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명성황후 조난지지비는 왜 현장에서 사라졌는가?
[특별기획] 명성황후 조난지지비는 왜 현장에서 사라졌는가?
  • 김지완 기자
  • 승인 2012.11.16 1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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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방치되고 있어

▲1940년 오사카마이니치신문/도쿄니치니치신문의 경성(서울)지사에서 펴낸 [반도 이면사]에 실린 명성황후(민비라고 적시) 사진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나라를 잃은 망국의 슬픔을 달래면서 이렇게 말했다. 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교훈을 아는 민족은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는다고 했다. 구글과 애플이 자사지도 서비스에서 독도의 한국 주소를 지우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디지털콘텐츠의 표기와 함께 아날로그 표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이에 본지 서울문화투데이는 창간특집기획으로 우리 역사의식을 현장과 더불어 짚어 보기로 했다. 이번 호에는 명성황후 시해 117년을 맞는 올해 경복궁 건청궁내 ‘명성황후조난지지비’조난지지비(遭難之地碑,이하 조난지지비)에 주목해 봤다. ‘명성황후 조난지지비는 해방 이후 우리 근대사의 수난의 역사 현장을 상기시키기 위해 건청궁 옥호루 앞에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직접 써서 세운, 역사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가진 표석이다. 그러나 2007년 건청궁 복원공사 이후 조난지지비는 자취를 감춘 뒤 고궁박물관 지하 수장고에서 잠자고 있다. 새삼 독도와 동해를 떠올리며 우리 스스로 역사의식을 재무장해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관할 관청인 문화재청이 조난지지비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복원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이번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 전경. 일본군이 명성황후 시해 후 잠시 시신을 안치했던 곳이다. 건청궁 복원 전 이 자리에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쓴 '명성황후 조난지지비'가 세워져 있었다. 현재는 옥호루의 기단석이 마치 비석인양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 건청궁을 복원하면서 명성황후 조난지지비(遭難之地碑)를 복원하지 않은 채 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방치해 놓고있다. 명성황후 조난지지비(遭難之地碑)는 경복궁 수난사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알려진 건청궁 옥호루가 있던 자리에, 순국숭모비(殉國崇慕碑)와 같이 세워져 있었다. 문화재청이 2004년 시작된 건청궁 복원공사를 통제하기 이전까지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 조난지지비와 순국숭모비를 관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청궁 복원공사가 2007년 10월 완공돼 일반에 공개된 이후에는 보이지 않았다. 조난지지비는 1951년 6월 30일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곳으로 추정된 옥호루에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세워졌다. 순국숭모비는 1979년 10월8일 명성황후 순국숭모지 건립위원회에서 순국 84주년을 기하여 추가 건립됐다.

숭모비와는 별개로 일부 시민과 재야학자들은 조난지지비를 제대로 복원하지 않은 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역사적 유물을 ‘역사의 자리’에 되돌려 놓지 않고 방치하는 문화재청의 처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바람 앞에 놓인 등불같이 꺼져가는 조선을 구하려고 스스로를 불사르다 일본의 만행으로 인해 꽃다운 45세에 운명을 달리한 비운의 황후이다. 따라서 건청궁은 역사의 현장이자 비운의 장소다. 이 때문에 우리의 수난의 역사일지라도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서서히 높이지고 있는 것이다.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 역사적 숨결 빛 발한다

이배용 국기원 총재(전 국가브랜드위원장, 역사학자)는 명성황후 조난지지비는 일국의 대통령이 명성황후 시해의 역사적인 사실을 친필로 쓴 비석이다. 비석이 그 자리에 있을 때 역사적인 의미가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한 재야 사학자는 “문화재청의 저의를 모르겠다”며 “역사적 유물은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다”고 일갈했다. 더구나 초대 대통령의 친필로 세워진 조난지지비를 굳이 제자리로 갖다놓지 않고 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방치하는 처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따라서 역사적 유물은 역사의 현장에 갖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도 나라가 힘이 없을 때 국가이든 개인의 삶이든 어떻게 되는 지 여실히 보여주는 비운의 현장이기 때문에 역사적 교훈을 얻을 중요한 장소라고 주장했다.

