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상 수상자 인터뷰-이수경 도쿄 가쿠게이대학 교수] “배려 정신 바탕으로 평화적인 한일 문화 발신지 만들 것”
[문화대상 수상자 인터뷰-이수경 도쿄 가쿠게이대학 교수] “배려 정신 바탕으로 평화적인 한일 문화 발신지 만들 것”
  • 이혜진 기자
  • 승인 2013.02.2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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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관 없애기 위해 일본에 한국문화알리기 운동 시작해

 

△일본 교토 리츠메이칸 대학교 대학원 석·박사 △2005~현재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 현재 일본 사이버대학교 한류문화론 객원교수·춘천시 명예홍보대사 △2001~2005 야마구치 현립대학교 첫 한국인 교수 부임 △2005 제9회 일본 여성문화상 외국인 최초 수상 △2012 일본 국립대학법인 사범·교사양성대학교에 한국학 연구소 설립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을 축하한다. 수상 소감을 부탁한다.
“매일같이 일에 빠져 허덕이던 내게 갑자기 문화대상이라는 큰 상이 주어졌다기에 깜짝 놀랐다. 한마디로 사막에서 헤매다 지쳐있을 때 멋진 오아시스를 선물 받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준 기쁜 소식이었다. 무엇보다도 엄격한 전문가들로 모인 심사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나를 수상자로 선정해 주셨다는 후문을 듣고서는 그 점이 더욱 더 기뻤다. 그만큼 내가 걸어 온 고투의 길을 평가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울문화투데이> 및 심사위원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앞으로도 성실히 한일간은 물론 다국간 문화교류의 가교 역할에 남은 인생을 쏟을 각오를 해 본다. 그런 시대적 사명의 재확인이 이번 수상의 의미가 아닐까?”

-일본과 한국 등을 오가며 한국 문화 안내 연수, 한국 문화 소개 수업 등 일본에서 한국 문화알리기 운동을 꾸준히 해왔다. 문화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나는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만 하기에는 뭔가 아쉬웠기에 1990년에 일단 손이 닿을 수 있는 국가 공인 통역 시험을 취득했다(일본 공인 통역자격 88호). 시험과목은 정치 경제 역사 상식 지리 등 다양했는데, [지리]는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의 명승지를 TV소개나 책으로 봐도 감이 오지 않기에, 3000엔짜리 일본 지도책을 구입해 일일이 간 곳을 체크하며 드라이브를 다녔다. 도쿄나 큰 대도시에서만 살면서 보는 게 결코 일본의 전부가 아니더라. 오히려 시골에 가면 다른 일본이 있고, 보수적이면서도 대단히 인간적인 일본도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 일본 문화와 한국 문화의 차이를 피부로 느끼게 되고, 한국 혹은 한반도에는 어떤 선입관이 깔려있음을 알게 됐고 기회만 되면 한국 문화를 쉽게 전할 수 있는 다양한 소재로 알리고 다니려 했다. 때로는 송창식 씨가 불렀던 [가나다라마바사]란 음악에 맞춰서 한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직접 만든 한국 음식 등을 가지고 가서 간단한 회화를 한국말로 가르친 뒤, 함께 먹기도 했고, 대로는 선물 받았던 한복을 입히면서 역사와 의복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도 했다. 식민지 역사와 남북 분단의 역사와 현실, 고대부터 중세, 근현대까지의 한반도 관련과 현재의 재일동포 사회, 유교사상과 한일 사회, 남녀노소에 대한 개념과 젠더, 현대 한국사회와 교육, 병역과 젊은이들 등 소재는 무한했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알려고 했기에 정신없이 강연에 불려갔었고, 나 역시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다.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은 내가 역사를 배웠고, 초대 총독의 땅에 갔더니 개인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닌데 무지하거나 무관심해서 차별적 표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봤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먹고 활동하기 시작하니 언론에도 알려졌고, 로터리크럽이나 각 시청, 현청, 혹은 JR(일본 열차) 역장들 교육이나 현역 교사들, 여성 지도자들 교육, 각 초중고대학 등의 강단에서 다양한 내용으로 요구를 해 와서 열심히 공부했고, 어떻게 하면 쉽게 그들에게 전달할까를 궁리하는 생활을 했다.”

