 오갈 데 없게 된 나는 이수하지 못하고 전수만 받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겨울, 그는 일흔이 넘은 故김정연 명창이 무대에서 눈을 맞으며 수심가를 부르는 모습에 넋이 나가 김 명창을 쫓아다니며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단다. 그가 만약 이은관 명창을 먼저 찾아갔더라면 그는 아마 별 고생 없이 배뱅이굿을 이수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벅차오름에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김 명창의 소리에 반했다고 했다. “제 운명이었나 봐요, 고생할 운명.(웃음) 사실은 이은관 선생님께서 저보고 일찍이 문하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위에 말씀드린 사연으로 서열상 많이 늦어진 거죠. 지금은 이은관 선생님께서 제가 당신의 수제자라고 말씀해주세요. 늦게 들어간 탓에 서열상 뒤이긴 하지만요.”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가례헌 한 공간에 이은관 선생의 기념관을 만들어 놓고 있다. 지금의 그가 배뱅이굿 소리를 구성지게 하는 것도 이은관 선생의 가르침과 그의 끔찍한 존경으로 얻은 결과물이다.

-국악은 여전히 대중의 관심을 벗어나있다. 대중과 가까워질 방법(국악대중화)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전통을 한다는 이유로 대접 받곤 하는데, 너무 호강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소리꾼 자체가 원래 광대고, 기생 아니었던가. 우리 선생님들께선 온갖 어려움을 겪으시며, 얼마나 힘들게 배우셨는데, 우리 세대는 권위주의를 내세우며 오히려 대중과 점점 더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국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리라는 거 자체가 원래 마당에서 하는 건데, 주변 소리꾼들 보면 극장 아니면 공연을 안 하려고 한다. 가수 싸이가 미국에 가서 사람들이 원할 때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말춤’을 추며 웃음을 주는 모습을 보고 누가 헤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문화예술인이라면 그런 기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좀 민망하긴 하겠지만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하겠다. 쉰이 다 돼가는 나이에 여태껏 미혼인데, 안 한 것인지 아니면 못 한 것인지 궁금하다.
“몇 번을 하려고 했는데, 다 이루지 못했다. 대 여섯 번 그렇게 겪고 나니 나중에 가서는 내가 알아서 포기하게 되더라. 그러다보니 이 나이 이때까지 온 거다. 결혼할 생각은 있는데, 지금까지도 상황이 그리 마땅치가 않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