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칼럼] 더치성(Dutchness)의 합리, 폴더(Polder)와 현대건축
[건축칼럼] 더치성(Dutchness)의 합리, 폴더(Polder)와 현대건축
  • 최혜정 국민대 건축학과 교수/건축가
  • 승인 2013.05.1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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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당시 가장 뜨거운 감자는 새롭게 떠오르는 네델란드의 신예건축가들의 등장이었다. 네델란드 건축협회(NAI)의 적극적인 지원과 여러 학자들의 관심아래, 이들의 그룹전시를 필두로 책의 출판, 강연 등이 연달아 이루졌었고, 화려한 기획과 이벤트들이 뉴욕의 이곳 저곳에서 실행되었다. 주로 20-30대였던 이들은 당찬 젊은 건축가로서의 혈기와 신선한 명제들을 내놓았고, 자칫 위축될 수 있는 현대건축 담론의 써클에 과감하게 자신의 몫을 가지고 가담하였다.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장난같다.’, ‘우리의 실정과는 먼 거리의 얘기들이다’, ‘너무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 아니냐’ 등등.. 이들에 대한 평가와 반응은 호불호가 갈렸었고, 상당한 논란거리도 동반하였지만, 젊은 나이의 이들은 오히려 (젊기 때문에 더욱) 개의치 않은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그 그룹을 대표하던 MVRDV, NL 등의 건축가들은 현재 가장 바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기성 건축그룹이 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다수의 프로젝트로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이 중 그들을 중심으로 출판된 책의 이름을 주목할 만 하다. ‘9+1: Ten Young Dutch Architectural Offices’라는 타이틀로 출판된 이 책은 10개의 단독전시에 참가한 각 건축가들의 작품을 하나로 묶어서 소개한 책이다. 모든 전시는 기획부터 디자인까지 건축가들이 직접 진행하였으며, 이 전시는 브라질 상파올로 건축 비엔날레로 시작하여 비엔나, 로스앤젤레스, 밀라노, 함부르크 등 여러 도시를 투어하며 진행되는 순회전시로 이루어졌다. 하나의 책으로 묶여있지만, 이들은 10개의 개별적 설계사무소이며, 하나의 그룹으로서의 양식이나, 학풍, 또는 운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디자인에 대한 접근방식이나 프로그램적 요구사항과 공간의 요구사항 사이를 작업하고 결합하고자 하는 일종의 작업정신은 공유한다는 것, 하지만 이러한 공유는 각 설계사무소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형태적 언어나 양식의 닮은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총체적으로 지닌 의미가 9+1, 즉, 10이 아닌 9+1인 이유다. 10이 10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하나는 항상 나머지와 다르거나 ‘차이’, ‘특이함’이 존재하는, 느슨한 형성방식의 의미가 담겨있다.

네델란드는 역사적, 특히 지리적으로 독특한 과정을 거쳐 온 문화의 나라다. 국가의 약 1/4 이상이 해면 아래 위치해 있어 오랫동안 자연적, 지리적 상황과 맞서 생존을 해야 했으며 이러한 상황은 특정한 사회의 구성과 운영을 필요로 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이 구성체제 중 하나가 ‘폴더’(Polder)라는 체재이다. 폴더는 방조제를 이용해 바다나 범람지역을 메우거나 습지의 물을 빼내 농경지나 토지로 쓰는 간척지들을 가르키는데, 네델란드의 항공사진을 보면 이러한 폴더가 눈에 띄게 곳곳에 위치하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나라 곳곳에 크고작은 약 3,000여개의 폴더가 있다. 이 폴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정책과 문화와 사회의 도움이 뒷받침되어야 했는데, 세금정책부터 시작하여, 토지분할, 운영 및 관리, 주거계획 등이 모두 같이 조화롭게 맞물려 가야했다. 11세기에 처음 등장한 폴더는 네델란드가 역사적으로 해수면이 지반보다 높은 자연적 상황을 어떻게 맞서고, 인공적으로 지반을 확보해가는 자연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와 관심이 지속적으로 그 문화에 스며든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연이 있고 그 위에 인공적인 것들을 올려놓는, 부담스럽고 인위적인 작업이 아닌, 처음부터 자연을 인공화하는 고민이 항상 있었고, 이는 자연과 인공에 대한 ‘조화’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이를 하나의 통합된 문제로 바라본다는 관점이 존재해 왔다는 점이며, 이는 다른나라의 상황과는 분명 차이점이 있다,

도시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들은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 도시의 문제와 그에 따른 다양한 문제점들은 그들이 극복해야 할 사항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또 다른 기회라는 좀 더 긍정적 수용과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접근한다. 이 젊은 건축가들은 네델란드 출신의 대표적 건축가인 렘 쿨하스(Rem Koolhaas)의 후세대이다. 상당수가 실제로 네델란드의 대표적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쿨하스의 사무실에서 실무의 경험을 쌓은 후 독립하였다는 점이 그 사실을 말해주며, 현실을 곧이 바라보고 실질적 풍경들과 현상들과 작업하고자 하는 네델란드적 ‘효율성’과 긍정적 수용의 태도도 쿨하스의 노선을 어느정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조합은 건축가, 도시계획가, 조경가, 정치가, 역사가 등..의 구분이 뚜렷하기 보다는 복합적이다. 전시에 소개된 10개의 회사 중 두 회사 - Maxwan, Crimson은 건축디자인 보다는 도시와 건축을 역사적 측면에서 바라보고 디자인을 접근하는 연구집단에 가까운데, 그렇다고 이들의 연구가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바탕으로 추출한 창조적 논제와 제안의 방향으로 다른 집단과의 협업을 하는 방식을 취한다. 실제로 네델란드의 대부분의 프로젝트들이 아예 초반의 기획단계부터 실질적인 실행까지 전반적인 진행에 거쳐 ‘협업’이라는 상태를 유지하는 점을 바라볼때, 각 분야의 전문기술이나 자존심의 문제보다는 총체적 환경을 구축하고 구성하고자 하는 더 큰 틀의 그림에 모두가 같이 동의하고 같이 간다는 ‘합의’ - consensus 와 그에 맞는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점을 볼 수 있으며, 이는 네델란드의 역사와 환경이 자연스럽게 이러한 구성체제가 들어설 수 있는 문화를 형성시켰다는 점을 가르킨다. 오늘날 도시와 건축의 문제가 더욱 긴밀하게 사회적, 경제적 연결고리를 맺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억세거나 압박감이 있는 태도보다 오히려 부드럽지만 독창적인 ‘효율’의 태도가 문화화가 된다면 도시와 건축은 향후 어떻게 진화될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하는 부분이다. 


폴더의 경작지 사이에 있는 헛간이나 창고들이 서 있는 모습.


(왼쪽) 네델란드 출신의 건축가그룹 MVRDV가 설계한 VPRO빌딩(1997) - 특이한 성격을 띄고있는 방송사 VPRO의 신사옥. 사무공간이라고 하기에는 VPRO의 작업방식이 워낙 독특하여 ‘빌라’라고 부른다. 부지의 열악한 조건안에서 최대한의 채광과 공간/프로그램의 유연성을 제공하기 위한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오른쪽) VPRO 빌라의 내부사진 – 건축가들의 의도나 계획이 아닌, 만들어진 공간에 일상이 덧 입혀지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콘크리트 마감의 천정에 달려있는 고풍의 샹들리에, 깔려있는 시칠리안 카페트, 옆에 놓여있는 화분, 곳곳에 놓여진 조명등들이 공간의 나머지를 완성하고 건축은 느슨한 틀로 작동한다.