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일본속보]90세 맞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송신도 할머니
[이수경의 일본속보]90세 맞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송신도 할머니
  • 이수경 교수(일본도쿄가쿠게이대학)
  • 승인 2012.11.24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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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용서하면 인생 파멸된다는 역사의 산 증인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송신도 할머니가 위안부 생활의 잔혹상에 대해 증언하며  분개해 하고 있다.

근로감사의 날이자 휴일이었던 11월23일, 도쿄 시내의 전국교육문화회관 7층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파란만장한 삶을 경험했고, 지난 2011년의 3월11일에 일어난 동북대지진의 현장인 센다이에서 구사일생으로 생존하여 현재는 도쿄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계신 송신도(宋神道) 할머니의 90세 생일 파티가 열렸다.

1992년부터 송신도씨를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돌봐 드리는 양징자씨(梁澄子)씨로부터 연락이 왔기에 필자는 만사를 제쳐놓고 참석을 하였다. 작년에 필자 편저로 발행했던 일제 강점기의 증언집 [바다를 건너는 100년의 기억(海を超える100年の記憶)] 속에 송신도씨와 양징자씨의 인터뷰를 게재했으면서도 직접 만날 기회를 매번 놓치고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만나서 축하를 드리려고 갔던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실태야 새삼 언급하지 않아도 주지하는 바이지만, 인류사에서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잔학한 인권유린이요, 은폐 보다는 실상을 명확히 하여 자성하며 재발의 엄금을 보편적인 의식으로 공유해야 하는 인류의 과제이기도 하다.

전쟁 야욕으로 젊은이들을 모아서 전선에 배치하지만 절제 하기 힘든 군인들은 이국땅의 고독과 밀려오는 광기 속에서 주변의 민간인 여성들을 강간하거나, 적지 않은 군인들이 향수에 젖으며 살상이 계속 되는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도주를 한다.

▲송신도 할머니와 필자 이수경 교수가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런 그들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여성의 성으로 그들을 달래려는 얄팍한 발상에서 생겨난 것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이다. 전쟁 비즈니스 수행을 위해 생겨난 비인간적 제도에 당시 유교의 덕목을 중시여기던 동아시아 여성들이 실체를 알면서 솔선하여 위안소로 가려는 사람이 없던 것은 당연지사.

결국 전쟁 말기가 되면 유괴 납치 형태로 미혼 여성들을 끌고가게 되는데, 당시의 한국 여성들은 이런 소문을 듣고선 서둘러 결혼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1922년 11월에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송신도씨는 16세때 집안에서 정한 결혼식날 밤에 결혼이란 의식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야반 도주를 하였고, 그런 그녀에게 어느 여성이 전쟁터에 가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감언이설로 속여서 송신도씨는 신의주, 중국의 텐진 등을 거쳐 무창의 [세계관]이란 곳에 배치되어 위안부로서의 피해를 입게 된다. 그 뒤, 악주, 장안 등의 일본군 작전구역내의 중요 거점에서 약 7년간의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다.

▲송신도 할머니의 9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재일교포를 비롯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과 학자, 법률가들이 송 할머니의 증언을 들으며 숙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해방이 되자 일본군인에게 속아서 일본으로 건너왔다가 열차에 투신 자살을 하지만 미수로 거치게 되고, 그 때 소개받았던 동포 남성과 함께 동북 지방인 미야기 센다이에서 살았다. 그러다 1993년 4월 5일의 도쿄 지방재판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의 사죄와 보상 요구를 제소하였고, 그 재판이 청구 기각이 되자 다시 항소와 기각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다 2000년 12월 12일에 상고하여 2003년 3월 28일에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상고 및 상고 수리 기각이 결정된다.

▲누군가의 부축이 없으면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송신도 할머니. 이 날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모인 하객들을 위해 평소 즐겨부르던 노래를 한 곡 불렀다.

평상시에 인명 살해를 하는 것은 살인죄가 되나 국가 권력이 개입된 전쟁에서 일어나는 대량살상이나 학살은 살인 용의로 처벌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

그래서 전쟁이라는 이름 하에서 행해진 수많은 잔혹한 행위도 재판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으려하는 법의 모순이 존재하고 있다. 법은 결코 평등한게 아님을 힘의 원리, 전쟁 해석에서 드러난다. 송신도씨는 전쟁의 실태를 일본군 위안부의 처참한 상황과 함께 폭로를 했으나 결국 10년의 재판은 패소로 돌아갔고, 일본의 재판소는 그녀들의 유린된 삶에 정의를 표하는 양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만인의 인간적 권리와 평등을 위한 정의로 존재해야 하는 법이지만 국가가 행한 과거의 우행조차 우행이라고 인정하는 양심적 정의는 없었던 것이니 법의 모순 및 한계점을 재삼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송신도씨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オレの心は負けてない)]고 명확히 밝히고, 그 뒤, 기회있을 때 마다 전쟁의 잔인함과 야만성을 논하며 전쟁이 절대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해 왔다.

그런 그녀는 2011년 3월11일의 동북대지진때 삶터를 덮친 거대한 츠나미로 인해 한 때 그녀도 희생이 된 줄 알았으나, 센다이 현장에서도 강한 생명력과 의지력으로 살아 남아, 지금은 도쿄의 그녀를 보살피는 도우미들의 도움을 받으며 90세의 생일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생일 파티에는 재일교포는 물론, 일본의 많은 양심적 시민들이 모여서 그녀의 그동안의 삶을 담은 슬라이드 상영을 양징자씨 설명과 더불어 감상을 했다. 파티장에는 송신도씨를 오랫동안 보살펴왔고 지원해 온 많은 분들이 참가를 해서 축하의 마음을 표했었고, 그녀의 재판을 맡았던 나카시타 유우코(中下裕子)변호사 등도 참가하여 재판 활동에 대해 언급을 하였다.

▲한국민요가수 김혁순씨가 노래와 춤을 추며 송 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하는 모습.

또한 한국 민요 등을 부르는 가수 김혁순씨도 참가하여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송신도씨도 마이크를 들고 아리랑과 민요 등을 부르며 90세의 축하 파티에 온 손님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강한 의지력이 없었다면 숨쉬기 조차 힘들었을 지옥같은 삶이었음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다행이라면 그녀를 따스히 챙겨주는 사람들의 인정 속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유린된 후, 이용당하고 배신당해 일본 땅에 버려졌던 그녀의 삶이 그나마 따스한 사람들의 손길 속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내려 놓을 수 있다니 다행이지만, 자위대의 해외 파견 및 해외 교전권과 평화 헌법 개정 및 교과서 개정, 군비 재무장을 외쳐대는 정치가들의 무책임한 공약들이 총선을 향해 난발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밝지만은 않은 사회이다.

▲참석자들이 송 할머니의 건강을 기원하며 기념촬영을 마쳤다.

아직도 과거 청산 문제 조차 깔끔히 해결하지 못하여 국가간 외교 갈등이 첨예한 감정 대립으로 치닫고 있고, 주변 국가를 위협하며 전쟁 준비를 의도하는 듯한 극우 보수층 세력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요즘, 송신도씨의 삶이 결코 타인의 삶만이 아닐 것이라는 자각으로 우리는 전쟁을 용서치않는 시민의식을 목소리로 높여야만 할 시기에 와 있다.

그런 시기이기에 맞이한 송신도씨의 90세 생일 축하회기에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송신도씨가 앞으로도 건강히, 귀중한 전쟁 증언자로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활동해 주시길 진심으로 빌어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