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현대미술의 아버지' 박서보 화백, "작가는 자기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인터뷰] '한국현대미술의 아버지' 박서보 화백, "작가는 자기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 윤다함 기자
  • 승인 2013.03.1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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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삶 꿈꾸는 노화백 "선 긋기 작업은 참선"

볼 때 마다 느낌이 다른 그림, 왼쪽에서 볼 때와 반대편에서 볼 때 색감이 다른 그림이 있다. 화려한 형광색인 것 같으면서도 가만 보니 점잖은 빨간색이다. 그의 작품 주요 재료인 한지는 강렬한 색감도 토해내거나 내뱉지 않고 차분하게 흡수해 발산한다. 그 때문인지 박서보 화백의 작품은 신비롭다.

박서보作 <Ecriture(描法) No.060114>

예술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그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이라고 박 화백은 말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시대를 그려야 해. 마치 모든 시대를 다 산 것처럼 남의 시대까지 그려대는 건 잘못된 거예요. 자신이 천재인 마냥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 애들을 따라한다면 결국 역사에 버림받고 말겁니다.” 그가 살아온 시대는 소위 산업화 시대. 20세기 아날로그 시대의 마감과 함께 산업화 시대도 끝났다. 박 화백이 표현하길 자신은 ‘불행하게도’ 디지털 시대에도 살아남은 양극 속 ‘샌드위치맨’이다. 비록 자신의 시대는 종료됐을지라도 지금 이 시대를 통찰하고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나 고민하는 것 역시 예술가의 몫일 것이다.

△1931 경북 예천 출생 △1962-97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이후 명예교수) △1977-80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1986-90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 △개인전 : 1962 국립중앙도서관화랑(원형질시리즈발표) / 1973 도쿄 무라마쓰화랑(묘법시리즈발표) / 2007 경기도미술관(박서보, 색을 쓰다展) / 2008 뉴욕 아라리오(Empty the mind展) 외 다수 △소장처 : 서울시립미술관, 리움삼성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워커힐아트센터, 일본 히로시마시현대미술관 외 △2011 은관문화훈장 /  1995 서울특별시 미술부문 문화상 / 1994 옥관문화훈장 등 수상

세계 어디에 내놔도 새로운 박 화백의 작품은 그 고민의 성공적인 해답이다. 가장 아시아적이면서도 세계적이라고 평가 받는 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작가이다. 자기 시대를 중심으로 지금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첨가하느냐가 박 화백이 말하는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이다. 그리고 식지 않는 열정.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절대로 실패하는 예술가는 되지 않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런데 잘 팔린다고 옛날에 그렸던 그림을 요즘 그대로 그려서 파는 작가가 있어요. 60년대 그렸던 그림을 지금 와서 그대로 그린다고 그때의 감성이 나오는 게 아니거든. 물감부터가 요즘 물감으로 쓰면 느낌이 아예 다른데 무슨….”
앵포르멜 작품을 도둑맞아 남아 있는 작품이 별로 없는 박 화백은 지금 다시 앵포르멜류를 그리고 싶어도 감성이 맞지 않아 그럴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60년대 그림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모 작가가 있다며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여전히 옛날에 매몰돼 변화하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건 예술가로서 위배되는 행위라고 말이다.

박 화백의 작품은 해외 콜렉터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으며 선호도가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 중 하나는 도난작품들이 소더비나 크리스티에 장물로 자주 등장하는데 있다. 300점 이상 도둑맞은 작품들이 전 세계에 실제 가치보다 값 싸게 돌아다니고 있다 보니 콜렉터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거다. 하지만 그가 직접 소더비나 크리스티에 출품한 적은 없다. 세계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는 말이 나오면 으레 작품의 가격이 급등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지금껏 그림 값 올리려고 딜(deal)하고 그런 건 해본 적이 없지. 내 그림 값이 올라갈진 몰라도 내 그림의 가치가 올라가는 건 아니거든. 그런데 그 짓 안하는 예술가 세상 천지에 없어. 아무래도 이제 와서 보니 그런 조작이라도 좀 했어야 했나봐.(웃음)”

