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상 수상자 인터뷰-이애주 서울대 교수] 전통이 토대 안 되면 현대예술도 없다
[문화대상 수상자 인터뷰-이애주 서울대 교수] 전통이 토대 안 되면 현대예술도 없다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글 윤다함 기자
  • 승인 2012.12.1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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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대학 설립해 춤교육 제도적으로 자리 잡게 할 것”

     1974년 그는 ‘이애주춤판’이란 첫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당시 ‘춤판’이란 용어는 국내무용계를 술렁이게 하며, ‘무식하다’, ‘상스럽다’ 등 거센 비판이 일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무용’은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용어로서, 그 단어를 사용하면서부터 우리만의 전통적 몸짓이 왜곡되고 일본식 문화에 잠식됐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본디 춤을 ‘춤’이라고 불렀으며, 그도 자신이 어렸을 때 배운 것도 춤이지, 무용이 아니라고 했다. 식민지적 표현에서 벗어나 우리말로 고쳐 쓰기 위해 앞장 선 그의 노력은 가히 선구적이었다. 오늘날 무용계는 ‘무용’이 일제 시대 때 유입돼 온 용어란 것을 인식하고, 올바른 단어사용 및 정착을 위해 무용계 스스로가 ‘무용’이란 단어를 지양하고, ‘춤’이라고 고쳐 쓰길 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현대예술 역시 그 바탕에는 전통을 토대로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대학 강단에서 고구려 벽화, 철학 등을 통해 학생들에게 우리 춤의 뿌리와 본질을 가르쳐왔다. 이렇듯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전통의 올바른 계승을 위해 힘써왔다. 또한 80년대 민주화운동 현장마다 맨발로 춤을 추며, 민주화항쟁에 불을 지폈던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홀연히 시국춤판에서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던 적이 있었다. 자신의 재정립과 더 깊은 공부를 위해 떠났던 그는 10년 만에 승무 예능 보유자가 돼 돌아와 다시 춤판을 누비고 있다.

     지난 3일 제4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전통대상을 수상한 그를 만나 ‘대담’(그가 ‘인터뷰’란 용어를 ‘대담’이라고 직접 고쳐 말했다. -편집자주)을 나눴다.

△1947년 서울 출생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 보유자 / 서울대학교 교수 / 한국전통춤회 대표 / 동방문화진흥회 부회장 △서울대 민주화 교수협의회 회장 및 한국정신과학학회 회장 역임 △1968 신인예술상 최우수상(문화공보부) / 1971·1972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평가 발표회 1등 / 1971 서울신문대상(서울신문사) / 2003 만해대상 예술부문 / 2012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전통대상 수상 △1954~1963 김보남(金寶男) 선생 사사 / 1970~1989 한영숙(韓英淑) 선생 사사

-먼저, 이번 문화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 한마디 부탁한다.
전통성 있는 옛것을 지켜온 예술인이라서 상을 주셨다고 알고 있다. 십여 년 전에 받았던 만해대상 이후로 처음 받은 상이라 참 오랜 만에 받은 거다. 거기다가 올해 무용인생 60주년이 되는 해라 참 뜻 깊다. 또한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일랑 이종상 화백께서 수상자선정위원장이시기도 해 이번 수상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상을 주셔서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올해 무용인생 60주년을 맞이했다. 60주년 특별 공연이나 행사가 없는지 궁금하다.
한 것도 별로 없는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다.(웃음) 60년 춤 춰온 인생을 정리해 대중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아직 정식 무대는 갖지 않았다. 올해 가을 하반기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60주년 행사를 선보이려고 준비 중이다. 지난 11월 서울대에서 고별강좌를 가졌고, 이어서 ‘학예굿’이라는 이예주춤학술대회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개최해 이이화 선생, 채희완, 유홍준 교수, 김명곤 전 장관 등 우리나라 석학들이 참석해 내 춤세계를 학술적으로 풀어보는 자리를 가졌다. ‘학예굿’은 학술대회의 우리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용발표회를 춤판이라고 한 것처럼 학술대회를 학예굿이라고 한 거다. 그러면서 정말 굿춤도 추고, 춤도 추고 그랬다. 내년 상반기 안에는 공개 공연을 열어 대중들과 함께 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내 작품이나 공연을 DVD나 CD에 담아놓지 않았었는데, 내가 내 무대를 보면 항상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었다. 그런데 이번 60주년을 계기로 이젠 따로 해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공연은 영상으로 기록해놓고, 작품 반주음악도 모아놓고 말이다. 나이가 점차 들다보니 갑자기 내 몸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웃음) 기록적으로라도 이젠 필요한 것 같다.

이애주 교수의 '진혼춤'

-사회성이 두드러지는 춤을 춰왔다. 민주주의, 핵 없는 세상, 통일 등을 기원하는 일명 ‘시국춤’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시국춤꾼이 된 과정이 궁금하다.
1985년쯤 됐을까…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시인들 석방 촉구 집회 현장에서 춤을 춰달라고 해서 ‘불꽃춤’을 췄었다. 여기서 ‘불꽃’이란 게, 내가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눈물을 많이 흘렸었는데, 바로 전태일을 떠올리며 불꽃을 주제로 춤을 췄다. 단순히 이데올로기로만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시대성이 함께 들어가게 된 거다. 아는 선후배들 통해 고문 받은 얘기들을 전해 들으면서 인간을 말살시키는 것들과 인간성에 대한 본질적인 것들을 끄집어 내 춤에 담기 시작했다. 물을 주제로 박종철 물고문을 형상화해 춤을 추기도 하고, 불을 주제로 김근태 전기고문을 형상화하기도 했다. 이게 ‘바람맞이춤’인데, 학생들이 학교에서도 공연해달라고 해서 날짜도 받아놨는데, 함께 무대에 서야하는 김덕수, 이광수 사물놀이패가 당일 못하겠다고 지레 겁먹고 발을 빼버렸다. 결국 정해진 날 공연을 못 올렸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밤을 새가며 같이 장단 맞추고, 소품도 주변에 있는 걸로 대충 준비해서 이틀 뒤 겨우 무대를 가질 수 있었는데, 마침 그날이 6월민주항쟁이 일어난 날이었다.

