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한글 작가’ 금요비] 문화지문 확장… 그 길엔 우리 고유 ‘한글’ 있다
[인터뷰 - ‘한글 작가’ 금요비] 문화지문 확장… 그 길엔 우리 고유 ‘한글’ 있다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글 윤다함 기자
  • 승인 2012.10.15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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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작가의 정신 깃들어 있기에 작업 전 건강점검은 필수

 

     한글을 모티브로 작업하는 최초의 ‘한글 작가’ 금요비. 그는 공간적 배치, 의미관계의 배치, 과학적 방법으로서의 배치 등을 통해 한글을 작품 속에 대입한다. 또한 한글의 본질을 유지한 채 고유성을 가지고 퓨전주의 작품들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오롯이 담아 한글회화를 탄생시켰으며, 한글문자의 퍼즐과 같은 조합으로 시작해 문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그릇을 활용한 도자와 한글, 한글을 이용한 인물화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글을 소재로 한 회화 작업을 25년째 이어오고 있는 그를 지난 제566돌 한글날 즈음해서 만나 ‘한글’과 그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1965 전남 여수 출생 △관훈 갤러리(서울) / 학고재(서울) / 예술의 전당(대전) / 라마다프라자 호텔(제주) / 해금강 박물관(거제) / 해미당갤러리(통영) / 갤러리평창동(서울) 외 개인전 29회 △단체전 및 아트페어 50회 △2012 샌프란시스코 국제전 금상, 프랑스국제전 은상 / 2011 독일 평론가상 금상 / 2009 올해의 인물 미술 대상 / 2008 올해의 작가상 수상 △2009 태국 국제 공모전 심사위원 / 2008 파리아트컬렉션 심사위원 외 경력 다수  △시집 7권 상재

-한글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원래는 시를 계속 써왔었기에 한글은 항상 익숙한 존재였다. 어느 날 문득 한글이 문자로서 해체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한글을 테마로 작품을 한 작가는 없더라. 내가 그 원조가 돼야 겠다 싶어서 시작한 게 벌써 25년째를 맞았다.”

그는 학생시절,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화가들을 만났고, 그들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해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그가 가장 절실히 깨달았던 것은 바로 우리 고유의 것에 대한 안목, 즉 ‘문화적 지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5천년 문화유산의 후손인데, 그저 서양의 것을 보고 베끼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진짜’ 우리의 것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단다.
“‘한국 그림’을 보고 싶어 하는 외국인에게 동양화를 보여주자, 그런 건 다른 아시안 국가에도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난 내 한글그림을 보여줬더니 그때서야 한국의 정신이 깃든, 진정한 고유성을 지닌 한국 그림이라고 말해줬다. 난 그때의 충격을 지금도 떠올린다. 우리 문화지문을 확장하는 법이 내겐 한글인 것이다.”

-한글과 얼굴을 함께 그려왔는데, 어떻게 착안하게 된 건지 궁금하다.
“한글은 보통 직각의 형태를 갖고 있다. 미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해 직각에 반대되는 원과 접목해야겠더라. 그래서 한글을 퍼즐처럼 묶어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난 한글을 보다 더 섬세하게 그릴 수 있단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내 작품에서는 얼굴뿐만 아니라 색동, 도자기 요소가 늘 공존한다.”

-본인 블로그에 작업과정을 사진과 글로 올려놨더라. 보니 물감을 무지 많이 사용하던데, 비용이 만만치 않을뿐더러 작업시간도 오래 걸릴 듯하다.
“물감을 아낌없이 사용하긴 한다. 작업의 공정을 그대로 축적시키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작업해 오고 있다. 물감 위에 물감을 올리고, 또 올리고… 그러다보면 그 과정 중에 색감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한 것들을 담아내고 싶다. 또한 유화의 질감을 극적으로 살리고 싶은 마음에서도 그렇다. 한글이 단순히 쉽고 가벼운 게 아닌, 어렵게 만들어진다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래서 난 관람객에게 그림을 만져보라고도 한다. 그 질감을 그대로 느껴보라면서….”

-한글을 소재로 하는 작품의 특성상 주문 제작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객은 주로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맞다. 거의 주문 제작으로 이뤄지며, 고객층은 정계, 재계 등 대부분 사회고위층인사들이다. 작품에 한글을 이용해 오행을 심고, 주문 고객의 이름으로 맞춤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주문 고객 개인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의미도 있고, 마치 ‘부적’과도 같은 느낌도 있다. (그는 종교적 이유로 ‘부적’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있어 신중함을 보였지만, 의미전달과 독자의 이해를 위해 싣는다. -편집자주) 보통 자신의 얼굴을 그림으로 걸어놓지 않나. 그런 맥락으로 자신의 이름을 그림으로 걸어놓는 거라고 보면 된다.”

