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칼럼] 추상과 아방가르드, 현대건축의 탈구축주의가 갖는 공통분모
[건축칼럼] 추상과 아방가르드, 현대건축의 탈구축주의가 갖는 공통분모
  • 최혜정 국민대 건축학과 교수/건축가
  • 승인 2013.02.0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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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사에서 ‘추상’ ㆍ Abstraction의 등장과 진화는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유하게 되는가에 대한 많은 질문을 상징한다. 쉽게 생각하면 구상의 반대 지점을 추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상은 대상을 좀 더 확실히 보고, 설명하고, 명확히 하는 것인 반면, 추상은 대상을 지우는 프로세스이다. 즉, 지워서 가장 궁극적인 개념과 관계, 그 작동방식 등, 보이는 것 뒤에 숨어있는 무형적인 속성들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류사에서 추상은 세상과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근본적인 태도의 문제이고 개념의 문제였다. 순수미술뿐만이 아니라 조각, 영화, 음악, 건축, 문학 등 미학과 연결되어 있는 많은 분야에 그 영향을 미친 이유다. 추상 이전의 회화나 조각 등은 보이는 것들, 즉 ‘대상’의 묘사와 그 모습, 그리고 그의 보이는 아름다움에 집중하였다면(구상화), 추상은 바라보는 ‘나-주체’와 ‘나의 사유’, ‘사고’로 그 중심을 옮기기 시작하는, 인간의 속성과 본질에 집중하여 다른 세계를 구상하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있다. 인간의 내면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어떤것들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일까..라는 질문처럼 말이다. 문제는 ‘아름다움’ 혹은 미학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 가와 조금이라도 연결이 되어있다면 그 집중도(개념과 관계의 메시지)를 흐리게 되고, 결국 우리는 우리가 익숙한 것들에 가려 진정한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일부러라도 대상의 추상화에 있어서는 ‘제거’, ‘분리’와 ‘해체’가 필요했고, 역사적으로 보이지 않는것들에 대한 탐구와 고민은 이러한 해체정신을 의도적으로 추구하였다. 일련의 예로, 큐비즘(Cubism)은 회화의 대상을 파편화시켰고, 칸딘스키(W. Kandinsky)는 기하학적 구성과 색채로 대상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내적 필연성’을 표현하였으며, 말레비치(K. Malevich)는 검은 사각형을 흰 바탕에 대치시켜 예술적 표현의 가장 절대적 관계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모두 우리가 익숙한 것들에 대한 해체 혹은 완전한 분리를 추구한 작업들이다. 몬드리안(P. Mondriaan)과 디스틸(De Stijl)그룹은 그들이 사용했던 색과 기하학적 요소에 각각의 속성을 부여하여 기호화하였고, 그 기호로 새로운 관계와 리듬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좌) piet-mondrian, (우) malevich

20세기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아방가르드’의 의미를 살펴보자. 아방가르드ㆍAvant-Garde는 불어이지만 영어로 풀이하면 “Advanced Guard”, “Vanguard”라는 의미로 ‘선봉’ 혹은 ‘전방’으로 해석된다. 군사용어에서 쓰였던 이 용어는 싸움터에 나가기 전, 적진의 지형이나 상태를 미리 파악하는 소수정예의 부대를 가르켰다. 다수의 군사가 경험하기 이전에 미리 앞서 나가는 경험자들, 이들이 바로 아방가르드였던 것이다. 칸딘스키는 예술정신, 즉,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삼각형’에 비유했다. 그는 삼각형에서 예술가(아방가르드)는 가장 위의 꼭지점(정점)에, 대중은 삼각형의 저변에 위치한다고 하였으며, 삼각형이 서서히 위로 움직이면서 예술가들(정점)이 먼저 거쳐 간 공간을 대중이 나중에 공유하고 점유하게 될 것이라는 묘사를 하였다. 여기서 삼각형의 ‘이동’이 가지는 의미는 시간의 흐름이기도 하지만, 공간적 진화도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는 대중의 문화를 이끄는 선두자적 역할을 하지만 그만큼 외롭고 고통스러운 위치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바로 이러한 고통의 작업들이 ‘이후’세대들에 대한 영향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다시말해서, 피카소의 그림으로 인해 우리는 그림을 다르게 보는 방식이 좀 더 익숙해지고, 말레비치의 심오함으로 인해, 추상미술의 미니멀한 의미와 언어도 이제 꽤 익숙하다는 이야기이다. 도발하는 것들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훨씬 다양한 취향들을 공유하고 논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좌) kandinsky, (우) picasso analytic cubism period 2

현대건축에서도 이러한 ‘해체작업’과 그로 인한 갈등들이 존재하여 왔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결국 건축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도발하는 방식으로서 말이다. 그 중 현대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으로 논의되는70-80년대의 탈구축주의(Deconstructivism)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인 건축을 해체하고 교란시켜 그 이질감에서 드러나는 잠재성을 찾고자 하는 테마적 성격을 공유한다. 탈구조주의, 혹은 후기구조주의(Post-structuralism)의 한 가지치기였던 데리다(Derrida)의 이론인 탈구축(Deconstruction)과의 개념적 연결고리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 올리는 탈구축주의 건축은 날라가는 모습을 띈 기이한 형상의 건축이다. 마치 건물이 폭탄을 맞은 듯 파편화되어 있거나 삐딱하게 서 있는 모습ㆍ우리는 이런 모습들을 보고 ‘해체주의’건축을 이미지적으로 단정짓는다. 그러나 여기서 ‘해체’는 좀 더 생각해보아야한다. 우선 단어-Deconstruction의 의미만 보아도 우리는 이 표현이 ‘구축적인’ 혹은 ‘또 다른 구축’을 위한 해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Destruction이 아닌 Deconstruction이기 때문이고 해체가 끝이 아닌 해체로 인해 다른 것이 구축되는 것의 암시이기 때문이다. 또한 ‘탈구축’이라는 이름으로 모호하게 그룹화가 되어 지는 듯 하지만, 알고보면 이들은 정식으로 이 이름을 달고 활동한 것이 아닌, 개념과 사고를 느슨하게 공유하고 생각의 흐름에 영향을 받은 세대라는 사실이다. 당시 시대적 양상은 모더니즘의 실패와 좌절 후에 건축이 흘러가는 방향을 거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총체적으로 건축이 가지는 고질적인 버릇과 그 전형을 의도적으로 비틀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탈구축주의 건축은 일련의 ‘생김새’를 공유하는 양식이 아니였으며, 오히려 정신과 사유에 대한 메시지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양식’이나 타입으로 분류하고 유형화하는데에 급급한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양상들은 개념적으로 보면 지난 과거가 아닌, 오늘도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의 ‘사고’에 대한 문제이다.


* 건축가 최혜정, 미국 렌슬리어 공과 대학과 콜럼비아 건축 대학원을 졸업하고 뉴욕과 서울에서 활동 중이다. 현대 국민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1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 큐레이터 등의 프로젝트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