한 시민은 “자신은 조선이 망하면서 자신의 집안도 망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나라가 힘이 없어 주권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미래 세대들에게 애국심 고취를 위해서라도 역사의 현장은 반드시 재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문화재청 관계자는 “건청궁 복원 후 종합 안내판이 세워지면서 안내문에 역사현장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굳이 조난지지비를 다시 세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유물은 제자리에 갖다놓았을 때 역사적 숨결이 빛을 발하는 것이지 결코 안내판으로 대신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비문은 고인의 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이에 문화재청은 “2006년 완공 당시 순국 숭모비는 명성황후의 생가인 여주로 이전했다”고 하면서 “조난지지비를 제 자리에 복원하지 않은 것은 문화재 위원회에서 내린 결정에 따랐을 뿐이라”고 전했다.

당시 문화재위원들이 어떤 이유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심히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언제까지 명성황후 조난지지비를 수장고에 잠재울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아직 조난지지비를 전시할 계획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무책임한 답변으로만 일관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인 1895년 10월8일 새벽 건청궁의 한 건물에서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시해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황후의 시신은 황후의 서재였던 옥호루에 잠시 옮겨졌다. 이후 녹산에서 불태워진 후 이 일대에 뿌려지고, 결국 시신 없이 왕비의 장례를 치룬 이후에 청량리 홍릉에 안장했다가 고종이 승하한 후 남양주 금곡의 홍릉으로 이장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일본 도쿄 가쿠게이 대학 이수경 교수는  을미사변은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시해’는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을 시해라고 하는 데 이 사건은 엄연히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모를 살해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당시 살해 현장에 있었던 20대 젊은 낭인 이시즈카 에이조는 ‘명성황후 살해사건’후 보고서를 그의 직속상관인 미우라 고로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일본에 있는 이전 상관에게 보냈다.

얼마전  명성황후 117주기를 맞아 활빈단(대표 홍정식)등 시민단체들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정부차원의 공식 사과를 해야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일본이 조선병합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던 명성황후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시를 받은 일본 낭인들이 옥호루에서 살해해 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를 불살라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운의 역사의 그늘에서 건청궁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가장 먼저 훼손·철거됐던 것. 1929년 일제는 대규모 박람회를 열면서 건청궁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왜색이 짙은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어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해 왔다. 정부는 1998년 이를 철거하고 2004년부터 복원공사를 실시해 건청궁의 원형을 회복했다.

건청궁은 후원 구역에서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공간으로 고종이 역사한 건물로 고종황제의 침실 장안당(長安堂)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침실인 곤녕합(坤寧閤), 부속 건물로 옥호루(玉壺樓), 또한 건청궁 서쪽에는 집옥재(集玉齋)와 협길당(協吉堂)이 그리고 팔우정(八隅亭)이 각각 있었다고 한다.

 

명성황후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며 뛰어난 외교술 발휘

명성황후는 영주군수 등을 지낸 민치록의 딸로 16세에 왕비로 책봉되어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려 하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며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나친 쇄국과 급진적 개혁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고 열강들을 이용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외교술을 펼쳤다. 이때 그녀가 의도적으로 키운 외척들은 훗날 고종의 측근이 되어 고종이 대한 제국이라는 마지막 시도를 해볼 수 있게 했으며 이것이 독립운동과 이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명성황후는 영주군수 등을 지낸 민치록의 딸로 16세에 왕비로 책봉되어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려 하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며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나친 쇄국과 급진적 개혁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고 열강들을 이용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외교술을 펼쳤다. 이때 그녀가 의도적으로 키운 외척들은 훗날 고종의 측근이 되어 고종이 대한 제국이라는 마지막 시도를 해볼 수 있게 했으며 이것이 독립운동과 이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바로 세워야 한다. 저 광활한 대륙을 말 타고 달리던 역사! 나라가 힘을 잃고 쇠락하면서 음울한 슬픔의 역사도 우리에게 있다.

오늘날 우리는 있는 역사도 신화로 만들고 역사를 축소 왜곡할 뿐만 아니라 교훈으로 삼아야 할 역사도 외면하는 것이 현주소이다. 그래서 명성황후 조난지지비는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