-듣고 보니 고객들의 지위가 어마어마한 것 같다. 반면 그에 비해 대중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것도 사실인데…?
“작품 초기부터 가격이 비싸서 대중적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미술시장에 대놓고 내놓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아까 말했다시피 고객들이 특별한 계층에 몰려있고, 그렇게 유지돼 와서 그런지 오히려 대중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메리트가 있는 것 같다.”

-금요비란 이름이 독특하다. 본명인가?
“본명이다. 성경의 ‘욥’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래는 김요비였는데, 김과 금(金)은 같지 않나. 금요비로 개명한지 꽤 오래됐다.”

본디 신학을 전공한 그는 15년간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귀국 후 그는 문화사역이 자신의 길이라고 깨닫고 본격적으로 그림에만 전념하게 됐다고 한다.

-미술전공자가 아니라고 했는데, 정규 미술교육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건가?
“그림 공부를 따로 해본 적은 없다. 실은 난 그림은 따로 배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림은 정신에서 나오는 거라 본다. 그 정신을 캔버스에 옮기는 법을 연습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구상, 비구상뿐만 아니라 극사실주의 회화에도 실력이 괜찮다. 여전히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난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지 않았으니 더 배워야하고 노력할 것들이 많다. 다만 내가 미술 정규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 그림을 보지도 않고 평가절하하진 않아야 한다. 최근 어떤 사례에서 작가의 정신이나 의도, 작업 과정은 일체 살펴보지도 않고, 오로지 학력만을 보고 논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

금요비作 <소통2>

-분당에서 평창동으로 작업실을 옮김과 동시에 ‘갤러리평창동’도 오픈했다. 이유가 있는지?
“보다 큰 작업을 하고 싶어 지난해 평창동으로 이사 왔다. 그 전에 이곳은 40년 된 갤러리였다. 원래는 작업실로만 사용하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역사성 있는 갤러리를 개인 작업실로 사용한다고 하면 여러 말이 많을 듯해 갤러리도 하며, 작업실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천장이 높길 바랐고, 입구에서부터 그림이 크게 바로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 그렇게 꾸몄다.”

-주치의가 포함된 팀을 구성해 작업을 한다고 들었다. 일반 작가들의 작업시스템에 비춰 볼 때, 의아하기도 하다. 이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한다.
“엔터테인먼트 같은 개념의 회사였다. 작품 소개부터 판매, 유통까지 책임지는…. 거기에 주치의가 포함돼 있는 거였다. 지금은 회사는 모두 정리한 상태고, 물론 주치의도 없다.(웃음) 작가에게 작업만큼 중요한 건 바로 건강관리라고 생각한다. 건강해야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거다. 작품에도 기운과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난 작업에 임하기 전에 건강을 체크하고자 했던 거다. 산삼 먹고, 녹용 먹는 것과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웃음)”

금요비作 <물고기>

-전 세계적으로 한류 붐이 일고 있는 지금, 한글 역시 이 열풍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안이 필요할까?
“한글이 단순히 패션 등과 결합해 옷에 입혀진다거나 하면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멋지게 휘갈겨 놓은 서체는 중국의 붓글씨 정도로밖엔 인식이 안 되더라.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한글은 회화로서 경쟁해야 한다. 회화가 제품화 및 상품화 돼 여러 생활용품에 입혀지는 거다. 또한 국내시장에는 브랜드로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글 자체를 갖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브랜드를 갖고 싶어 하는 특성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나도 내 브랜드를 등록 중에 있으며, 디자인 등록, 특허 등록에 힘쓰고 있다.”

콘텐츠로서의 한글의 발전 가능성은 앞으로 무궁무진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김치 하나만으로 큰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고 누가 예측했던가. 유명 연예인들은 김치 브랜드 사업을 운영하고, 국내 김치 시장만 해도 그 규모가 몇 조원에 이른다. 그가 25년 전, ‘한글 그림’을 그릴 때만해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멈춰 선다고 한다. 이렇게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기까지 25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전시를 할 때마다 매번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는 대중들의 변화가 느껴진다고 했다.

-갤러리 평창동의 운영 방향에 대해 말해 달라.
“대관은 하지 않고 초대전으로만 운영한다. 내가 배울 수 있는 선생님들을 모시고 싶다. 또한 비교적 접하기 힘든 작가들도 모셔서 대중과의 소통의 관계로서도 운영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갤러리 평창동은 내게 학교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치열한 작가정신을 지닌 분들로부터 그런 정신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 전시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대구아트페어, 싱가폴아트페어 외에도 독일, 미국 등의 단체전에 참가한다. 국내 개인전은 지금까지 일 년에 2번씩은 꾸준히 해왔다. 지금 이 곳(갤러리 평창동) 외에 다른 곳에서의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그림이 잘 팔려서 재료를 마음 놓고 쓸 수 있으면 좋겠다.(웃음) 이제는 보다 더 실험적인 작업에 몰두하고 싶다. 재료에 대한 고민이라던가, 명품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 말이다. 현재 국내 회사들과 얘기가 오가고 있긴 하다. 내 작품을, 회화를 디자인화 시켜 상품화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