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국립오페라단의 ‘돈카를로'
[공연리뷰]국립오페라단의 ‘돈카를로'
  • 송현민 음악평론가/이런저런무대연구소 소장
  • 승인 2013.05.03 02: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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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운, 낮은음자리표의 영웅이 돌아왔다

4월의 마지막 주, ‘베르디’제 미사일이 세 곳의 공연장에 떨어졌다. ‘오텔로’의 발사버튼을 누른 이는 지휘자 정명훈(서울시향). 하루의 폭격은 베이스 사무엘 윤을 장착한, 가히 블록버스터급이었다.

두 개의 미사일은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에 떨어졌고, 폭격은 4일간 이어졌다. 서울오페라단의 ‘아이다’와 국립오페라단의 ‘돈카를로’였다.

▲강력한 군주 필리포(강병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무엇보다 ‘돈카를로’는 ‘발사’부터 많은 눈길을 끌었다. 필리포 2세를 맡은 베이스 강병운의 ‘화력’이 컸던 것. 1998년에 ‘돈카를로’의 첫 선을 보인 국립오페라단이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관객 또한 세계의 오페라극장에서 활동한 그의 몸에 체화된 필리포를 직접 목격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첫 국내무대 데뷔’라는 점에 호기심을 앞세워 발걸음을 옮긴 무대였다.

‘돈카를로’는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를 토대로 16세기 스페인 궁정실화에 픽션을 가미된 작품이다. 두툼한 희곡의 분량만큼이나 오페라 역시 두툼한 러닝 타임을 지녔으며, 복잡한 인간관계와 그들의 미묘한 심리 관계를 다루고 있다.

먼저, 돈카를로와 그의 아버지 필리포 사이에는 돈카를로의 애인에서 어머니가 된 엘리자베타를 놓고 묘한 기운이 흐른다. 오늘날에 비유하면 시청자의 구미를 당기는 막장드라마의 요소를 갖춘 것. 하지만 당시 스페인에 항거하며 갈등을 빚은 플랑드르의 입장을 놓고 독립을 주장하는 돈카를로와 반대하는 필리포의 입장도 그 사이에 포개져 있기에 마음 편히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작품이다.

▲대화하는 종교재판관과 필리포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사랑과 정치, 이 둘은 단연 멋진 소재이지만 작품이 갖는 의미의 층을 더욱 두껍게 하고 무게를 싣기 때문이다. 그래서 2막 아토차 대성당의 대광장에서 필리포를 향해 뽑아든 돈카를로의 칼은 사랑을 빼앗아간 적을 향한 것인지, 정의를 짓밟는 폭군을 향해 뽑아든 것인지 복잡한 해석의 여지를 준다.

엘라이저 모신스키의 연출은 1막부터 자신의 연인을 빼앗긴 돈카를로(나승서 분)를 분주하게 흥분시키고, 분주하게 좌절시키고, 분주하게 슬퍼하게 했다. 헤르베르트 무아우어의 경제적이고 검소한 무대는 그런 주인공의 내면에 충실하려는 연출가의 의도를 존중하는 듯했다. 플랑드르 해방에 같이 나서자고 하는 로드리고 역의 공병우도 돈카를로와 우정을 다지며 차분하게 무대를 엮어 나갔다.

그들이 충실히 전개한 1막과 2막은 3막을 여는 필리포의 고뇌를 십분 공감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아내와의 애정이 말라버린 생활, 자신에게 칼을 뽑아든 아들에게 배신당한 처지를 한탄하는 필리포의 강병운은 지금까지 그의 몸에 체화된 모든 오감을 깨워 강병운의 ‘아우라’와 필리포의 ‘내면’을 동시에 선보인 명장면이었다. 그가 거쳐 온 무대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관객의 머릿속을 스치게 하는 무대였다.

필리포의 고민을 놓고 대립하는 종교재판장 역의 양희준 또한 낮은음자리표에 걸쳐있는 묵직한 음표마다 날을 세워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렇게, 필리포는, 강병운은, 관객이 기다린 노장은 자신의 서재의 책상에 엎드려 슬픔에 짓눌린 뒷모습으로 그 날의 관객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왕비를 조롱하는 에볼리 공녀 (나타샤 페트린스키)/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돈카를로의 사랑을 오해하며 질투와 간교의 양념을 치는 에볼리 역의 나타샤 페트린스키는 2막의 배경이 수도원 안뜰이라는 것을 잊게 할 정도로 카르멘 같은 정열의 무대를 선보였다. 의외로 엘리자베트와 그 역을 맡은 박현주의 존재는 빛을 보지 못했다. 작품 자체가 필리포와 돈카를로에 비중을 두었고, 연출의 노선 또한 이들의 애정문제보다는 정치적 견해에 비중을 둔 영향이 컸으리라.

화려한 무대의 ‘박쥐’로 작년 시즌의 막을 내리고, 체크무늬가 돋보였던 ‘팔스타프’로 올 시즌의 막을 연 국립오페라단이 선보인 전의 무대에 비한다면 ‘돈카를로’는 시각적으로 아쉬운 무대였다.

10개의 창과 문을 가진 배경은 1막과 2막에 조금씩의 변화를 입었고, 필리포의 서재에서는 12칸의 거대한 책장에 가려졌다가, 막이 내릴 때는 시작과 같은 모습으로 끝을 맺었다. 비극으로 치닫는 주인공들의 내면을 돋보이게 하는 데는 큰 역할을 했지만 다채로움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