-당시에도 서울대 교수 신분으로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그렇게 춤판을 벌이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 압박이나 협박은 없었나?
당시 민교협 의장이었던 故김진균 교수가 나중에 말하기를, 날 건드렸다가는 전국에서 학생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날 못 본 척 했다고 하더라. 겉으로는 날 건드리지 않았지만, 협박 전화, 편지 등 속으론 별일이 다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것들을 담아 내게 보내는데, 난 그걸 다 무시했다. 그런 거 하나하나 생각하다가는 가슴 벌렁거려서 잠도 못 잤을 거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 보유자이다. 특별히 승무를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시작은 한영숙 선생님께 발탁되면서 승무를 하게 됐다. 승무가 우리춤으로 지정된 첫 번째 춤이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융합적인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승무 하나만 제대로 춰도 살풀이, 태평무, 학춤 등 다른 춤들이 다 되는 거다. 그래서 승무가 대단히 어려우면서도 하고나면 막상 쉽기도 한 춤이다. 한국몸짓의 상징이자 기본이다.

-그렇다면 지금 전수자가 있는지?
구관이 명관이라고… 옛날 방식이 참 좋았다. 예전에는 문화재가 직접 모든 걸 다 결정했는데, 지금은 전수자를 등록하려면 무슨 3배수를 내라니, 어쩌느니…. 1명도 있을까말까 하는데 말이다. 거기다가 전공도 안한 사람이 심사해 결정하고 그런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난 아직까지 전수자는 없다.

-실제로도 많은 전통예술인들이 무형문화재 선정 방식과 관련해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
난 춤을 내 생명으로 생각하고 지금껏 해왔다. 민족의 몸짓이자 우리 문화가 큰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는 건데, 그걸 못 믿고 3배수로 내라는 둥 그렇게 운영하면 안 된다. 현실적으로도 3배수 낼 사람도 없다. 본디 춤이란 게 제일 먼저 인간성이 돼야 그걸 토대로 몸짓이 나오고, 머리와도 연결되는 거다. 요즘엔 그런 친구들 찾기가 어렵다.

이애주 교수의 '승무'

-수업시간에 고구려 벽화나 철학에 대해 강의를 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이는 어떤 연유인지 궁금하다.
우리 춤의 뿌리를 찾다보니 자연스레 고구려벽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승무의 뿌리가 고구려벽화 안에 다 있더라. 고구려벽화 자체가 종합 선생님과도 같았다. 그래서 고구려 춤에 관해 학위 논문을 받기도 했다. 춤의 기본인 철학과 고구려의 문화를 알아야 우리 춤의 정신을 담을 수 있다. 또한 이와 관련해 영가무도라고, 우리 민족이 오랜 시간동안 해온 건데, 오장을 움직여서 긴 소리를 내는 거다. 소리를 내다보면 몸을 들썩이게 되고, 그러다가 춤을 추게 되고, 나중엔 일어나서 뛰게 되는 과정이다. 이 역시 고구려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지금도 꾸준히 무대에 오르며 공연을 해오고 있다. 연습량은 얼마나 되나?
하루 연습량이 몇 시간이라고 딱 단정 지을 순 없다. 공연이 있으면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까지 연습한다. 평소에도 꾸준히 연습하고 계속 연구하고 있다.

-춤은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어렸을 때 공부를 잘 했다고 들었는데….
배우지 않고 다섯 살부터 추기 시작했다. 동네 어른들이 부르는 민요에 맞춰 춤을 곧잘 췄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무렵에 국악원에 들어가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어렸을 때 방정환 선생한테 노래와 유희를 배웠고, 악기도 다루셨다고 들었다. 대학교 진학할 때도 내가 다 결정했다. 당시 무용과가 많지 않았는데, 서울대 체육교육과에서 춤을 가르친다고 하기에 서울대를 간 거다. 서울대 다니면서 상이란 상은 다 휩쓸고 다녔다. 당시 사람들을 요즘 만나면 나보고 한다는 얘기가, 출세할 줄 알았는데 지금 이렇다고 하더라.(웃음)

이애주 교수의 '살풀이'

-올해 정년이다. 소회가 어떤가?
서울대에는 비록 무용과가 따로 있지 않지만, 30년 동안 내가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놔두고, 좋은 동료, 선후배들, 제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거기서 토대를 다져 맑은 정신으로 지금까지 정도를 걷게끔 해준 게 새삼 고맙게 느껴지더라.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
국내 춤 교육은 제도적으로 제대로 자리 잡고 있지 않다. 나는 제대로 된 춤교육기관으로서의 춤대학을 설립해 앞으로 일생의 맥을 잇는 작업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