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홍가이 박사와의 인연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홍가이 박사와의 인연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3.05.1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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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수년 전 어느 날, 평창동에 있는 토탈미술관에서 홍가이 박사를 참으로 우연히 오랜 만에 만났다. 일찍이 고등학교 시절에 미국에 유학을 가 MIT 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내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8년 강연 차 학교에 들렀다. 그것이 처음 만남이었다. 그 후 내가 다시 그를 만난 것은 1980년대 중반 서울에서다. 그 무렵 나는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있으면서 행위예술가로 활동을 하던 때였다. 한국행위미술협회를 조직하고 협회 창립기념 세미나에 그를 연사로 초청했다. 그는 당시 한국의 문화예술계에서 스타였다. <히바쿠사>라는 희곡을 쓴 극작가로서 <불의 아해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1979년, 강연을 하기 위해 홍대 세미나실에 들어온 홍가이 박사(당시 이름은 홍기로)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처음에 서양 사람인 줄 알았다. 곱슬머리에 피부가 희고 수염을 기른 그는 영락 없는 서양인의 풍모였다. 키도 크고 미남이었다. 그는 당시 30대 초반의 나이였다. 그의 강연은 서양, 특히 미국의 현대미술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 모더니즘의 실체를 알게 해준 좋은 기회였다. 그의 강연 내용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스트 페인팅과 그 이후의 흐름에 대한 극히 제한적인 것이었지만, 당시 그 강연이 한국 미술계에 미친 여파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이 강의를 통해 그린버그라는 한 탁월한 비평가가 어떻게 서양의 모던아트를 받아들여 정치하게 이론화하고, 그것에 기준하여 잭슨 폴록을 비롯한 미국의 현대미술을 정초해 나갔는가 하는 과정을 평면성 개념을 중심으로 슬라이드를 곁들여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의 이 강연은 그동안 나의 서양미술에 대한 공부가 얼마나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불과했던가 하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나는 방향을 수정하여 처음부터 서양미술사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4학년 가을 학기를 나는 도서관 참고열람실에 파묻혀 그 실체를 파악하기에 분주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80년대 중반이었지만, 그 무렵 그는 '공간'지를 중심으로 학술, 비평적인 논문을 여러 차례 게재했다. 한국미술사서술의 방법론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매우 유익했으며, 88올림픽의 의미를 제의적 관점에서 서술한 글은 내게 어떤 영감을 주었다. 그는 현대미술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공간'지에 피력했고 이 글들은 나중에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다. 한국 현대미술에 끼친 그의 공로는 중앙일보사 계간미술이 펴낸 <현대미술비평30선>이다. 1987년에 나온 이 책은 '최근 20년간 모더니즘과 후기 모더니즘, 사회정치적 관점의 주요비평집'이란 부제가 말해주듯, 이론부재의 한국 미술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중요한 방향타가 되었다. 그는 이 책의 구성과 논문의 선정에 자문을 하고 책머리에 장문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 책은 미술사와 비평, 미술이론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는 물론 전공자에게 조차 현대미술의 이해에 큰 도움을 준 기념비적인 저서다.

그런 홍박사와 나는 2009년 가을에 만나 격월간지 <뷰즈>(9/10호)를 통해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 이 대담은 아시아의 미술이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공동의 인식 하에 어떻게 하면 아시아 현대미술이 세계미술계 속으로 진입할 것인가 하는 실천적이며 전략적인 측면에서 방법론을 모색한, 실로 의미 있는 것이었다. 홍박사와 나는 그 뒤로도 몇 차례 만나 친분을 나누며 문화와 예술에 대한 폭넓은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한국의 기성문화 예술계와 학계의 주류를 향해 직격탄을 날리기 좋아하는 그의 태도와 자유분방한 사고는 적잖은 적을 만들기도 해서 현재 그가 설 자리는 예전에 비해 옹색한 것 같다. 문화예술계 일부에서는 그를 이단아 취급을 하기도 하지만, 그를 따르고 지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다.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오래전부터 한국의 현대 산수화가 지닌 미학적 가치에 주목하여 여러 편의 글을 쓰기도 한 그는 문화예술에 관한 한 동서양의 안목을 고루 갖춘, 흔치않은 재사이다. 유능한 인적 자원이 부족한 한국의 현실에서 그에게 한국의 문화예술에 관한 깊은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와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기관이나 독지가는 없는가? 그는 현재 외국어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