-또한 이러한 강연, 수업 등에 참여한 일본인들의 반응이 궁금하며, 더불어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해 어떤 인식과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도 알고 싶다.
“난 상대에게 이야기할 때 가급적 내 것을 주장만 하는 것은 삼가려고 한다. 호혜평등이란 개념에서 개인적 감정 이입이 없는 말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내가 전달은 하지만 선택은 상대 몫이다. 그것을 강요하거나 억지로 주입하는 것은 되려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에 큰 목소리로 설득시키려고 하는 강연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단지, 우리는 같은 이 시대에 만난 인연들이기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역설하며, 역사 사회는 대부분 일본 측 자료를 가지고 소개를 한다. 그러면 일본에서는 설득력도 강해진다. 강연이나 집중 강의 등의 참가자들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많았고, 적어도 강연 후의 감상문에는 납득 내지는 감동을 했다거나 깨닫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로 가득했다. 문화를 알리는 것은 얽힌 실타래를 푸는 구조와 비슷한 것 같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 강연을 들은 사람들이 내용적인 불만을 하거나 저돌적인 언사로 비판한 것은 본 적이 없다. 겸손한 사람들이라서 그럴까? 하지만 난 그들이 모두 이웃 한국을 알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인 것 같았고, 사회적으로도 한류 붐 전후였기에 긍정적인 흥미가 일었기에 정보를 제공해 준 내게 고맙다는 소리를 했다고 본다. 그렇기에 일부 우익들의 억지 비방행위나 교만한 자민족 우월주의에 젖어 차별의식이나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선량하고 소박하고, 겸손하고, 검소한 편이다.”

-수많은 문화알리기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 또는 가장 뿌듯했던 일이 있다면 알려 달라.

-수많은 문화알리기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 또는 가장 뿌듯했던 일이 있다면 알려 달라.“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은 히로시마에서 있었던 JR(Japan Railway)역장들 교육이었다. 처음엔 한국 관광객이 증가하니 역장들이 국제화 슬로건 하에서 한국 사회나 기본적인 한국 문화를 알려고 하나보다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몇 번이나 확인 전화가 왔기에 참 신중하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마중을 나온 분들도 JR그룹 고위직들이었고, 기다리는 시간에도 정중히 챙겨주셨다. 시간이 돼서 회장으로 들어섰더니 주변 각 역의 역장들이 모였는데, 모두가 중후한 연령에 짙은 검정색 수트의 제복과 흰 셔츠, 넥타이를 맨 120여 명 전원이 일어나서 인사를 하는데, 순간적으로 전원 남성의 제복 세계에 압도당했었다. 얼마나 사전 공부를 하고 왔는지 모두가 자신들의 노트에 내 강연 내용을 옮겨 적거나 가필을 하고 있었다. 그 긴장 속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늦가을임에도 땀이 흐르도록 열띤 강연을 했고, 돌아올 때는 정말 유익한 내용이었고 모두 만족한다며 몇 분들이 바래다주기에 참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일본서 강연 횟수만큼이나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현역 교사들에게 강연을 한 뒤, [신념을 가지고 교사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해줘서 고마웠다]는 등의 감사 편지를 받았을 때 교단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고, 초등학교에 가서 한국 문화에 대한 설명을 해준 뒤, 한복을 입혔더니 너무 귀여워서 애들보고 [너무 괜찮아, 멋있다 얘] 이런 말을 건넸더니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중에 담임과 더불어서 감사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속에는 [우리 부모님도 안 해주신 표현으로 저를 인정해 주셔서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라는 등의 가슴 뭉클한 말들이 있었기에, [한국 사람이 그들에겐 좋은 사람으로 자리매김을 했다면 정말 다행이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가득했던 적도 있다.”

 

-일본 교토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알려 달라.
“어려서부터 주로 다양한 국내외 인물전이나 사상, 문학 관련 책을 많이 읽곤 했다. 그렇게 지구촌의 다른 삶들을 책으로 보고 느끼다보니 단 한 번의 내 생을 그냥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먼저 유학 갔던 선배들이나 주변에서 나를 지탱해주던 친구들 혹은 민단측 등의 정보로 일본행을 결정했다. 게다가 외조부께서 일본 생활의 경험이 계셨기에 어릴 때부터 일본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다른 외국보다는 친근감이 있었고 말이다.”

