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안호상 국립극장장] ‘국립레퍼토리시즌’, 국립극장의 결연한 의지
[인터뷰 - 안호상 국립극장장] ‘국립레퍼토리시즌’, 국립극장의 결연한 의지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글 윤다함 기자
  • 승인 2012.11.2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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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공연은 ‘우리 문화 정수’… 외래관광객 겨냥한다

 

30년 전,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보고 싶어 문화예술기관에 지원했다는 열정과 패기 가득한 젊은 청년이 오늘날 공연계 발전의 중심축에 서있게 됐다. 안호상 국립극장장은 1984년 서울 예술의전당 건립에 참여하며, 공연전문기획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23년간 예술의전당에서 근무하며, 공연계 최초의 시도와 거침없는 도전을 성공적인 결과로 이끌어냈다. 이런 그가 올해 1월 국립극장 극장장으로 임명되고, 국립극장에는 유례없던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지난 9월 시작해 내년 6월까지 계속되는 ‘국립레퍼토리시즌’이 바로 그것. 막중한 대표성을 띤 국내 대표 극장인 국립극장은 좋은 공연을 선보여야 하는 책무가 있지만 그동안 ‘레퍼토리가 없다’, ‘유료 관객이 적다’ 등 반복되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분명한 레퍼토리와 국립예술단체들의 뛰어난 역량을 십분 살리고자 기획된 국립레퍼토리시즌은 국립극장을 중심축으로 299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 역량 높은 8개 국립 예술단체가 합동해 꾸려나간다. 곧 취임 1년을 맞이하는 그를 만나 우리의 현대공연 역사와 앞으로 국립극장의 행보에 대해서 들어봤다.

 

△1959년 충북 보은 출생 △현재 국립중앙극장 극장장(2012.1~)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 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과 수료 △예술의전당 공연사업국 및 예술사업국 국장 /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 / 제5회 더뮤지컬어워즈 공동집행위원장 역임 △올해의예술상 연극부문 최우수상 / 호암예술상 / 제47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 제43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국립레퍼토리시즌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설명 부탁한다.
“국립극장이 국민에게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방식을 바꾼 거라고 이해하면 쉽다. 국립 작품들을 보다 더 엄격한 기준으로 검증하겠다는 자세로, 국민이 봐줬으면 하는 작품, 동시에 국민이 보고 싶은 작품들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당장은 인기가 없더라도 나라를 대표하는 작품들, 국립극장이 그만큼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작품들로 이뤄져 있다. 이전의 방식은 한 작품 올리고, 끝나면 또 한 작품 올리곤 했는데, 이런 식으로 간헐적으로 작품을 제공하는 유통방식으로는 국립 작품이 대중적인 관심을 받기 어렵다고 봐서 아예 연간으로 라인업을 해놓고, 관객들에게 미리 한꺼번에 내보여놓는 거다. 작품의 재미, 내용, 배경 등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 가며 대중들의 호기심을 생산해낼 수 있다고 본다.”

-국립극장은 국립레퍼토리시즌을 ‘국립극장 역사를 바꿀 획기적 출발점’이라고 표현하고 있던데, 국립극장에게 레퍼토리는 어떤 의미인가?
“국립극장은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고 있다. 민간단체와 경쟁하라고 국고를 들이는 건 분명 아닐 테다. 민간단체는 하지 못하는 예술 활동,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 활동을 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거다. 하지만 그동안 국립극장이 실적에만 치우치다보니, 관객 수와 제정자립 등에 목매여 대관공연 위주로 갔던 게 사실이다. 정작 국립 공연은 뒤에서 조용히 준비하고…. 그러면서 국립단체와 국립극장을 자랑스럽게 여겨달라고 하는 건 어폐가 있지 않겠나. 이번 국립레퍼토리시즌은 앞으로 국립단체의 내실을 더 다지고 잘 이끌어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국립극장에서 대관공연은 보기 힘든 건가?
“아예 대관공연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국립단체가 중심인 국립극장으로 가려고 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국립단체가 공연을 올리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인데, 힘들더라도 국립단체들도 의지를 내세우고 있다. 이렇듯 국립레퍼토리시즌은 예술가에게는 다시 한 번 의욕을 불태우는 계기를 마련하고, 국립단체가 만들어내는 예술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며, 외래 관광객에게 한국 예술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게끔 하는 자리이다.”

-실제로 국립레퍼토리시즌에 대해 관객의 반응이 어떤지 궁금하다.
“분위기는 점점 좋아지고 있지만, 그게 관객 수와 바로 연결되는 건 아니더라. 관객 숫자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추이를 지켜보고 있지만, 아직 추세를 설명할 단계까지는 아니다.  올해 9월부터 시작된 레퍼토리시즌이지만, 당시엔 이미 금년도 사업계획과 방향이 다 결정나있는 상태라 예산 면에서도 그랬고 그리 선택이 많지 않았다. 내년에는 보다 더 본격적으로 공연이 올라갈 예정이다. 더불어 무용시즌을 따로 정하는 방식 등 다른 극장과는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계획 중에 있다. 재밌는 결합들이 나올 예정이다. 이제 겨우 두 달 가량 됐는데, 비교하긴 어렵다. 기대를 갖고 좀 더 지켜봐 줬으면 한다.”