세계 최고 화가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혀온 박 화백은 현재 그렇게 돼 가고 있는 중이라고 자평했다. 2011년 5월 월스트리트저널에 ‘Father of Korean Contemporary Art’란 제목으로 박 화백의 특집기사가 실리기도 했는데, 금융경제가 세계의 중심인 요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경제신문에서 그를 주목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세계적인 위치가 확인된다. 또한 앤디워홀 등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과 삶을 조명하는 출판사 아술린(Assouline)에서 박 화백의 작품들과 삶의 모습을 담아 단행본 ‘Empty the mind’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는 아시아작가로는 최초이다. 모든 걸 이룬 것 같은 그이지만 대중화만큼은 실패했다고 말한다. 작품 값 올리는 데 열을 올리지 않았고, 대중에게 작품을 판매하는 데에도 큰 관심이 없었던 순수한 예술가가 여든을 넘기고 후회 아닌 후회를 한다.

박 화백이 1992년부터 직접 작성해온 제작현황 노트. 작품타이틀, 제작년도, 크기, 색상 등 작품에 관한 모든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한번은 그가 도둑맞은 그림들을 겨우 찾은 적이 있다. 작품을 죄다 돌돌 말아 훔쳐간 도둑들을 잡긴 잡았는데, 그 작품들을 일일이 다 펴야하는 게 또 일이었다. 그 작품들 하나하나에 다시 싸인을 하려고 하니 그 그림을 그릴 당시와 그때와는 글씨체가 조금은 달라져 있는 게 마음에 걸리는 그였다. 그래서 그는 싸인만 다시 한 게 아니라, 그 작품을 어디에 사는 누가 훔쳤고, 싸인을 언제 다시 한다는 둥 작품 도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부터 그에 파생된 자잘한 일들까지 모두 작품 뒤에 손으로 썼다. “만약 작품 보수하면 언제 어떻게 보수했다고도 써놔요. 한글로도 써놓고, 영어로도 써놓고, 언제 어디서 전시됐다는 것 까지 모두…. 한마디로 그림 경력을 상세히 기록하는 거죠.”

이런 그의 꼼꼼함은 일명 ‘제작현황 노트’에도 이어진다. 타이틀, 년도, 번호, 크기, 색상 등을 기록한 이래로 하나도 빠짐없이 써놓은 그 노트는 마치 역사적인 문헌과도 같다. “92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만 해도 2540여 점 정도…. 그 이전에는 이런 걸 할 생각을 못 했지. 불나서 타버리고, 도둑맞고 한 게 한 600점 이상 될 거고, 앵포르멜이나 다른 것들은 몇 점이나 되는지도 모르겠네요.”

박 화백의 이런 습관은 작품을 도둑맞은 이후부터 생겼다고 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김창열 화백 동생이 그림 한 점을 보여주며 자신의 형님 그림이 맞느냐고 물어봤단다. 박 화백이 보기에는 분명 김 화백의 물방울 그림이 맞았고, 틀림없이 김 화백의 작품이 맞다 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감쪽같이 만들어져 당사자인 김 화백조차 헷갈려 한 그 작품은 다음날 위작으로 판명 났다. 바로 김 화백의 제작노트 덕분이었다. 노트에는 그 작품에 해당하는 제작번호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박 화백은 새삼스레 자신의 습관을 다행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대가들의 이러한 습관은 미술계에 퍼지고 퍼져도 해로울 것 없는 유익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국내 미술계 혁신에 앞장 선 행정가이자 교육자

그는 예술가이면서 혁신적인 행정가이자 교육자이기도 했다. 대학교 4학년 때, ‘반국전운동’을 벌여 취직도 못하고 힘겨운 생활을 했었다. 홍대 교수로 겨우 취직하고서는 기존 ‘담임제’에서 학생들이 교수를 직접 택할 수 있는 ‘교실제’로의 개혁을 외쳤다가 홍대에서 내몰린 적도 있다.