-일본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처음에 자리 잡기까지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 만난 일본인들은 한국 혹은 한반도에 대한 오인도 많았었고, 일본인들의 외국인 차별, 특히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은 매우 심한 편이었다. 국제전화도 교환수를 통해야만 겨우 할 수 있었다. 전화 외의 연락은 국제 우편만이 가능했고, 부모님 생신 때 선물을 부치면 물건들이 사라지기 일쑤였고 말이다. 게다가 슈퍼마켓에서 한국 음식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라 처음 한, 두 달은 국수나 과일만 먹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웃음) 물론 지금도 도쿄에서는 연구실과 집만 왕복하는 생활이기에 한식 타령이나 온돌방 타령은 떠날 날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 일본에 왔을 때에 비하면 지금은 한국 문화소개도 많이 이뤄지고, 음식재가 넘쳐나니 훨씬 좋아진 편이다.”

-2001년 조선 총독부 초대 총독의 땅인 야마구치 현립대학교 첫 한국인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한국인이라서 겪었던 어려운 점이나 차별당한 일은 없었나?
“2001년 3월 말, 오랜 교토 생활을 청산하고 야마구치로 향했는데, 나를 맞이한 당시의 동료 교수들은 첫 한국인 교수였던 나를 오히려 가족적인 분위기로 맞아 주셨다. 특히 학장께서는 승려 출신이셨는데, 많은 배려를 해 주셨고, 학교를 바꾼 뒤에도 긴 두루마리 편지에 붓글씨로 내 앞날까지 격려해 주셔서 감동을 받은 적도 있었다. 다만 내가 이사한 집이 학교 숙소였는데,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묘 앞이었고, 야스쿠니 신사 산하의 지방 신사인 호국 신사, 자위대 등이 주변에 있어서 제국주의가 그대로 재현된 것 같은 느낌(근대사 전공이라서 더 예민했던 것 같다)을 받았기에 그게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같은 시기에 입사한 또래의 동료들과 사이가 좋아서 우리는 트리오로 불리며 타향에서의 운명공동체로 행동을 같이 하는 ‘절친’이 됐다. 소중한 학우이자 전우를 만나게 된 곳이 바로 야마구치 현립대학교였다. 자잘한 차별의식이나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야 세상 어디를 가나 있는 법 아니겠나. 그러나 야마구치는 내가 활개를 치며 살았던 곳이고, 내 소중한 학우들과 동료 선배 교수들과도 친목을 도모했던 곳이기에 좋은 기억들이 참 많다. 또한 제자들과도 친했던지라 야마구치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근대사의 현지 답사와 더불어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환경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식민지 일제 강점기의 주요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야마구치지만 개인적으로는 동료는 물론, 제자들, 야마구치 지역민들과도 상당히 친숙하게 지냈던 생활이었고, 한국인이었기에 더 따스하게 배려를 받았던 기억들도 많다.”

-앞으로의 계획과 꿈은 무엇인가?
“학교는 양심을 키우는 곳이다. 그렇기에 교사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올바르고 건전한 사회를 위해서 제대로 된 국제 교류, 올바른 한일 문화/역사 전달은 물론, 서로의 사회를 알리는 일을 해야 한다. 지식만을 주입시키는 곳이라면 굳이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학원이란 대안이 있다. 학교는 인성 교육도 지식 교육도 겸하며 양심과 성실히 노력하는 사회성을 육성시켜 건전한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기본적 교육 기관이다. 그렇기에 편견을 가진 교사나 입시 위주의 학교에서는 [사람]이 성장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다양한 문화 소재를 활용해 모든 수강생이나 강연을 듣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필요한 [배려의 정신]의 고귀함을 전하려고 한다. 차별 없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 서로를 존중하여 내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상식과 예의를 알리며, 한일 관계는 물론, 지금 이 시대의 지구촌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알리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싶다. 위의 취지와 신념으로 교단에서, 강단에서, 혹은 해외 각지에서 한일 문화를 통한 다양한 기획을 해나가기 위해 지난해 교내에 한국학 연구소를 개설했고, 한국은 물론, 재일 동포, 중국 조선족,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할린이나 미국 등지의 동포들과도 커뮤니케이션 네트를 구축해 미래지향적인 문화적 기획을 같이 구상하며 일본과 각 지역을 연결하는 평화적인 한일 문화 발신지를 만들고 싶다. 폭 넓은 활동이기도 하기에 취지를 같이 하시는 분들의 동참도 환영하며, 이미 몇 분들과의 계획도 추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