내년 6월 공연되는 국립무용단 '춤, 춘향'의 한장면

-국립레퍼토리시즌 공연들을 보면 대부분 우리 고유의 정서를 담고 있는 전통 공연들이 많다. 외래관광객 천만명을 돌파한 현재, 외래관광객을 겨냥한 공연 또는 그에 따른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다.
“보통 우리나라 관광객이 외국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을 보고 오지 않나. 국내에서 생전 오페라 한 번 안 보던 사람도 이태리에 가면 거기 오페라를 꼭 보고 오고, 미국 브로드웨이 가서 뮤지컬 보고 오고…. 이렇듯 짧은 기간 안에 그 나라를 경험하고 체험하기 위해선 그 나라의 문화적 정수가 담긴 문화 작품이 필수다. 그 나라의 문화적 실체의 핵심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게 바로 여행객들의 욕망이다. 최근 외래관광객이 천만 명을 넘어섰다. 이제 우리나라도 어엿한 관광대국이지만, 국립극장에서는 우리 문화를 압축해서 보여줄 수 있는 마땅한 상품이 없단 게 문제였다. 겨우 한 달 전에나 공연 발표하면, 여행사에서는 이미 여행 스케줄과 패키지를 다 내놓은 상태에서 우리가 끼어들 공간이 없단 거다. 여행사와 연계해 패키지와 프로그램에 국립극장 공연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프로그램 제시가 필요하기 때문에 국립레퍼토리시즌을 기획하게 된 것과 일맥상통한다.”

-외래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것만큼 우리 공연을 해외에 수출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에 대한 준비는 하고 있는가?
“국립극장이 정통성을 갖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창극과 연극이 기본이라 보고 판소리 다섯마당을 해외 거장의 연출로 색다른 관점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게끔 하고 있고, 판소리 열두마당 재정비에 힘쓰고 있다. 작품마다 외래 관광객이 30% 정도 채워준다면 소비와 생산 그리고 유통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을 거다. 해외에 작품을 내보낼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만, 제대로 된 작품을 갖고 나가야 결과도 만족스럽지 않겠나. 현재 세계적으로 우리 문화에 대한 수요는 엄청나다. 이 때, 제대로 된 작품을 선보여 우리 문화를 전파시키고, 그 이후의 수요도 지속될 수 있도록 확대해야 한다. 우선은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극장장의 이번 임기가 3년에서 2년으로 줄어들었다. 임기가 너무 짧다고 느껴지진 않는지?“솔직히 답답한 건 있다. 장기 계획을 세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국제적 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해외 거장이 판소리 다섯마당을 새롭게 연출하는 걸 구상 중인데, 장예모 감독과 로버트 윌슨에게 제안했더니 모두 2015년 이후를 얘기하더라. 지금 얘기가 오가더라도 2015년에는 내가 없는데, 그때 가서 다시 새롭게 얘기해야할 상황이 오게 되니까…. 그런 점에서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우리 유능한 직원들 역량에 맡길 수밖에….”

-공연전문기획자로서 지난 우리 공연계를 돌아본다면?
“내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문화 수요와 문화 영향력에 비해 예술의전당은 너무 방대한 느낌이었다. 초대석이란 이름으로 지인들, 제자들, 친지들 등 주변 동원해 공연 좌석을 겨우 채우는 정도로 문화예술계가 유지됐으니 말이다.”

암담한 문화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는 폐쇄적인 예술시장의 벽을 허물고 예술의 유통을 오픈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참여관객을 늘리기 위해서는 전문예술인의 양성도 필수적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오페라, 뮤지컬, 연극 등을 모두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하도록 하는데, 특히 오페라와 연극계에서는 오디션 제도가 최초일 정도로 캐스팅 오픈은 파격적이었다. 더불어 이전까지의 극단 중심, 사제 중심의 공연 문화를 바꾸기 위해 해외연출가 초청 등 공연 제작의 방식을 바꿀 수 있도록 힘썼다.

“그러던 중 IMF 시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가 질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기업, 시민 의식이 성숙해지며 문화의 중요성이 대두된 거다.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않나. 인맥으로 이뤄지던 협찬도 자발적으로 이뤄지게 되면서 우리나라 공연제작 환경 역시 긍정적으로 바뀌게 됐다. 난 그 이전부터 계속 변화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적응할 수 있었다.”

-앞으로 국내 공연계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가?
“현재 뉴욕보다 우리나라에서 클래식공연이 더 많이 올라가고, 더 좋은 단체가 찾고 있다. 쟁쟁한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줄서있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또 어디 있겠나. 이전과 비교해, 아니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양적 팽창과 관객 확대가 이뤄지고 있다. 난 이제야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공연 시장은 앞으로 2~30년간 더 큰 발전을 이룰 거라고 확신한다. 그만큼 관객의 취향은 더욱 더 세분화되고 다양해질 거다. 그러기에 예술가들은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 고생하겠지만 그만큼 기회도 더 많아질 거다.”

-<서울문화투데이>가 창간 4주년을 맞았다.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린다.
쉽지 않은 언론 환경에서 문화예술 전문지로서 이렇게 온·오프라인을 동시에 발행하고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실속 있는 뉴스를 다뤄주고 계시니 참으로 감사하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 문화예술계를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따뜻하게 지켜봐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