이후 1970년대 말부터 1980대 초까지 미협 이사장을 맡아 확산-발굴-집약 운동에 힘썼다. 현대미술이 시민 속에 뿌리를 내려야 발전할 수 있기에, 중앙몰림 현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화 연방체제화를 펼쳤다. 이는 각 지역의 특성에 걸맞게 현대미술이 발전하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밑거름이 됐으며, 특히 광주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만들어지는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신인 발굴을 위해 무심사제도인 ‘앙데팡당’을 창설했으며, 우리 정신전통의 재발견과 가치관의 집약을 위해 단체전 ‘에꼴드서울’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한 달 넘게 물에 불린 한지를 캔버스에 붙이고 수 만 번 밀어내고, 긁어내고, 갈아내고, 덮어씌우고, 잘라내는 등 이와 같은 행위가 끊임없이 이어져 탄생된다. 이른바 ‘묘법’으로, 이는 보통 손이 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수 명의 조수를 두고 작업을 진행한다. 박 화백이 조수를 두고 작업하는 것은 억제와 ‘무화’無化시키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이다. 오히려 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그는 말한다.
“개인적인 메시지가 강한 작품에는 조수를 두면 안 되지. 피카소나 고흐 작품에 외부 손이 들어오면 되겠어요? 하지만 나는 외부 손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좋아요. 내 작품은 손맛을 쌓아가는 일, 즉 개인의 개성이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이야. 내가 색을 개어 캔버스에 밀어서 완성시켜놓고 색 순서를 붙여놓으면 조수들은 그 순서대로 그러데이션해가며 손맛을 입혀가는 거지.”
작품의 콘셉트와 에스킷 그리고 색을 결정하고 행하고 마무리하는 것은 모두 박 화백의 손에서 이뤄진다. 다만 철저한 객관화를 요하는 그의 작품 특성상 ‘조수’라는 외부적 개입을 통해 차분히 손맛만을 쌓아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하면 내 삶이 묻어나요. 난 그 냄새까지도 지우자는 거죠. 수 명의 손이 계속 중첩되면서 ‘무명성화’시키는 겁니다.”

조수 많이 둘수록 無化 경지에 가까워질 수 있어

이를 보고 ‘조수가 다 한다’는 혹자의 비판을 두고 그는 일갈했다. “베토벤이 작곡한 곡을 다른 사람이 지휘했다고 해서 그게 베토벤만의 곡이 아닌 게 됩니까? 건축가가 건축할 때 절대 혼자 하지 않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개입하는데. 작업 기본세계 콘셉트와 설정은 내가 다 해요. 다만 객관화를 위한 도구로서 개체가 필요한 것뿐이지. 내 작업에서는 내 손맛이나 누구 손맛이나 중첩되면 다 똑같아집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표현이란 명분으로 모든 생각을 쏟아냈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달라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21세기 디지털시대는 스트레스병동과도 같아요. 총기난사, 무차별 살인 등 이런 게 모두 다 스트레스 때문인 세상이죠. 그런데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처럼 캔버스에 작가 생각을 와르르 쏟아놓고 사람들은 그걸 사다가 거실에 걸어놓는 것. 그것 역시 또 다른 방식으로 폭력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21세기 평면은 흡인지처럼 보는 이의 스트레스와 불안한 심리를 빨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디지털 시대에서 그림의 역할입니다.”

또한 미래 평면에서 작가의 손은 작가의 생각과 개념을 운반하는 도구로서 이용될 거라고 한다. 즉 손, 그 자체의 맛으로만 이용된다는 거다. “지금까지도 즐겨가는 아주 오래된 추어탕 집이 있어요. 허름하고 비좁은 곳인데 여전히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어. 그 집에 왜 사람이 넘쳐나겠어? 음식은 손맛 아니겠어요? 음식의 맛처럼 그림 역시 손맛이 결정짓게 될 겁니다. 그림에도 그런 맛을 느낄 수 있도록 가야 한다는 거죠. 이게 바로 미래 평면의 모습이에요.”

‘변해도 추락하고, 변하지 않아도 추락한다’는 박 화백의 명언은 미술인들의 귀감이다. 그의 말대로 예술인은 섣불리 변해도, 정체해 있어도 추락한다. 지금껏 쉬지 않고 변화해온 그는 추락하지 않은 유일한 작가이다. 그건 그가 곁눈질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그곳에 적응하며 시대를 해석해 왔기에 가능했다.

