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미술 출판의 불황과 위기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미술 출판의 불황과 위기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3.04.10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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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부터 윤진섭 미술평론가를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칼럼 필진으로 모셨습니다.
 25년간 미술평론가로 활동해 오시면서 현장에서 접하고 느끼는 미술계의 따끈따끈한 핫 이슈를'윤진섭의 비평프리즘'을 통해 매회 연재할 계획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70년대 중반부터 작가 생활을 하다 비평으로 전환, 미술평론가로 활동한지도 어느 덧 스물다섯 해가 다 돼 간다. 지난날들을 돌이켜 볼 때 한 일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미술 현장을 지킨 것 하나 만큼은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다. 그 사이 그럭저럭 쓴 글들이 책 여덟 권으로 묶여 나왔으니 적어도 비평가로서 직무유기는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말이 여덟 권이지 그것이 나온 과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다. 어떤 책은 출판사 사장에게 통 사정을 해서 겨우 햇볕을 본 게 있는가 하면, 사정이 좀 나아 출판사 쪽에서 출판을 의뢰한 것이라고 해도 재판조차 찍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딱 하나, 근 이십여 년 전에 대원출판사에서 ‘빛깔이 있는 책들’ 총서 중 하나로 나온 ‘행위예술 감상법’은 예술도서 베스트셀러 20위 권 안에 드는 실적을 올렸지만, 이 마저도 원고료를 받고 넘긴 것이기 때문에 인세와는 상관이 없다. 그래서 나의 경우 평론집을 내서 돈을 벌리라는 야무진 꿈은 접은 지 이미 오래다.

국내의 미술도서 출판이 고사 직전에 있다. 대형 서점의 예술도서 코너에 가보면 양적인 빈곤은 처참하리만큼 초라하다. 요즘 유행하는 자기계발서와 해외 소설 번역본으로 꽉 차 있는 베스트셀러 코너와는 달리, 미술도서 코너는 두서너 개의 서가에 불과하다. 신간들은 처음 며칠 동안만 판매대 앞줄에 십여 권 정도 쌓인 상태로 있다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그러니 미술책을 써서 베스트셀러는커녕 스테디셀러 하나 내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미술에 관한 글을 써서 스테디셀러라도 되려면 글을 미문으로 쓰고 내용도 쉽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책은 대중의 구미에는 맞을지 몰라도 전문가 동네에서는 무시를 당하고 만다. 속 빈 강정과도 같은 책을 펴내느니 차라리 그만 두겠다, 자존심이 강한 저술가는 그런 굳은 결심을 하지만 열악한 출판시장이 이내 발목을 잡는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미술 쪽의 저술가들은 전공이 무엇이든지 간에 출판을 둘러싸고 진퇴양란의 심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펴낸 필자의 책. '행위예술의 이론과 현장' 책 표지

미술평론의 출판을 활성화하기 위한 시책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올해부터 진흥기금을 투입했다. 심의 결과 십 여 명에 달하는 필자들이 선정돼 출판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소식이다. 미술시장의 장기적인 불황으로 침체에 빠진 미술계가 그 여파로 인해 출판시장마저 좋지 않은 도미노 현상을 낳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대중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진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미술출판의 불황은 반드시 대중에 그 원인을 돌려서도 안 될 일인 것 같다. 국민소득 2만 불의 시대와 3만 불의 시대는 소비 형태 자체가 다르다. 선진국의 예에서 보듯이 미술품 구입은 3만 불부터 그 시대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미술도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중의 미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미술도서에 대한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미술도서에 대한 출판의 붐도 불 것이고 우수한 필자들이 미술계에 몰리게 될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처럼 추운 겨울을 나겠는가.

몇 해 전, 한 유력한 출판사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갓 나온 신간에 서명을 해 증정한 적이 있다. 책을 받아든 그 사장은 내가 아무런 청탁도 하지 않았는데, 지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린 요즘 미술책을 출판하지 않아요.” 그 출판사는 미술도서 시리즈로 유명한 곳인데 사장은 아마 내가 책 출판을 의뢰할 줄 알았나 보다.

미술책 출판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안 아내가 몇 년 전부터 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디자인 교실을 다니더니 급기야 내 책을 출판하겠다고 나섰다. 1인 출판사를 등록하고 직접 디자인한 파일을 충무로 인쇄소에 넘겼다. 1백 권 한정판. 비용은 5십만 원에 불과했다. ‘행위예술의 이론과 현장’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왔는데 이는 책 안 읽는 사회에 대한 강력한 나의 ‘데먼스트레이션 퍼포먼스’이다.   

* 윤 진 섭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미학과 졸업.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 철학박사.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 총감독,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국립현대미술관 초빙큐레이터(한국의 단색화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현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 호남대 교수,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저서로 <몸의 언어>,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현대미술의 쟁점과 현장>, <한국의 팝아트>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