박서보作 <Ecriture(描法)No. 070907>

박 화백의 가장 최근 변화는 2000년대에 들어서며 색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저녁에도 새빨갛게 불타는 단풍을 보고 탄복한 그는 자연의 위대함에 압도됐다고 한다. 다음 날 다시 본 단풍은 전날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이렇게 보면 빨간색이고, 저렇게 보면 보라색을 띄는 자연의 오묘함으로 인간의 정서를 치유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색은 정서치유의 도구였던 것. 이후 그의 작품은 강렬하면서도 우아한 색으로 표현된다. 그런 자연의 아량을 담은 그의 작품은 평온하게 다가온다.

세상 떠난 故이두식 화백 떠올리며 눈시울 붉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아우르며 달려온 그가 앞으로 또 다른 변화를 보여줄까?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온다. “나이도 있고…. 이제는 최대한으로 심화해 밀도 있게 나가는 거지. 내가 벌써 여든 셋입니다. 몸도 불편하다보니 요즘은 하루에 6-7시간 정도 작업해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몸이 다른 것 같아 앞으로 살아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처절하게 느껴.”

지난달, 故이두식 홍대 미대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식에서 박 화백은 이 교수의 팔순 때 축하해주겠노라고 축사를 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이 교수가 급작스럽게 황망히 세상을 떠났다. “축사 때 괜히 내가 울컥하는 거예요. 괜스레 너무 감상적으로 되는 것 같아 말 길게 않고 내려갔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 그들의 인연은 이 교수가 홍대 전임 교수 선임 직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학장은 박 화백의 눈치를 보며, 이 교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박 화백은 ‘좋다. 학교에 도움될 거다’고 했더니 학장의 만면에 미소가 트였다고 했다. “지금부터 할 일이 참 많은데, 너무 일찍 갔어, 너무 일찍 갔어….” 단단하기만 할 것 같은 박 화백의 눈빛이 아른거린다.

수 십 년 전, 자신이 직접 찍었던 부인과 자녀의 사진 앞에서 박 화백이 2013년 3월, 포즈를 취했다.

곁눈질만 하는 젊은 미술인들에 일침

요즘 젊은 미술인들이 사고하지 않고 주변 곁눈질만 하고 있다고 그는 일침을 가했다. 자기 등 간지러운데 남의 등 긁어주고 있는 꼴이라는 것. “우리나라 미술계에 70년대가 없었다면 그건 시체야. 자연과의 회복운동인 단색화전은 아주 중요한 운동이에요. 동양에서는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이라고 봤죠. 일원화돼 있는 거지. 동양화를 보면 자연 속에 인간이 조약돌만한 크기로 나오죠?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순응하는 삶을 회복시키고자 했던 거예요. 자연의 일부로 동화되며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모를 때는 그걸 전근대적이라며 파괴하고, 자연도 파괴하곤 했잖습니까. 나는 그걸 60년대부터 회복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70년대부터 한국 모노크롬이 되살아났지. 그런데 유럽화 되고 식민지화 됐던 미술을 그렇게 힘들게 다 뜯어고쳐놨더니 요즘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있어요. 젊은 애들 보면 중국적 팝이나 일본 만화 같은 걸 하고 있는데, 일본은 일본의 조건에 의해 그런 거고, 중국은 사회주의가 개방되며 그렇게 된 건데, 그건 생각 안 하고 그냥 무조건 그걸 따라하고 있어.”

박 화백에게 그림이란 수신하는 도구에 불과하단다. 그는 늘 선비처럼 살고 싶었다. 누군가는 귀양 보내고, 누군가에게는 사약을 먹여야 하는 양심의 갈등을 선비들은 지필묵으로 표현했다. 인격을 다스리는 수단으로서 그림을 그렸던 선비들처럼 박 화백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했다. 이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익숙했던 불가적인 요소와 연결된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선들은 애초부터 세우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단지 선을 계속 긋는 반복행위를 통해 자신을 비워내고자 했던 것이다. 수 만 번 무의미한 선을 긋고 있으면 어느새 선과 선 사이의 골짜기가 형성돼 자연스레 선이 솟아 올라온다. 스님이 하루 종일 목탁을 두드리며 독경한다면, 박 화백은 수 만 개의 선을 그으며 자신을 비우고 참선의 길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